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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53 : 조선의 역사 195 (선조실록 6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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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53 : 조선의 역사 195 (선조실록 60)

두바퀴인생 2012. 7. 21. 03:15

 

 

 

한국의 역사 653 : 조선의 역사 195 (선조실록 60)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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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진주성 전투의 충신열사들

 

김천일

 

김천일(金千鎰, 1537년 ~ 1593년)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이다. 자는 사중, 호는 건재(健齋), 본관은 언양이며,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1537년 전남 나주군에서 진사(進士) 김언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이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573년(선조 6년) 학행으로 발탁되어 군기시 주부가 되었고, 이후 용안현감강원도·경상도도사를 역임하였다. 사헌부 지평 때 상소를 올렸다 좌천되어 외직으로 나갔으며, 1578년(선조 11년) 임실 현감을 지냈다. 이후 담양부사·한성부 서윤·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 나주에서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박광옥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호소하고, 5월 6일 의병을 일으켰으며, 평안도를 향하다 왜적과 전투를 벌이며 수원 행산고성을 거쳐, 8월 전라병사 최원의 관군과 함께 강화성으로 들어갔다.

 

그 공으로 장례원 판결사가 되고 창의사의 군호를 받았다. 왜군의 점령하에 있던 한성부에 결사대를 비밀 잠입시켜 싸우거나, 한강변의 여러 왜군진을 급습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군대가 개성으로 오고 있을 때, 이들에게 지형과 적의 형편 등을 알려 작전을 도왔다.

 

왜군이 남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자, 이를 추격하여 1593년 음력 6월에 절도사 최경회 등과 진주성에 주둔하였다. 1593년 명나라와 왜국 간에 강화가 제기되었을 때 이를 반대했다. 그 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이 대군을 이끌고 성벽을 넘어 들이닥쳤으나, 아군은 화살이 떨어지고 창검이 부러져 대나무 창으로 맞서 싸우다가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그의 아들 김상건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이후에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 추증되고, 1618년(광해군 10)에 의정부영의정이 가증되었다. 나주의 정열사, 진주의 창렬사, 순창의 화산서원, 태인의 남고서원, 임실의 학정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이다.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김천일은 의만 높고 재주가 없어서 졌다.”고 평가하였다.

 

 

 

최경회

 

최경회(崔慶會, 1532년 ~ 1593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또는 일휴당(日休堂),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1532년 전라남도 능주(綾州)(현 화순군)에서 해주 최씨 최천부(崔天符)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응정(梁應鼎), 기대승(奇大升)에게 수학하였으며, 1561년 명종 16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에 이어 옥구, 장수, 무장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후처인 주논개는 장수현감을 할 때, 논개의 숙부가 민며느리로 팔아버린 것을 논개의 어머니가 다시 찾아온 송사를 통해 알게 되었으며, 이들 모녀가 거처할 곳이 없음을 말하자 관청에서 지내게 배려하였다. 이후 무장현감으로 임명될 때 이들을 데리고 갔다. 그는 이어 영암군수와 영해, 담양부사를 역임하였다.

 

1590년(선조 23년) 모친 평택임씨가 임종하여 상을 치우기 위해 벼슬을 내어놓고 고향인 화순으로 낙향하였다. 1592년 모친의 삼년상 기간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큰 형 경운(慶雲)과 둘째 형 경장(慶長)과 함께 고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화순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한다. 그는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500여명의 의병을 규합하고, 조카 최홍재로 하여금 고경명 장군의 휘하에 합류하여 싸우게 했다. 그러나 금산전투에서 고경명이 전사하자 그의 휘하였던 문홍헌 등의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합류함으로써,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금산과 무주에서 전주와 남원으로 진격하는 왜병과 싸웠고, 금산에서 퇴각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우지치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로 인해 진주로 집결하는 왜군을 방어함으로써 진주대첩을 가능하게 하였다. 최경회는 이 전공으로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했다.

 

1593년 경상도병마절도사로 진주성에 주둔 중 6월 가토 기요마사 등이 다시 진주성를 공격해오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 고종후(高從厚) 등과 분전했으나, 9일 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결국 남강에 투신자살하였다.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을 지키고 있던 지휘관과 병사를 비롯하여 양민들까지 대부분 전사하였다.

 

사후 1753년 영조 29년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리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능주(화순)의 포충사(褒忠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장수 월강사(月岡祠)에 배향되었다.

가족 관계

  • 부친: 최천부(崔天符)
  • 조부: 최윤범(崔尹範)
  • 증조부: 최혼(崔渾)
  • 형제: 형 최경운(崔慶雲), 최경장(崔慶長)
  • 처: 김씨
  • 후처 : 주논개

 

 

황진

 

황진(黃進, 1550년 ~ 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무인. 본관은 장수이고, 자는 명보(明甫),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1550년 황희의 5대손이자, 황윤공의 아들로 지금의 남원군 주생면 영천에서 태어나다. 1572년 선조 5년에 2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임명되었어 함경도에서 6년을 근무하였다. 거산도찰방, 안원권관 등의 하위 관직을 거쳐 선전관이 되었다.

