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627 : 조선의 역사 169 (선조실록 34) 본문
한국의 역사 627 : 조선의 역사 169 (선조실록 34)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24시간 전천후 적정수집
이순신의 해전에서 특징은 '넓은 경계망과 탐색망을 하루 24시간 가동했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이렇게 입수한 정보들을 분석해서 다양한 해전 프로그램을 짜 나갔다. 적의 동향이 파악되면 즉시 각 단위 함대에는 세부 작전지시가 하달되었고, 탐색망에 걸려든 왜선단은 반드시 요격되었다. 합포해전시에도 물샐틈 없는 정찰활동이 사방에서 이루어졌으며 가덕도 쪽으로 나간 탐색선 하나가 이동 중인 5척의 왜선단을 발견하고 쏜살같이 달려와서 이순신에게 보고했다. 이들 탐색대는 옥포해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수척의 협선이 지역을 할당받아 경계하고 있었다. 해전중에도 또 다른 적 함대의 움직임을 감시했고, 해전후에는 본대가 영등포에 무시히 밤을 지낼 수 있도록 적의 기습에 대비하고 있던 중이었다.
척후장 보고에 따라 본대는 즉각 추격에 나섰고 왜선들은 가덕도와 합포 사이 어디쯤을 항해하고 있었을 것이며 시간적으로는 석양이 깃들 무렵이었다. 왜군들은 그간의 승리 분위기 속에 마냥 즐겁기만 했다. 춤추고 노래하며 무인지경의 형편인 경상도 해안을 분탕질해가며 서쪽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날 옥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직 모르고 있었고 그들은 어디선가 신출하듯이 나타난 대선단이 자신들의 뒷편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까지만 해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왜군 함대의 출현 쯤으로 생각한 그들은 더욱 흥을 돋구며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빠른 속도로 접근해오는 것이 마치 자신들을 뒤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자세히 살펴보니 모든 배들이 누른색의 쌍돛(왜선들은 외돛)을 달고 있었다.
"앗! 조선 병선이다!"
누군가가 내지른 소리에 갑판 위는 졸지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기겁을 한 왜군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넘어지고 부딪히며 달아날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5척의 왜선으로 조선군의 대함대를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했거니와 적 함대가 숲 속의 범처럼 숨어서 자신들을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겁할 만한 사건이었다.
조선 함대는 적을 놓칠세라 군악을 울리며 먕렬한 기세로 따라 붙었다. 쫓기는 왜군들은 조선 함선보다 속도가 빨랐지만 먼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합포만으로 배를 몰았다. 그리고는 해안에 닿자마자 배를 버리고 허둥지둥 산으로 기어 올라갔고, 산 속에서 깊이 몸을 숨기고 조선 함대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조선 함대는 왜군 함선만 모두 깨뜨리고 돌아갔다. 왜군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제야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깊은 숨을 몰아쉬던 왜군들은 박살이 나서 불타고 있는 배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배도 없이 기지까지 걸어서 돌아갈 일도 걱정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적 함대의 출현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모두 얼떨떨하기만 했다. 해전이 끝난 때는 이미 밤 9시경이 되었고 처음 치른 야간 해전이었다.
신출귀몰의 함대
조선 함대는 곧바로 합포만을 되돌아 나왔다. 역시 상륙한 왜군들은 뒤쫓지 않고 '치고 빠지는 전술'이었다. 그리고는 힘들여 야간 항해로 남포항까지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인근에 또 다른 왜군이 있을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바다에서 진을 치고 숙영했다. 장계에서 '바다에서 진을 쳤다'는 것은 적의 기습에 대비한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하면 이튼날 새벽 일찍 출항하기에도 좋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언제던지 적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는, 어느 때건 신속히 기동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자 힘썼고 수병들은 거기에 맞춰 끊임없이 조련시켜 나갔다. 이 날에도 해상에서만 머물렀는데, 육지에서 쉰다면 머물렀던 흔적이 남게 되고 탈영병까지 생길 우려도 있다. 이 역시 다방면을 고려한 이순신 식의 군영의 모습이었다. 합포만으로 쫓겨 올라간 왜군들은 이튼날 아침이 되자 조선 함대의 소재를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조선 함대는 보이지 않았다. '귀몰(鬼沒) 현상'이었다.
