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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28 : 조선의 역사 170 (선조실록 35) 본문
한국의 역사 628 : 조선의 역사 170 (선조실록 35)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옥포대첩 승전보에 대한 조정의 대응과 태도
이순신의 장계가 의주로 피난 가 있던 조정에 처음으로 보고된 날짜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대략 5월 23일경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선조실록>에는 6월 21일자에 그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
현대에 와서 일부 소설과 연속극에서는 이순신과 원균의 첯 번째 전투가 끝난 후에 연명으로 승첩 장계를 올리기로 약속해 놓고 이순신이 혼자 먼저 장계를 올려서 전공을 가로챈 것처럼 쓰고 있는데, 이런 주장은 <선조수정실록> 6월에 기록되어 있는 제2차 출전에서의 당포해전 뒷부분에 나오는 다음의 기사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또 영등포에서 싸워 배를 통째로 붙잡고 적을 섬멸하였다. 이로부터 군사의 위력이 크게 떨쳤다. 싸움에서 이긴 보고가 올라가니 이순신에게 표창으로 자헌대부의 품계를 올려주었다. 처음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원병을 청하여 적을 패배시킨 후 '연명으로 보고를 올리고 싶어하자', 이순신이 '아직 천천히 하자'라고 해놓고는 밤에 직접 보고서를 썼는데, '원균이 군사들을 잃고 의거할 바가 없으며 적을 치는 데 공로가 없었다는 사실들을 모두 다 진술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원균이 이 말을 듣고는 크게 유감을 가졌으며 이로부터 공로에 대한 보고서도 제각기 올렸다. 두 사람의 사이는 이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하였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의 이 기사는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에, 즉 이순신이 전사한 후에 당시 세력을 잡고 있던 원균 지지세력들이 앞서 정유년에 이순신을 모함하여 옥에 가두기 위해 조작해낸 모함의 말들을 이순신 사후에 사실인양 꾸며놓기 위해서 지어낸 허구일 뿐, 전혀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이야기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이순신은 5월 8일 적진포 앞바다의 배 위에서 왕의 피난 소식을 들었고, 그래서 더 이상의 진격을 중단하고 각각 자기 본영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원균과 헤어져서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왔다. 이때 가장 시급한 일은 한시라도 빨리 승전의 소식을 피난 가 있던 임금에게 전해 올리는 것임을 이순신이 어찌 몰랐겠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한 장수로서 승전의 보고를 올리는 일이야 말로 분초를 다투는 가장 시급한 일이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여태까지 하루에 몇 차례씩이나 시각을 지체하지 않고 신속하게 장계를 올려 왔던 이순신에게는 원균과의 약속(실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슴)을 지키기 위해서 승첩보고를 올리는 일을 여러 날 지체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승첩 장계를 올리는 일은 곧 전투에 참여한 휘하의 모든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전공에 합당한 표창을 하기 위한 첯 단계 절차이기도 하다. 당시 전투에서 승리한 공로가 전적으로 지난 1년 동안 고된 훈련과 전쟁 준비에 온 힘을 다해온 전라좌수영 군사들에게 있음이 너무나도 명백한 상황에서, 원균과 연명 장계를 하게 되면 경상우수영 소속 장수들과 전라좌수영 소속 장수들이 동일한 전공을 올린 것처럼 허위보고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동일한 표창을 받게 된다면, 좌수영 장수와 군사들이 전혀 승복하려 들지 않을 것인데, 이로 인하여 공정해야 할 상벌의 시행이 헝클러짐으로써 앞으로 군사들을 지휘하는 일 자체가 곤란해질 우려조차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연명 장계를 올리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경상우수영 함대를 스스로 붕괴시킨 후 도망다니면서 숨어지내다가 이순신 함대에 편승하여 겨우 전함 세 척을 거느리고 뒤를 따라다니면서 전라좌수군 장병들이 잡은 왜선을 빼았으려고 아군을 향해 활을 쏘아 부상을 입히고, 또 이미 죽은 적의 목이나 베는 데 열중하던 한심한 작태를 보인 원균과 같이 연명 장계를 올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원균 입장에서 같은 대등한 수사로 같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 입장이기에 이순신이 올린 전공에 편승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겠지만, 당시 그동안 장수로써 행한 부적절한 처신과 조치로 말미암아 경상우수영이 붕괴되다시피 하였고 원균 자신이나 부하들의 행태를 돌이켜볼 때 그것을 떳떳하게 정식으로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전혀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마도 자신의 그런 의중을 넌지시 이순신에게 비치자 이순신이 매정하게 거절하지는 않고, 임금이 피난을 떠난 국가 최대의 위기 상황에서도 공로 챙기기에만 골몰하는 원균의 태도가 한심하게 여겨져서, "그 일은 천천히 생각하자."라는 정도의 말로 완곡하게 거절하였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런데 원균은 그 거절의 말을 제멋대로 승낙의 말로 해석하고 기다렸다면, 그런 착각은 또한 어디까지나 원균 자신의 우둔한 판단에서 비롯된 잘못이라 하겠다. 또 결과론적이지만 나중에 원균이 이순신이 모함을 맏고 백의종군 할 때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칠전량 해전에서 거북선을 포함한 조선 수군 대부분을 잃고 대패함으로써 그의 전략.전술에 대한 무지함이나 지휘통솔 능력이 어떠하였는지를 잘 증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첯 번째 해전에서 승리한 조선 수군의 소식을 전해들은 조정에서의 반응을 <선조실록>에서 살펴보자.
