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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60 : 조선의 역사 202 (선조실록 6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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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60 : 조선의 역사 202 (선조실록 67)

두바퀴인생 2012. 7. 28. 02:59

 

 

 

 

한국의 역사 660 : 조선의 역사 202 (선조실록 67)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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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대첩도

임진왜란 해전 목록

 

아래의 목록은 임진왜란의 해전 목록이다. 정렬 순서는 시간순이다.

 

날짜 해전 장소 조선군 일본군 비고
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옥포 해전 거제시 옥포 이순신 도도 다카토라 조선군의 첫 승리
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합포 해전 진해시 웅천동 이순신
1592년 6월 17일
(음력 5월 8일)
적진포 해전 고성군 거류면 통영시 광도면 이순신
1592년
(음력 5월 29일)
사천 해전 사천시 용현면 이순신 구루지마 미치유키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
1592년
(음력 6월 2일)
당포 해전 통영시 산양읍 이순신 카메이 코레노리
1592년
(음력 6월 5일)
당항포 해전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이순신
이억기
1592년
(음력 6월 6일)
율포 해전 거제시 장목면 이순신
1592년 8월 14일
(음력 7월 8일)
한산도 대첩 통영시 한산면 이순신
원균
이억기
와키사카 야스하루
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안골포 해전 진해시 안골동 이순신
원균
이억기
구키 요시아키
1592년
(음력 8월 29일)
장림포 해전 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이순신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화준구미 해전 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다대포 해전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이순신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서평포 해전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이순신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절영도 해전 부산시 영도구 이순신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초량목 해전 부산시 동구 초량동 이순신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부산포 해전 부산시 동구 좌천동 이순신
1593년 3월 6일
(음력 2월 10일)
웅포 해전 경남 진해시 웅천동 이순신
1594년
(음력 3월 4일)
제2차 당항포 해전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어영담
1594년
(음력 10월 4일)
장문포 해전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이순신
1597년 8월 28일
(음력 7월 16일)
칠천량 해전 거제도 인근 칠천량 원균
이억기
배설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조선군의 유일한 패배.
원균, 이억기 전사
1597년
(음력 8월 27일)
어란포 해전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 이순신
1597년 10월 16일
(음력 9월 7일)
벽파진 해전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이순신
1597년 10월 25일
(음력 9월 16일)
명량 해전 전남 해남군 문내면, 진도군 녹진리 이순신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1598년
(음력 7월 19일)
절이도 해전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이순신
1598년 10월 19일 -
11월 6일
장도 해전 전남 순천시 장도 이순신
진린
고니시 유키나가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노량 해전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이순신
진린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와키사카 야스하루
소오 요시토시
가토 기요마사
이순신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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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전량 해전 패전 책임에 대한 고찰(계속)

 

 

 

칠전량 해전의 패전과 그로 인한 영향

 

임진년에 일본군은 조선 수군 이순신에게 연전연패하자 해상 보급로가 막히고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병참선이 위협받고 이치, 웅치, 행주 대첩에서 막대한 막대한 전력이 소진되는 등 퇴각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되었고 반면 조선군은 전열이 정비하기 시작되면서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자 일본군은 평양에서 철수하고 난 다음 한양에서 버티다가 결국 한성까지 버린 다음 남쪽으로 철수하여 남해안 일대에서 왜성을 구축하고 장기전에 대비하면서 반격을 시도한다.

 

그러나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전하여 호남 진출이 좌절되고 한편으로 명과 일본 간에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한편,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에 대해 일종의 공포감을 가지게 되었고 풍신수길은 조선 수군과의 전투를 회피하도록 지시를 내리게 된다.  

 

이렇게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이순신은 적의 재침에 대비하여  한산도에 전라좌수영을 설치하고 이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자 전라좌수영은 통제영 전진 기지로 확장 설치된다. 원래 한산도는 경상우수영 관할 지역으로 원균과 합의하였는지는 몰라도 다소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바로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는 바람에 그 문제는 우야무야 되고 말았다.

 

이순신은 한산도를 근거지로 삼아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둔전을 개발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하였고 무기와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 동쪽으로 진출할 전진기지로 한산도를 요새화해 나갔다.

 

그래서 이순신은 웅천의 왜적을 몇 차례 공격한다. 그러나 적은 만 깊숙한 곳에 숨어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해협 양쪽에 포대를 설치하여 조선 수군의 진입을 막으면서 직접적인 싸움을 회피하기만 하였던 것이다.

 

이순신은 수룩병진책을 구상하였는데 육군과 수군이 합동으로 해상의 수군을 격파하면 육군은 육지의 적을 섬멸하면서 부산을 압박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육군에서 가용 병력이 부족하여 그 계획은 실현을 보지 못한다.

 

이순신의 끈질긴 웅천 공격으로 웅천의 일본군은 그곳에서 견디지를 못하고 안골포와 가덕도로 옮겨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서행장과 요시라의 반간계 역정보가 김응서에게 전해진다. 가등청정이 울산 서생포로 언제 상륙할 것이라는 정보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출동을 지시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서생포 공격은 불가하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러자 선조와 조정은 분노하였고 여기에 원균의 장계가 올라오자 이순신을 명령 불복종으로 잡아들여 치죄하고 고문하여 참형 직전까지 갔으나 선조의 변심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백의종군을 당하게 되고 원균이 대신 삼도수군 통제사에 임명하게 된다.