오늘날까지 이순신의 신출귀몰한 항해술에 대해서 '조선 함대가 특별히 속도가 빨랐다."라던가 '거북선이 입으로 유황 연기를 내뿜었기 때문에 전체가 보이지 않아 신출귀몰'했다는 식의 해석이 많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싸울 때는 전 함대의 함대의 진형을 갑자기 드러내면서 일시집중타로 짧은 시간 동안 바람과 우뢰같이 몰아쳐서 집중적인 공격으로 적 함대를 격파하고 신속하게 사라지는 속전속결 전법으로 '치고 빠지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이순신 함대가 기동함대로 나서기만 하면 왜군 측에서는 시종일관 그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고, 마냥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꿈같은 귀향
적진포 해전이 끝난 5월 8일. 선조의 파천 소식을 접한 이순신과 원균 함대는 추후 다시 연락하기로 하고 각기 귀향을 서둘렀다. 첯 전투를 승리로 끝낸 터였기에 좌수영 함대의 귀향은 시끌벅적했을 법도 했지만 선조의 피난 소식으로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침통한 분위기 가운데에 이순신이 있었다.
병사들로서는 생사를 기약할 수 없었던 출동이었다. 때문에 이날의 귀향은 분명 꿈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에게는 그 어디에도 믿을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함대만이 격랑의 바다위를 포류하듯이 떠 있을 뿐......
귀향길에 오른 함대는 순풍에 돛을 올리고 어느듯 미조항을 돌아 평산포를 지나고 있었다. 멀리 어둠 너머로 어렴풋한 불빛들이 보였고 그곳이 바로 여수항이었다. 다시 찿은 하늘과 바다, 그리고 낯익은 섬들이 어둠 속에서도 군사들의 귀향을 반갑게 맞아주고 있었다. 이들에게 지난 며칠 동안은 수년의 세월보다도 길게 느껴졌을 터이고 차마 목이 메어 부르지도 생각할 수도 없었던 그리운 얼굴들이 파도 소리와 함께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돌아오는 내내 침통했던 분위기는 군사들이 내지르는 함성에 밀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함대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쾌속선으로 전해지면서 여수항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달려 나온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들의 눈에 멀리 어둠을 뚫고 횃불을 밝힌 병선들이 북과 군악을 울리면서 항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몇 번을 확인해 보았지만 분명 좌수영 함대였다.
조선 육군들이 연전연패하였고 믿었던 임금마저 한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후였다. 그 마당에 적의 소굴로 스스로 찿아 들어간 함대가 무사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백성들에게 있어서 함대의 귀향은 가히 기적이라 할 만했다. 기적을 확인한 백성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오늘날에도 여수와 옛 5관 5진포 지방에 가면, 그날 귀향을 축하하는 오색 잔치가 해변가 백사장에서 열렸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환영차 준비한 잔칫상의 음식과 과일들도 오색이었고, 14살 어린 신랑의 무사 귀환을 맞는 새색시의 옷 색깔도 오색이었으며, 자랑스런 조선 수군의 군기를 높이 올린 황포 돛, 그리고 하늘, 바다, 땅 모두가 오색 빛깔이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여수시에서 매년 주최하고 있는 '진남제'는 기적같은 그날의 귀향과 이순신의 함대가 남해의 왜적들을 제압하고 국난을 막았음을 기리기 위해서 연례행사로 개최되고 있다.
무사히 귀향을 마친 이순신은 진을 파한 후 숙소로 돌아와 곧바로 목욕재개하고 선조에게 올릴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총 3,500여 자로 된 방대한 분량의 장계였다. 장계의 이름은 '옥포파왜병장('옥포에서 왜군을 격파한 보고서)이다. 이 장계는 5월 10일 이순신의 군관 송한련과 진무(진의 실무 책임자) 김대수가 배편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이 장계를 5월 23일경 피난길인 평양에서 겨우 받아보게 된다. 그리고는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한참을 통곡했다. 전란이 있은 후 처음 받아보는 승첩의 장계였기 때문이다.
옥포해전에서의 승리에 고무된 조선 조정은 애초에 선조의 고집으로 만주로 파천하기로 했던 계획을 접고 류성룡의 간청으로 결국 의주에 머물 생각을 하게 된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628 : 조선의 역사 170 (선조실록 35) (0) | 2012.06.26 |
---|---|
우면산의 여름 5 : 민족의 불행 한국전쟁, 호국보훈을 생각하며...1 (0) | 2012.06.25 |
한국의 역사 626 : 조선의 역사 168 (선조실록 33) (0) | 2012.06.24 |
한국의 역사 625 : 조선의 역사 167 (선조실록 32) (0) | 2012.06.23 |
한국의 역사 624 : 조선의 역사 166 (선조실록 31) (0) | 2012.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