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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25 : 조선의 역사 167 (선조실록 32) 본문
한국의 역사 625 : 조선의 역사 167 (선조실록 32)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옥포대첩의 의의
옥포대첩은 임진왜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해전과 육전을 통해서 조선군이 거둔 첯 승전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 해전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던 조선의 운명이 실날같은 희망의 불씨를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울러 구국의 신념으로 사생결단의 출동을 감행한 함대로서도 새로운 전기를 맞는 계기가 되었다.
승전은 공을 세웠다는 것 뿐만 아니라 군사들에게 사기와 자신감, 그리고 용기를 부여하게 된다. 거기에다 준비해온 무기와 갈고 닦은 해전술로 적을 초전부터 완벽하게 제압한 전투였기 때문에 조선 함대 수병들은 겁쟁이에서 용사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왜군들로서는 처음 당한 패배였는데, 이 패배가 알게 모르게 자신들을 용사에서 겁쟁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당시 왜군 군대의 편성은 각 영지별로 병선을 만들고 병사들을 수송하여 바다를 건너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배를 잃게 되면 다시 그 영지에서 배를 건조해야 한다고 했다. 때문에 한 번 소멸된 함대가 재건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 이상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
북상하고 있던 왜군부대들에게는 증원과 보급이 시급한 상황이었는데, 재건에 1년 이상이나 소요되는 기동함대 하나가 이렇게 사라져버렸으므로 임진왜란 때 왜군 측의 파탄은 사실상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치고 빠지기', 그 속에 담긴 부하사랑
옥포해전 후, 전리품 노획작업을 끝낸 조선 함대는 다시 돛을 올렸다. 그리고 바로 옥포만을 빠져 나와 오후 4시경 거제도 북단에 있는 영등포까지 이동해서 숙영할 준비를 했다.
"산으로 올라간 적도들은 숲 속으로 기어들어가 기가 꺽이지 않은 눔이 없으므로, 신은 여러 배에서 용맹한 사부(궁수)들을 뽑아서 산에 오른 적들을 쫓아가 잡도록 하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거제도는 섬 전체가 선세가 험하고 수목이 울창하여 발붙이기가 어려울 뿐더러, 당시 우리는 적의 소굴 안에 있는데다 배에 사부조차 없으면 혹시 뒤로 포위당할 염려도 있고 날도 저물어 가므로 뜻대로 하지 못하고 영등포 앞바다로 물러나와 머물면서 군사들을 시켜 나무도 하고 물도 길어 오게하여 밤을 지내려고 했습니다."(옥포파왜병장 1592.5.10)
옥포 앞바다에서 정오였다고 했고, 옥포해전을 치른 후에 영등포까지 왔을 때가 오후 4시경이었다면, 옥포해전은 초탄 발사에서부터 물러나올 때까지 약 1시간 미만에 끝낸 전투였다. 쌍방 간에 그렇게 큰 규모의 함대가 백병전이나 조총과 화살 등의 무기로 사격전을 벌였다면 하루나 이틀은 결렸을 법한 전투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그 큰 해전을 단 1시간 만에 끝냈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이러한 이순신의 속공전은 20세기 해전사에서도 그 유래를 찿아보기 쉽지 않다. 학익진을 통한 일시집중타가 이순신 식 속공전을 가능케 했던 것인데, 많은 전사 연구가들은 당시 세계 최고의 함대로 일컬어지는 스페인 무적함대 역시 이순신 함대의 적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이순신의 해전에서 또 하나의 특징은 휘하 장병들의 생명을 소중히 했다는 것이다. 옥포만을 떠나오기 전, 패주하는 적을 뒤쫓지 않았던 것도 군사들의 희생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유교의 성리학에서 나온 사상인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평생의 철학으로 삼아온 무장이엇다. 그는 매사를 격물치지적으로 이치를 끝까지 따지고 신중하게 판단하고 처리했다. 나라의 운명과 장병들의 생사가 걸린 전투를 치를 때는 더더욱 그랬다.
