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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22 : 조선의 역사 164 (선조실록 2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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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22 : 조선의 역사 164 (선조실록 29)

두바퀴인생 2012. 6. 20. 03:31

 

 

 

 

한국의 역사 622 : 조선의 역사 164 (선조실록 29)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이순신의 제1차 출동

 

5월 2일, 경상우도 남해에서 보냈던 이순신은 군관 송한련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남해현의 창고와 무기고가 텅 비어 있다고 보고했다. 일본군의 함대가 500여 척이나 되는 데 전라좌수사 함대는 백여 척도 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 실제 전투가 가능한 판옥선은 20여 척밖에 되지 않았다.  전라 우수영 이억기 함대와 연합하려 했으나 조정의 출동 지시는 내려진 상태였으며 이억기 함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연락도 없고 도착이 지연되고 있었다.

 

녹도 만호 정운은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저 도성 가까이 다가가니 통분함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더 늦추다가는 만약 기회를 놓친다면 뒷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이순신은 더이상 출동을 늦출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결국 전라좌수영 단독으로 출동을 결심하게 된다. 적정과 상황이 불투명한 가운데 전라좌수영 단독 출동은 어쩌면 대규모 적을 만나면 중과부족으로 패배하는 날에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고 생각하니 국가의 존망이 바로 자신에게 달렸다고 판단했다. 이 첯 전투에서 적을 괴멸시키지 못한다면 그 후유증은 전쟁 전체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순신은 밤을 지새며 깊은 시름에 빠졌다.원균의 경상우수영 함대는 지금까지 상황으로 보아 스스로 거의 괴멸된거나 마찬가지다. 전라우수영 이억기 함대는 소식이 오리무중이다. 조정의 출동지시는 이미 하달된 상태에 지체된 시간이 벌써 20여 일이 지났다. 어쩌면 호기를 놓치고 자신은 물론 나라의 운명까지도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빠질 수도 있다. '오 신이여! 저에게 힘을 주시고 전라좌수영 함대에게 승리를 안겨주시옵소서!'  이순신은 마음 속으로 간절히 간절히 빌었다. 달빛은 5월의 남해 바닷물에 반사되어 찬연히 반짝이고 있었다. 

 

5월 3일 중위장 이순신을 불러 내일 새벽에 출동하도록 지시했다. 또 군율을 엄격히 세워 탈영하려던 수군 황옥천이란 자를 잡아 효수했다.

 

5월 4일 모든 사람들이 잠든 새벽 2시, 함대는 여수를 출발하였다. 이때 이순신이 거느린 함대는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이 46척, 도합 85척이었다. 하지만 협선이아 포작선은 전함이라고 하기에는 장비가 빈약한 배였으므로 군함다운 군함은 판옥선 24척밖에는 없었다고 보아야 했다. 그때 거북선이 출동한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한 척이었는지 두 척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협선은 소형 전선으로서 적정을 살피거나 적선을 추격하여 나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쾌속선이다. 포작선도 어선을 동원하여 수송 및 연락, 또는 적군을 사로잡은 임무를 수행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소형 협선과 포작선을 다양하게 운용하여 적정을 세밀히 관측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이순신은 자신의 관내는 손바닥 보듯이 훤했지만 경상도 바다는 사정이 어두웠다. 그래서 경상도 쪽 바다를 잘아는 광양 현감 어영담을 향도로 삼았다. 

 

당시 이순신 함대를 이룬 장령들의 보직은 다음과 같다.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전부장 흥양현감 배홍립,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 유군장 발포가장 나대용,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 후부장 녹도만호 정운, 좌측후장 여도권관 김인영, 우척후장 사도첨차 김완, 한후장 군관 최대성, 참퇴장 군관 배응록, 돌격장 군관 이언량 등이었다.

 

그러나 선봉장은 경상도 장령 가운데 선발하기로 원균과 약속하였으므로 정하지 않았고, 또 순천부사 권준은 그때 관찰사의 전령으로 전주로 가서 없었다.

 

한편 후방을 지킬 장령으로는 이몽구를 유진장(잔류부대장)으로 삼아 여수 본영을 맡도록 하고, 방답, 사도, 여도, 녹도 등 책임자가 출전한 진포에는 이순신의 군관 가운데 담력과 지략이 있는 자를 가장(임시 장수)으로 정하여 파견했다.

 

이순신의 전략 전술은 작전해역의 사정과 적정을 정확하게 파악한 다음 적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유인하여 기습적이고 철저한 공격으로 섬멸하는 데 있었다. 그는 "공을 세우려고 왜적의 머리를 베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한 대의 화살이라도 더 날려 한 눔의 왜병이라도 더 죽이라!"고 지시했으며, 상대적으로 견고한 우리 전함으로 돌격하여 적선을 파괴하는 '충돌전법'을 썼다. 