승첩한 이순신에게 품계를 올려주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수군을 동원하여 타도까지 깊숙이 들어가 적선 40여 척을 격파하고 왜적의 목을 베었으며 빼앗겼던 물건을 도로 찿은 것이 매우 많았다. 비변사에서 표창을 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품게를 올려주라고 지시했다....(임금의 지시에 따라)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표창으로 가선대부로 품계를 올려주었다." (선조수정실록. 1592.5. 23)
이때 동래는 벌써 함락되고 적은 곧장 밀고 쳐들어 올라 왔는데, 가는 곳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다. 임금의 행차는 이미 서도로 들어갔는데 황해도 이남에서 동래에 이르기까지는 들리는 것이라고는 패했다는 보고뿐이고 다른 소식은 전혀 없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한산도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전선 80척을 거느리고 이해 5월 6일에 옥포 앞바다로 나갔더니 왜적의 배 30여 척이 있었다. 사면에 장막을 둘러치고 긴 장대를 세웠는데 붉은 깃발과 흰 깃발들을 마구 매달아 놓았으며, 그 나머지 적들은 뭍으로 올라가 민가들에 들어가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하다가 우리 수군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나와서 진을 쳤다. 우리 군사와 바다 가운데서 마주쳐 싸웠는데, 우리 군사는 적선 26척을 불살랐다. 이튼날 다시 큰 싸움을 벌이기로 약속하였으나 임금의 행차가 서도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장수들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 모여 통곡하고 9일에 각기 본영으로 돌아갔다." (선조실록.1592.6.21)
왜란이 터진 이후 최초로 보고된 통쾌한 승첩의 장계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고 난 후의 임금 선조와 신하들의 반응을 전혀 기록해 놓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순신이 올린 장계 <옥포파왜병장 (玉浦破倭兵狀)>의 내용을 요약해서 기록해 놓은 것도 너무나 엉성하다. 이순신과 원균의 역활에 대해서도 명확한 구분도 없고, 이순신의 승첩인지 원균의 승첩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선조실록>은 이 장계를 한 달 후에 있은 <당포파왜병장>과 두 달 후에 있었던 <견내량파왜병장 ; 한산도 대첩>까지 하나로 묶어서 마치 세 개의 장계가 하나의 장계인 것처럼 같은 날짜, 같은 곳에 연달아 기록해 놓은 실수까지 범하고 있다.
5월 8일 회군을 결정한 후 이순신이 여수 본영에 도착한 것은 5월 9일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의 최초의 완벽한 승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서쪽으로 피난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전라좌수영 군사들은 기뻐할 겨를도 없이 잠깐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전쟁준비에 전념했을 것이다. 첯 번째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5월 9일 이후부터 다음의 당포해전을 위해 출항한 5월 28일까지 <난중일기>는 빠져 있다. 아마 적의 역습과 대규모 공격에 대비하여 다음 출동을 위한 각종 작전 회의, 군사.함선.무기 등의 점검, 명령과 지시, 함선 수리 및 건조, 훈련, 병력 보충, 무기.식량.화약 등의 확보 등으로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쓸 틈도 없이 나날이 그만큼 바쁜 시간을 보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는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선조수정실록>의 내용이다. 원균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선조실록을 어떻게 엉터리로 작성하였는지 잘 나타나 있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이 경상도에 응원하러 가서 거제 앞바다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우수사 원균은 대적할 형편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전선과 무기를 모조리 바다에 가라앉히고 수군 1만여 명을 해산시켜 버린 다음, 단지 옥포 만호 이운룡, 영등포 만호 우치적과 함께 남해현 앞바다에 머물러 있다가 육지로 올라가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이운룡이 반대하여 말하기를, "장군에게 나라의 중대한 책임을 맡긴 이상 호남으로 통하는 목구멍과도 같아서 이곳을 잃으면 호서와 호남이 위험하게 될 것이오. 지금 우리 군사들이 흩어졌지만 그래도 모을 수 있을 것이고, 호남의 수군도 와서 구원하도록 청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니,원균이 그 계책에 따라 율포 만호 이영남을 보내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당시 이순신은 한창 여러 포구의 수군을 앞바다에 모아 가지고 적이 오기를 기다려서 싸우려고 하던 차였다. 이영남의 말을 듣고 여러 장수들이 대부분 말하기를 '우리 지역을 지키기에도 힘겨운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에 가겠는가. '라고 하였으나, 오직 녹도 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만은 의분심에 넘쳐 눈물을 흘리면서 이순신에게 '왜적을 치러 나가자'고 권하면서 말하기를, '적을 치는 데 있어서는 우리 도, 남의 도를 가르지 말아야 합니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꺽어놓으면 우리 도 또한 보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이순신이 대단히 기뻐했다.