이순신의 장계에는 거제도는 산세가 험하고 수목이 무성하다고 했다. 당시 거제도에는 원시림이 울창하였을 것이다. 또한 거제도는 큰 섬이다. 사수들을 추격대로 육지로 보내 뒤쫓는다 해도 거제도는 10만의 병사로도 완전히 소탕하려면 최소한 몇 달 이상은 걸림직한 큰 섬이었다. 게다가 조선 함대로서는 주변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적의 점령지 해역 깊숙히 들어와 있었다. 인근에 큰 적이 있었다면 포성과 하늘 높이 치솟은 연기를 보고 덮쳐올 가능성도 있었고, 왜군들이 비록 겁을 먹고 도망치는 입장이었다고 해도 그들과의 창칼 싸움은 절대 피해야 했다. 또 멀리 분탕질을 나갔던 왜군들이 여기저기서 복귀해 오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황을 종합해보면, 어떤 경우에든 조선 함대가 옥포만에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잔략상으로 보아도 적을 좀더 죽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적의 기동함대를 하나라도 더 찿아내어 각개격파해서 왜군을의 발을 묶는 것이 중요했고 그것이 1차 출동의 목적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순신은 일차적인 목표는 달성되었다고 판단하고 병사들의 희생을 감수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옥포에서 함대를 급히 되돌려 나왔다. 한마디로 '치고 빠지기" 전술이었다.
옥포해전 후 올린 장게를 보면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부상자만 한 명 있었는데 그것도 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화살에 왼팔을 조금 다쳤을 뿐이었다. 이것을 보면 왜군이 육지로 쫓겨간 후에도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왜선에 올라 전리품을 노획케 하고 죽은 자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왜군 기동함대 하나를 격멸하는 해전을 치르고도 단 한 명의 부상자만 있었다는 것은 사실 승리 이상의 성과였으며, '환상의 해전'이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 옥포에서 적을 쳐부순 장계)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은 이순신이 옥포해전을 치루고 난 다음 조정에 전과를 보고한 장계이다.
이순신 휘하의 10개 수군 기지와 여수 본영의 단위 함대들이 학익진으로 정면의 적을 공격하고 노확단계에서는 왜선에 뛰어올라 포로가 된 조선의 백성들을 구출해 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이렇게 꼼꼼하게 기록해서 각 고을별 공로를 조정에 보고했다. 해당 고을 장수들의 이름으로 보고되는 것은 그 고을 출신 장병과 그 고을을 후원하는 후방 고을들의 공로가 된다. 이순신은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고 이는 사기를 진작시켜 다음의 출동준비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는 효과도 가져왔는데, 이 같은 세심한 배려가 이순신의 부대 운영과 장병들의 사기 진작의 한 단면이기도 했다.
장계를 토대로 전라좌수영 각 수군 기지들의 공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낙안고을 대선 1척, 머리 한 개와 전리품, 보성고을 대선 1척, 백성 1명 구출, 흥양고을 대선 2척, 광양고을 중선 2척, 소선 2척, 방답포구 대선 1척, 사도포구 대선 1척, 발포포구 대선 2척, 논도포구 중선 2척, 여도포구 중선 2척, 순천고을 대선 1척, 소녀 1명 구출.
전라좌수영 소속 장병들은 모두 16척의 왜선을 깨부수었다. 본영 소속의 장수들인 이춘, 최대성, 배응록. 이언량, 변존서 등이 깨친 왜선은 모두 5척이었다. 이렇게 따져보면 전라좌수영 관내의 기지들과 여수 본영 함대들 중에서 공을 세우지 않은 곳은 없었고, 원균의 경상우수영 측도 5척을 깨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모두 26척이다. 전라좌수영 함대의 판옥선은 24척, 경상우수영 함대의 판옥선 4척으로 약 6 ;1의 비율이다. 하지만 원균 쪽은 화약무기를 준비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전력상으로는 6 :1이 아니었다.
5월 6일, 당포에서 양측 함대가 만났을 때 이순신과 원균은 수하 장수들과 같이 작전회의 및 지시사항을 하달했고, 원균 함대에 보통의 화살에 메달아 쏘는 소발화탄과 가벼운 현자, 황자포를 빌려주고 포수들까지 배속시켜 싸웠을 가능성이 높다. 장계에서 왜선 30여 척이라고 한 것을 보면 달아난 6척을 제외한 모든 왜선들이 격파되거나 불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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