 

 

 

 

 

 

 

옥포해전에서 빛나는 첯 승리

 

그날 5월 4일, 이순신은 중부장 어영담을 물길의 안내자 겸 선봉장을 삼고, 좌.우 척후장 김인영과 김완이 거느린 척후선을 좌.우로 멀리 내보내 적군의 동태를 정밀하게 수색 정찰토록 했다.

 

함대가 남해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은 초요기를 올려 전 함대를 집결시켰다. 이순신은 우측후장 김인영, 우부장 김득광, 우부장 어영담, 후부장 정운 등은 오른쪽 개이도를 경유하여 수색토록 하고, 나머지 대장선은 모두 평산포, 곡포, 미조항을 수색토록 명령했다. 이렇게 2개 전대로 나누어 수색 정찰을 하면서 항진을 계속했지만 날이 저물 때까지 적선을 한 척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날은 사천 남쪽 소비포(현 고성군 하일면 동화리) 앞 바다에서 진을 치고 밤을 세웠다.

 

이튼날 5월 5일 새벽, 함대를 지휘하여 경상우수영과 합류하기로 약속한 당포로 급히 노를 재촉하였으나 경상우수영 함대는 그림자도 찿을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소선을 원균에게 보내 약속한 장소인 당포로 빨리 나오라고 전했다. 그리고 이순신은 원균의 함대를 기다리면서 다시 당포 앞바다에서 밤을 보냈다. 이순신은 밤을 보내고 다음날 6일 아침 10시쯤이 되자 원균이 우수영 경내 한산섬에서 한 척의 판옥선을 타고 나타났다.

 

이순신은 원균으로부터 일본 수군의 규모와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 등을 듣고 앞으로의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또한 원균이 찿아온 때를 전후하여 남해 현령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룡, 소비포 권관 영남, 영등포 만호 우치적, 옥포 만호 이운룡 등 경상우도 소속 여러 장수가 판옥선 3척과 협선 2척에 나누어 타고 도착했다. 이로써 아군의 전체 전력은 포작선을 제외하고 판옥선 28척, 협선 17척 등 45척으로 늘어났다. 양도의 장수들은 작전회의를 거듭하면서 5월 6일 밤은 송미포 앞바다에서 보냈다.

 

이튼날 5월 7일 새벽에 다시 출발하여 적선이 숨어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천성, 가덕도 쪽으로 향하다가 정오쯤 거제도 남쪽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저 멀리서 우척후장인 사도첨사 김완이 신기전을 쏘아 올려 적선 발견 보고를 했다. 이로써 이순신 함대는 전라좌수영을 떠난 지 4일 만에 첯 접전이 시작되었다. 그때 발견한 옥포 앞바다의 적선의 규모는 30여 척이었고, 일본군 병사들은 육지에 올라 약탈에 여념이 없었다.

 

이순신은 지체없이 공격병령을 내렸다. 그는 첯 전투의 승패가 군사들에게 미치는 영향의 그 중요성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첯 전투에서 패전하면 군사들의 심리란 계속 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출동에 앞서서 이렇게 명령했다.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산처럼 무겁고 조용하게 행동하라"  

 

이순신의 지휘 아래 조선의 함대는 바람에 독전기를 휘날리며 질서정연하게 진을 지어 옥포를 향해 일제히 들어갔다. 옥포에는 '도도 나카토라'가 거느린 함선 30여 척이 선창에 흩어져 정박하고 있었다. 적들이 노략질하면서 지른 불로 연기가 온통 하늘을 뒤덮어 주위의 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난데없는 대규모 조선 수군의 출현으로 적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뭍에 올라 약탈에 여념이 없던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보자 그들은 분주히 함선에 올라 자기들끼리 용기를 북돋우는 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급하게 노를 저었다. 해안선을 따라 도망치던 적함대는 조선 함대의 위용에 감히 맞서지 못하면서 해안을 따라 함선을 몰고 있었다. 조선 함대가 계속 다가가자 도망치던 일본 함대는 그중 여섯 척을 선봉으로 삼아 바다 가운데로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 함대는 동서로 포위하면서 사정 거리 안에 일본 함대가 들어오자 일제히 각종 포와 불화살을 퍼부었다. 일본 함대도 조총과 화살을 퍼부면서 덤벼들었다. 조선 수군은 이들을 포위하고 총통과 불화살를 마구 쏘자 적병들도 조총을 난사하며 맞섰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 수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옥포의 푸른 바다를 사이에 두고 쌍방의 화력이 불꼬리를 내면서 날아다녔다. 하지만 조총이 주력인 일본 함대는 대포로 무장한 조선 함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꼬리를 물고 날아오르는 포환으로 바다가 불바다로 변하자 일본 수군은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일제히 선체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포에 맞아 침몰하는 적함의 거친 몸짓은 그보다 더 거친 파도를 만들었고 바다에 뛰어든 일본 수군은 그 파도 속에서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가까스로 해변에 상륙한 적군은 여전히 뒤를 가격하는 조선 함대의 포를 피해 산으로 도망쳤다. 공포에 질린 일본 수군은 서로가 대열에서 뒤쳐지는 것이 두려워하며 산으로 기어 올라 갔다.