 

1590년 황윤길(黃允吉) 일행을 따라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제용감 주부를 거쳐, 동복현감이 되었고 왜란의 기미를 감지하고 공무가 끝나면 말타기와 활쏘기를 부지런히 익혔다.

 

1592년 6월 왜적이 전라도와 충청도를 침범하자, 이광(李光)이 권율을 도절제사로 삼고,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나아가 수비하게 하였다. 황진도 이광의 휘하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적의 침입을 방비하였다. 용인의 전투에서 패하여 남하 하던 중, 진안에 침입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이어 안덕원(安德院)에 침입한 적을 격퇴하였였다.

 

 

 

대둔산 휴게소에 세워진 이치대첩비

 

 

7월 훈련원판관으로 이치전투(梨峙戰鬪)에 참가, 왜적을 격퇴하였다. 왜군의 대병이 이치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치를 점거하여 총탄에 맞는 부상까지 입으면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 이복남과 황진은 이 전투로 이름을 떨치게 되어 이 공으로 황진은 익산군수와 충청도조방장을 겸하였다.

 

1593년 2월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수원에서 왜군과 싸웠으며, 3월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진(陣)을 안성에 옮긴 다음 군대를 훈련시켰고, 죽산성의 왜군과 대치중 왜군이 안산성을 탈취하고자 죽산성을 나와 안성에 진군하자 이들과 맞서싸우며 죽산성을 점령하였고, 퇴각하는 왜군을 상주까지 추격하여 대파시켰다.

 

1593년 6월 10만의 왜군이 진주를 공략하자 김천일(金千鎰),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 제2차 진주성 전투를 벌이다 9일간의 항쟁 끝에 전사를 한다.

 

그의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남원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장윤

 

장윤(張潤, 1552년 음력 1월 9일 ~ 1593년 양력 6월 29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목천, 자는 명보(明甫)이다.

 

1552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1582년 무과 병과에 급제하여 발포만호(鉢浦萬戶)가 되었다. 이후 관리들의 부패를 쇄신할 방책인 결백론(潔白論)을 주장했으나 그 때문에 상관의 미움을 받게 되자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둔생활을 했다.

 

1591년 다시 사천현감(泗川縣監)에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들이 일어나도록 하여 의병활동을 지원했으며 좌의병부장(左義兵副將)을 겸하게 되었다. 이후 성산(星山)과 개령(開寧)에서 왜군에게 대승을 거두고 성주성(星州城)을 탈환했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왜군이 김시민이 지킨 진주성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9만 3천의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공격해 오자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성으로 들어가 싸웠다. 음력 6월 28일 황진(黃進)이 죽자 성에서는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에게 순성장(巡城將)을 맡게 했으나 서예원이 나약한 태도를 보이자 최경회(崔慶會)가 노하여 그의 목을 베려고 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장윤이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장윤도 왜군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순천 정충사(旌忠祠), 진주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되었다. 그를 기리는 문화재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서평리에 세워진 장윤정려(張潤旌閭)가 1649년에 세워졌다. 장윤정려는 현재 시도기념물 제 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예원

 

이조참판 휴휴당 형 세째로 1547년에 탄생, 휘는 예원, 자는 숙부, 호는 우암이다.


1573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1574년에 선전관이 되었다. 1577년에는 나주판관에 보임되었다가 2년 후 1579년에 내직으로 돌아와 도총부도사에 비변방을 겸하였다. 1581년에는 다시 외직으로 나가 보성군수에 보임되었고,1583년에는 보화첨사에 전보되었는데,얼마되지 않아 부하들 잘못으로 문책을 당하여 종성으로 부처되었다.

그후 곽산군수에 기용되었으며, 1591년에는 김해부사로 영전하였다.

김해로 부임한지 불과 1년도 안된 1592년 4월 왜적이 부산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쳐들어왔다. 다대포를 유린한 왜적이 서로군 (西路軍) 약 5만여명은 낙동강을 따라 북상하여 4월 19일에 김해성을 포위하였다.


서예원은 군사들을 성곽에 배치하여 진두지휘하였으나 적의 위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초계군수 이유검이 성문을 열고 먼저 달아나니 그 틈으로 적의 대병이 들오자 성을 버리고 도망쳐 순찰사 김수 진영으로 갔다.


그간의 전투상황을 보고 받은 순찰사 김수는 이유검을 군법으로 처형하고, 서예원은 삭탈관직하여 백의종군케 하였다.