광양 현감 어영담이 자원하여 바다 물길 안내자가 되어 앞장섰다. 그리하여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과 만났다. 원균이 이운룡과 우치적을 선봉으로 삼아 가지고 옥포에 이르러 왜적 배 30척과 맞붙어 들이쳐서 크게 격파하니, 살아남은 적들은 육지로 올라 달아났다. 적들의 배를 모조리 불사르고 돌아온 다음 다시 노량진에서 적의 배 13척을 불사르니, 적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고도 동일 싸움을 지휘하다가 싸움이 끝난 다음에야 사람을 시켜 칼 끝으로 파냈으므로 부대 안에서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싸움에서 이겼다는 이순신의 보고를 받고 표창으로 가선대부(공훈을 세운 문무관에게 주어지던 정2품급 품계)로 그 품계를 올려주었다." (선조수정실록.1592.5)
여기에서 원균이 마치 싸움의 주도적 역활을 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 바, 이는 사실과 다르며, 이순신이 부상당한 것은 당포해전 때인데 사관이 잘못 알고 이 부분에서 같이 기록한 것이다.
임진왜란 초기 원균의 행적
다음은 유성룡의 <징비록>에서 인용한 것인데, 당시 선조를 비롯한 일반 신하들의 상황 이해도 이와 같았으나, 후에 와서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하면서 그 인식이 크게 변질되어 갔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 육지로 올라왔을 때 원균은 왜적의 형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감히 나아가 치지 못하고 자기 휘하의 전선 백여 척과 화포, 군기를 바다에 침몰시켜 버린 다음, 홀로 수하의 비장인 이영남, 이운룡 등과 함께 4척의 남은 배를 타고 달아나 곤양의 바다 어귀에 이르러 육지로 올라가서 왜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이에 그의 수군 1만 여 명이 다 흩어져 버렸다.
이영남이 간하기를, "장군은 임금의 명령을 받아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지금 군사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간다면 뒷날 조정에서 죄를 조사할 때 무슨 이유를 들어 스스로 해명하겠습니까? 그보다는 전라도에 구원병을 청하여 왜적과 한번 싸워 보고, 이기지 못하겠으면 그 후에 도망가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원균이 그 말이 옳다고 여겨서 이영남으로 하여금 이순신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이영남이 찿아와 구원을 요청하자, "각각 분담한 경계가 있는데 조정의 명령없이는 어찌 함부로 경계를 넘어갈 수 있겠는가?"하며 거절하였다. 이영남의 보고를 받은 원균은 다시 이영남으로 하여금 이순신에게 청하도록 하여 대여섯 차례나 계속 왔다가는 돌아가곤 했는데, 늘 이영남이 돌아갈 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서 통곡하였다." (징비록)
징비록의 기록 중에서 이순신이 거절했다는 부분은 사실과는 다르다. 이순신은 이미 그 전에 출동하기 위해서 부하 장수들의 자발적인 의사를 끌어내려 하였고, 이미 논의 과정을 마친 상태였다. 즉, 실록의 전체 기록을 보더라도 이순신은 원균의 지원 요청을 받기 전에 이미 자체적으로 출전할 준비를 다 해놓고 있었고 4월 23일 여러 차례 조정에 장계를 올려 원균의 관할구역으로의 출동을 승인 받으려고 하였다.
<선조실록>의 수정 문제는 인조반정으로 북인세력이 물러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인으로 지목된 이이, 성혼, 박순, 정철, 남인 유성룡에 대해서는 없는 사실을 꾸며 비방한 사실을 바로잡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런 사유로 인조 즉위 초에 경연관 이수광, 임숙영 등이 수정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다가 1641년 인조 19년에 대제학 이식의 상소로 수정을 결의하고 그로하여금 전담하여 수정토록 하였다.
1643년 '수정시록청'을 설치하고 수정작업을 시작하였으나, 이식 등이 다른 일로 파면되고 사망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가, 1657년 효종 8년 김육, 채유후 등이 재차 '수정실록청'을 설치하고 동년 9월에 완성하였다. 총 42권 중 선조 즉위년부터 1629년까지 30권은 이식이 편찬하였고, 1630년부터 1641년까지의 12권은 김육 등이 편찬하였다.
당쟁 이후의 실록은 당론에 영향받는 일이 가끔 있어 이처럼 수정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이전의 실록을 파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권을 잡은 서인이 다시 편찬한 실록인 만큼 이순신에 대한 평가가 공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는 광해군을 자신의 승통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선조를 자신의 승통으로 삼았기 때문에 <선조수정실록>에서 선조가 원균을 두둔한 만큼 원균을 옹호하는 내용이 첨가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이순신은 당파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동인인 유성룡의 친구로서 당파세력에 의해 동인으로 분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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