 

 

 

이순신 함대가 21척, 원균의 함대가 5척의 일본 함선를 포로 쏘아 깨부수고 불살라버려 그 장엄함이 극치를 이루었다. 옥포의 넓은 바다는 불꽃과 자욱한 연기로 하늘을 덮었으며 산으로 올라간 일본 수군은 숨어서 그 광경을 목도하고 겁에 질려 꼼짝 못한채 땅에 엎드려 있었다. 옥포의 푸른 바닷물은 적의 붉은 피로 물들었고, 조선 화포의 열기로 옥포를 스쳐가는 바람도 뜨거웠다.

 

이순신은 각 함선에 용감무쌍한 활꾼을 차출하여 산으로 올려보내 숲 속에 은신한 일본 수군 잔당을 완전하게 궤멸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보니 산세가 험하고 숲이 울창하여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일본군보다 그들을 추격할 조선 군사가 더 위험할 것 같았다. 또 추격병을 보낸 사이에 다른 적병들이 들이닥쳐 뒤를 포위하면 속수무책이 될 공산도 컸다. 이순신은 마지막 한 명의 적까지 섬멸하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쉽게 그곳을 떠나도록 지시했다. 이순신의 지시에 따라 조선 함대는 거제도 북쪽 끝에 있는 영등포 앞바다에 이러렀다. 그곳에 함대를 정박시킨 후 보급품을 보충면서 밤을 보낼 준비를 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5월 7일벌어진 이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일본 수군 대선 13척, 중선 6척, 소선 2척 등 26척을 격침시키며 첯 싸움에서 빛나는 승리를 장식했으니 이 싸움이 바로 '옥포해전'이다.

 

 

 

 

                              

 

 

 

 

합포해전과 적진포해전 

 

옥포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일본 함선 26척을 격파하면서 조선의 합동 함대는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조선 수군은 적의 습격을 피해 경상도 영등포에서 전 함대가 정박하여 밤을 새면서 전투의 피로를 풀려고 했으나 그 바다의 깊은 물빛에 여유로운 눈긿을 줄 수가 없었다. 그날 오후 4시경 이순신에게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

 

"장군, 멀지 않은 바다에 적함 다섯 척이 지나갑니다."

 

이순신은 쉬고 있던 전 함대에 명령을 내려 추격전을 전개했다. 푸른 바다 위에서 펼쳐진 추격전은 경상도 웅천 합포 앞바다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함대의 끈질긴 추격을 견디지 못한 일본 수군은 함선을 포기하고 합포에서 내려 뭍으로 도망쳤다. 조선 수군은 합포에 버려진 일본 함선 다섯 척에 대하여 불화살을 쏘았다. 적선에 꽃힌 불화살은 치솟는 불기둥으로 변하여 합포의 포구에 일렁이던 파도도 그 열기에 휩싸였다. 그동안 육전에서 일방적으로 당한 조선군이었으나 해전에서는 거꾸로 일본군을 일방적으로 물아붙일 것을 예고하는 화려한 불기둥이었다.

 

그 불기둥을 뒤로한 채 날은 이미 어두어져 있었다. 일본의 대선 네 척과 소선 한 척을 수장한 합포해전이었다. 조선 함대는 노를 재촉하여 경상도 창원의 남포 앞바다에 이르러 그곳에 정박하고  다음 날 전투를 기대하며 밤을 지냈다.

 

다음 날 5월 8일 찬란한 아침 해가 밝았다. 척후로부터 일본 함대가 진해의 고리량에 정박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지체 없이 전 함대의 출동을 명했다. 조선 함대는 주변의 섬들을 수색하면서 저도를 지나 고성 적진포에 이르렀다. 적진포에는 대선과 중선을 합해 13척의 일본 한대가 포구에 가지런히 정박하고 있었다.