 

그때쯤, 협상이 결렬되고 왜군이 속속 다시 부산포에 상륙하게 된다. 일본군은 이순신이 물러난 뒤 조선 수군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면서 서진을 노리고 있었고 육군도 호남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그때 새로 부임된 원균이 도원수 권율의 부산포 공격 성화에 못이겨 전선 100여 척을 이끌고 출전하여 우선 안골포와 가덕도를 치게 된다. 그러나 적을 치는데 실패하고 전선 몇 척만 전과를 올리고 철수하게 된다.

 

그러자 사천까지 내려와서 소식을 기다리던 권율이 분개하여 원균을 호출하였다. 이어서 원균이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고 한산도로 돌아와서 울분을 삭히고 있을 때 선전관이 선조의 어명을 전하게 된다. 그래서 원균은 하는 수 없이 부산포로 출전하게 된다. 그래서 무리한 부산포 공격으로 지친 조선 수군이 돌아오다 칠전량에서 조선 수군이 대패하게 된다. 이상이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들이다.

 

칠전량에서 조선 수군을 대파한 일본군은 수로가 열려 대대적으로 전라도를 침범하게 된다. 전주와 남원이 왜군 손에 떨어지자 대책이 없는 조정은 전전긍긍하고, 도체찰사 이원익은 강원도 이남의 모든 지역에 청야명령을 내린다. 왜군이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우거나 없애고 산성으로 대피하라는 명령이었다.

 

왜군은 급기야 구례까지 점령하고 섬진강을 이용하여 보급을 받은 후에 북진하기 시작한다. 익산, 부여, 한산, 서천, 공주가 점령되고 이어서 직산에서 명군과 대치하게 된다. 이어서 전투가 개시되자 서로 밀고 밀리는 전투가 계속되었고 결국 명군이 200여 명, 왜군이 29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명군이 승리하였다며 자랑하던 직산대첩이라는 전투이다. 왜군은 보급품이 떨어져 가고 있었고 왜군 수군이 서해를 올라와서 한강으로 보급품을 보급해 주기를 기다린다.

 

한편 조선 수군이 괴멸되자 왜군은 통제영 전진기지가  있던 한산도를 약탈하고 수군 중 일부는 남원과 전주 전투로 올려보내 육전에 참전시킨다. 그리고 약 한 달반 후 서진을 위해 출동한다. 이 한 달반 동안의 시간이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로 복직한 이순신에게는 천금같이 귀중한 전력 정비 시간이 되었다. 이순신은 남은 전선 12척으로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시작하였고 불철주야 전력을 기울인다.

 

그때 천안까지 진출해 있던 일본군은 수군에게 빨리 금강이나 한강으로 보급품을 싣고 올라와 달라는 연락을 하게 되는데 돌아온 것은 다음과 같은 대답이었다.

   

"조선 수군 이순신이 타시 통제사가 되었고 그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

 

그러자 일본군은 즉시 북진을 멈추고 남쪽으로 후퇴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 수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이순신을 치고 서해로 진출하기 위해 계속 서진한다.

 

당시 서해로 출전한 왜선은 전투함 133척, 수송선 200여 척 총 333척 규모였다. 그래서 벌어진 해전이 바로 '명량 해전'이다. 명량 해전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겠지만, 이 해전의 '기적의 해전'이며 이순신을 위대한 장군으로 재평가 받을 수 있는 '경이로운 전투'였으며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전투였다. 세계 해전 사상 이러한 절대 열세의 전력으로 열배가 넘는 적을 격파했다는 해전사상 이와 비슷한 전례는 없으며 보통의 인간이 할 수 없는 놀라운 해전이었다.   

 

그래서 서해로 북상하려던 일본군은 어란포에서 대기하던 2만 5천여 명의 병력과 군수물자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칠전량 해전 패전이후 한 때 열리는 듯 하였던 서해 수로는 조선 수군 이순신에 의해 굳게 닫혀지는 결과가 되었다. 왜군은 더 이상 북진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철수하여 남해안 일대에 포진하여 왜성을 쌓으며 장기 농성전에 돌입하였다. 칠전량 해전이 끝난지  두 달 만이었다.

 

이 명량 해전의 승리로 이순신은 다시 한 번 조선 수군의 위상을 드높이는 결과가 되었고 이순신을 조선 최고의 장수,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구한 장수, 세계 해전사에 이름을 남긴 해전,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구국의 영웅이 아닌 성웅으로 후세들의 평가를 받게 되는 결과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원균은 무능한 장수로, 선조는 우유부단하고 시기심이 많은 조선을 말아먹은 군주로로 역사에서 조연으로 남게 되었다. 망해가던 조선을 구하게 된 이 사건이 이순신의 해전이 더욱 빛나게 되는 결과를 만들었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서라 하던가? 그러나 실록에서 승자들이 아무리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록하였다 하더라도 사실은 반드시 어디선가 기록되는 법, 역사는 엄중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칠전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패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왜수군은 경상도 이서 바다를 넘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것은 육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 수군이 부산포를 압박하여 왜군의 철수를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전라도와 충청도가 일본군에게 유린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칠전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대패함으로써 재기가 거의 불능한 상태가 되었고 일본군은 마음 놓고 전라도와 충청도를 유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만약 명량에서 적을 막지 못했다면 금강을 통해 보급물자를 보급받은 일본군이 한양을 다시 점령하였을 것이고 한강에서 보급품을 지원받은 일본군은 다시 북진하여 평양을 점령하고 대동강을 통해 보급받은 일본군이 나중에는 조선을 거의 점령하였을지도 모르며 조선 말 한일합방으로 인한 일제 지배가 앞당겨 졌을지도  모르고 만주 정복이나 산동반도 상륙 등 일본군의 중국 침략도 앞당겨졌을지도 모르며 동북아 역사는 다시 썼어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