초유사 김성일은 진주목사 김시민이 제1차 진주성 전투 당시 입은 부상의 휴유증으로 죽자 그해 12월 서예원을 진주 임시 목사직을 맡기고, 보임을 상주하여 익년 4월에 정식으로 진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에 적의 대포소리가 들리고 얼마 안되어 왜적이 산과 들을 메우고 쳐들어 왔다. 이에 전의를 잃은 도원수 김명원과 전라순찰사 권율이 전라도 쪽으로 철수하고 군사들은 모두 흩어졌다.그 리하여 진주성은 홀로 외롭게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창의사 김천일.경상우병사 최경회.충청병사 황진 등이 약간의 군사를 이끌고 차례로 입성하였다. 당시 7월 경상감사 김근의 전사자 보고에는 성의 군사 2천 4백 명, 김천일 등 외지군 830명으로 되어 있었다.

6월 20일 왜적은 진주 경내에 나타났다. 그들은 함안에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일거에 진주에 당도했다.왜적은 5개군으로 나누어

제1군은 가등군 [加藤軍] 2만 3천 6백 명은 북문을
제2군 소서군 [小西軍 ] 2만 5천 1백 명은 서문을
제3군 우희다군 [宇喜多軍] 1만 3천 6백 명은 동문을
제4군 모리군 [毛利軍]과 제5군 소조천군 [小早川軍] 2만 2천 3백 명은 각각
외곽에 위치하여 아군의 외원 [外援]을 차단하니,합 [ 84600명 ]

진주성은 고립무원의 고도처럼 되었다. 그러나 성안의 사람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은 성곽에 몸을 숨기고 활을 쏘와 적을 막았다. 왜적은 총탄과 화전을 성안으로 퍼부었다. 화전이 간혹 초가에 떨어져 화재가 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속하게 대처하여 큰 불로 번지지는 않았다. 왜적들은 온갖 수단으로 공격을 가했으나 성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니 적은 점점 초조해졌다.

왜적은 동문과 남문 앞에 몇 개의 고루를 세우고 그 속에 숨어서 조총을 쐈다. 우리 군사들도 축대를 높여 대항하였다. 이와 같은 싸움이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8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우리 군사 3천명이 왜적 9만 명과 싸우는 대혈전이었다. 밖에서 조금만 지원해 주어도 왜적은 전의를 잃고 퇴각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랐던 외원군은 오지 않고 궂은 비만 내렸다. 계속되는 장마에 활은 아교가 녹아 못 쓰게 되고,왜적은 비에 젖어 약해진 성곽을 허물기 시작하였다. 우리 군사들은 돌과 열탕을 부어 적을 물리쳤다. 그러자니 손이 모자라 집에 있는 아녀자까지 나와 적과 싸우게 되었다. 27일 동문 근처 성곽 일부가 비로 인해 무너졌다. 왜적이 개미떼처럼 기어 올라왔다.군사는 물론 아녀자까지 나와서 돌을 굴러 내리고 무너진 틈을 가시로 틀어 막았다.


28일 저녁에는 동쪽 성곽 일부가 또 무너졌다. 그 곳 우리 군관민은 돌과 열탕을 퍼부어 적을 간신히 막았는데, 이를 먼 발치에서 바라본 북문의 김천일 군사가 성이 함락된 줄 알고 미리 겁을 먹고 흩어졌다. 이를 성밖에서 바라본 왜적이 대거 북문으로 몰려와 성안으로 난입하였다.


우리 군사는 힘써 막았으나 중과부적 이었다. 왜적은 군과 민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살상하였다. 그리하여 다음 날 6월 29일에 성이 함락되고 성을 지키던 6만 여 명의 군.관.민 모두가 살상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제2차 진주전은 비록 전투에서는 패했으나 전략적으로 승리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왜적은 이 전투에서 정신적으로 패하서 저희 나라로 철수했기 때문이다. 즉 진주 6만 군.관.민이 일치단결하여 죽음으로써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을 빛낸 위대한 승리였다. 

 

서예원의 정부인 이씨 또한 전투가 시작되자 자부[子婦]와 딸, 그리고 여종들을 거느리고 군대의 취사장으로 나가 밥을 짖는 일을 돕다가 부군과 장자 계성이 전사했다는 말을 듣고는 자부 노씨와 미혼의 딸을 데리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수절했다.

공의 장자 생원 계성공도 종자 김이, 춘년과 함께 적군으로 돌진하여 적 5 ~ 6인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그리하여 서예원의 혈육으로는 세째 아들인 갈곡공 계현은 일찍 명암공 후로 출계하여 진주에 없었고, 둘째 아들인 계철은 얼마전에 장가들어 초행으로 함양 처가에 있었다.

 

나이 불과 15세인 계철은 진주성 함락 소식을 듣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진주로 달려가서 왜적에 항거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왜장 가등청정은 그가 바로 진주목사 아들임을 알고는 일본 휘원 집으로 보냈다. 이렇게 한 왜장 가등청정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휘원 조상은 백제 태자를 따라 도일한 백제계 인물이었다. 그래서 휘원은 계철을 특별히 대우했다. 하여간 그는 13년 만에 억류생활에서 벗어나 귀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