 

아무런 경계도 없이 포구 안 민간인들의 집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있던 일본군은 천둥 치듯이 들이닥친 조선 함대의 위세에 겁을 먹고 황급히 근처 산으로 도망쳤다. 이제 남은 것은 텅 빈 일본 함선을 파도처럼 바람처럼 격멸하는 것 뿐이었다. 조선 수군은 그곳에 있던 적함을 전부 포로 쏘아 부수고 불살랐다. 적진포 해전의 승리가 끝났을 때 전라도사 최철견으로부터 이순신에게 비보가 전해졌다. 선조가 일본군을 피해 평안도로 피란을 갔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이순신이 출정한 5월 4일 이미 서울이 함락되어 선조가 북으로 피신하고 있었는데, 5월 8일 적진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때에야 소식이 도달한 것이었다.

 

조선의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분통해 통곡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수군은 승리의 기쁨과 동시에 슬픔에 북받쳐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왕의 피신은 그 무게로 볼 때 나라의 장래를 예측하기 힘든 상태로 들어간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며 전라좌수영의 미래도 장담할 수가 없게 되었다. 멀리 떨어진 나라의 치욕은 적진포의 푸른 바닷물로도 씻을 수가 없었다.

 

군사들의 사기도 떨어졌고 불안감에 따른 동요도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더 이상 전투는 어렵다고 생각한 이순신 함대는 선체를 돌렸다. 다음 날 5월 9일 낮 12시, 이순신 함대는 전라좌수영으로 귀환을 서둘렀다. 세 번 싸워 세 번 완벽한 승리를 하면서 무수한 적함과 적군을 조선 바다에 수장시킨 승리의 출동이었다. 승리의 열기에 들떠 있는 부하들에게 이순신은 단호하게 이렇게 지시했다.

 

"전선을 더욱 정비하고 바닷가에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라!"

 

이순신 함대는 뱃머리를 돌려 이튼날 5월 9일 오후 전라좌수영으로 일단 귀환하였다.

 

이렇게 이순신 함대는 제1차 출전에서 3전 3승을 거두면서 적선 총 42척을 침몰시키고 무수한 적군을 수장시켰다. 그런데 아군의 손실은 부상 1명 뿐이엇다. 이 옥포, 합포, 적진포해전을 모두 합쳐 '옥포대첩'이라고도 부른다.

 

이순신은 제1차 출동에서 그의 탁월한 리더쉽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셈이다. 이순신은 옥포대첩의 공로로 가선대부 종2품으로 승진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승첩을 보고하는 장계에서 부하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여 그들에게 승전의 공로를 돌렸다.

 

이순신의 승리에는 탁월한 그의 지휘와 리더쉽에 더하여 적의 위치와 규모에 대하여 적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적을 괴멸시켰다는 점이다. 이에 더하여 조선 수군의 판옥선과 포가 큰 기여를 했다.

 

조선 수군의 힘은 기본적으로 판옥선이라는 함선의 우수성에서 나왔고 판옥선의 우수성은 포에서 출발했다. 해전에서 이처럼 각종 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일본군을 괴멸시킬 수 있었으나 육전에서 조선군은 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데 소홀하였다. 지형을 이용한 천연 장애물과 성벽을 이용한 화포의 운용은 조총보다 사거리가 뛰어난 포를 이용하여 적을 격멸할 수 있었으나 조선군은 천혜의 요새 조령을 포기하고 허허벌판 탄금대에서 기마전을 전개한 신립같은 경우에는 적을 너무 우습게 보았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의 최고의 장수 신립은 북방에서 여진족을 섬멸하는 가운데 기마전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던 사람으로 일본군의 조총 위력과 대기마전 장애물을 전혀 두려워 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순신 함대의 포는 천자문의 글자를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인데, 구경이 큰 것부터 천자포, 지자포, 현자포, 황자포, 승자포 등이 장치되어 있었다. 천자포는 사거리가 500미터 정도이여 지자포는 350미터, 현자포, 황자포는 300미터가 넘었다. 또 승자포는 200미터가 넘었다. 접전시 원거리부터 먼저 천자포로 적함을 포격하였고 사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지자포, 현자포, 황자포, 승자포 등을 연달아 포격함으로써 적함을 괴멸시킬 수가 있었고 근접전에서는 불화살과 근접전으로 싸웠다. 이에 비해 일본군의 조총 사거리가 50~100미터 정도임을 감안할 때 적병의 조총이 무영지물이 되었다. 일본군은 전선을 적에게 가까이 붙여 조총과 불화살을 쏘다가 적함에 올라가서 백병전을 벌이는 게 통상적인 전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