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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20 : 조선의 역사 162 (선조실록 27)

두바퀴인생 2012. 6. 18. 02:37

 

 

 

한국의 역사 620 : 조선의 역사 162 (선조실록 27)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이순신의 초기 대응

 

1592년 4월 13일 해질 녘에 일본 함대가 부산 앞바다에 출현했고 다음 날인 4월 14일 아침에 대대적인 부산상륙작전이 벌어졌다. 전라좌수영이 설치된 여수에 있던 이순신이 그 사실을 전해들은 것은 4월 15일이었다. 그 날의 난중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의 통첩에, 왜선 90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고 하고, 같은 시각에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왔는데 왜선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했다."

 

이순신은 1592년 5월 4일 비로소 출동하게 된다. 일본군 침공 사실을 접하고 20여 일 만에 출동한 셈이다. 전쟁 초기 20여 일이라는 기간은 어쩌면 결정적인 국면이 될 수도 있다. 이순신이 출동하기 이틀 전인 5월 2일 서울 한양이 점령되고 선조는 이미 북으로 몽진을 떠나 비참한 피난 행렬을 이루며 임진강을 건너 북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그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궁금한 그 기간 동안의 행적을 난중일기를 통해 살펴보자.

 

4월 15일에 이어 다음 날인 4월 16일에 다시 급보가 이순신에게 전해졌다. 부산진성의 함락 소식이었다.  이순신은 그 날의 난중일기에 "밤 10시경 경상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했다. 분하고 비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라며 원통한 심정을 표했다.

 

다음 날인 4월 17일 그는 휘하 병사들에게 비상경계령을 내려 교대 시간과 관계없이 모두 소집했다. 그는 난중일기에 '경상우병사 김성일이 공문을 보냈는데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키고 계속 머물면서 물러가지 않는다고 했다.... 계속해서 번을 서는 수군과 교대로 번을 서는 수군이 연달아 방비처로 왔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4월 18일 동래성이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오후 2시경 경상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역시 함락되었다고 했다.... 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린 병방이 석보창에 머물러 있으면서 군사를 거느리고 오지 않아 잡아 가두었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병방은 지방에서 군사 관련 사무를 맡아 보던 관리를 말하며 석보창은 지금의 여천시 봉계동 석창을 일컫는다.

 

부산이 함락되는 국가적 위기에 처하자 이순신의 행보도 빨라졌다. 4월 19일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동문 위로 나가 직접 방어선 구축 작업을 독려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다음 날인 4월 20일에는 "성 위에 군사를 줄지어 서도록 하여 과녁판에 앉아서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4월 22일에는 "새벽에 정세도 살피고 부정을 적발하는 일로 군관을 보냈다."고 적었다. 

 

결국 이때까지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따르면 일본의 침공 사실을 접하고도 즉각 부산으로 출동할 준비는 하지 않았다. 그의 활동은 전라좌수영 방어선 구축 등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적어도 4월 22일까지의 기록에는 침략군에 대한 전투 태세가 완비되었다거나 출병한다는 기록은 없다. 설상가상으로 난중일기에는 4월 23일부터 4월 30일까지 기록이 몽땅 빠져 있어 의구심이 든다.

 

다행히 45월 27일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가 있다. 이 보고서는 4월 20일부터 이순신에게 접수된 공문 세 개와 그 각각에 대한 이순신의 처리 내용이 적혀 있다. 우선 4월 20일 이순신에게 도착한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공문을 살펴보자. 관찰사는 각 도에 한 명씩 있는 지방 장관을 말한다.

 

'본 도에 우수사 원균에게 "적선의 침범을 막기 위해 전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로 나가라"고 이미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경상도의 여러 진에는 배들이 전혀 없어 우도에 변고가 생길 것 같으면 즉시 도와야 한다는 사실을 보고하였으니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되 감사, 병사와 상의하여 시행하도록 해주기 바라오' 

 

이순신은 관찰사 김수의 공문에 대해 "신하된 자로서 누구나 마음과 힘을 다하여 나라의 수치를 씻기를 원하지 아니할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같이 출전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엎드려 기다리오며, 소속 수군과 각 관포에 '전선을 정비하여 나의 명령을 기다려라'하고 급히 공문을 돌리고 본 도의 감사나 병사와도 아울러 상의하였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지휘 계통이 달라 직접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조정에 전라좌수군의 구원을 요청하고 그 내용을 미리 이순신에게 알렸다. 이순신은 김수의 공문을 받고 '같이 출전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기다린다고 했다. 누구와 출전하라는 명령을 내렸을까? 아마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같이 출전하라는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박홍의 경상좌수영은 이미 초전에 겁을 먹고 스스로 궤멸되었고 원균의 경상우수영도 진중의 혼란이 가중되어 위태로운 가운데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적의 대함대와 맞서야 하는 이순신의 고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4월 26일 이순신에게 접수된 좌부승지 민준의 공문이 도착하였는데, 좌부승지는 임금의 비서로서 군대를 담당하는 직책이었으니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안보보좌관 쯤 되니 그 힘이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일 형세가 유리한데도 시행해야 할 것을 시행하지 않으면 기회를 크게 놓치게 된다. 조정은 멀리서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에 있는 주장(主將, 관찰사나 병마사)의 판단에 맡길 따름이다. 전라도에는 이미 이 뜻을 알렸으니 경상도에 공문을 보내 서로 의논하여 기회를 보아 조처하도록 하라."

 

좌부승지 민준의 공문에 대해 이순신은 "저는 일개 주장으로서 마음대로 처리하기 어려우므로 관찰사 이광, 방어사 곽영, 병마절도사 최원 등에게도 분부하신 사연을 낱낱이 아뢰었습니다...... 원균 등에게도 그 도의 물길 사정과 두 도의 수군이 모이기로 약속할 장소와 적선의 많고 적음과 ......여러 가지 기밀을 모두 화답해 줄 것을 통보하였고, 각 관포에 전쟁 기구와 비품을 다시 철저히 정비하여 명령을 기다리라고 공문을 돌려 엄히 지시하였습니다."라고 회답하였다.

 

민준은 조정이 멀리서 지휘할 수 없으니 일선 장군의 판단에 맡긴다고 했다. 이순신은 그 공문을 받고 취한 조처는 '일개 주장으로서 마음대로 처리하기 어려우니' 상관에게 보고하고 경상도 정세를 문의하며 자체 비상 경계령과 출동준비를 엄히 지시한 정도였다.

 

이때 이순신이 당장 출동하기를 주저한 것은 진관제에 따라 자신의 지역은 책임지고 지킨다는 당시의 군제에 따른 조처였다. 따라서 적정이 불확실하고 전라우수영의 수군이 아직 합류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관할 구역이 아닌 경상도 지역 바다로 출동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4월 27일 좌부승지 민준의 두 번째 공문이 이순신에게 연이어 도착하였다. 당시 한양에서 여수까지 대략 파발로 4일 정도 소요되었으니 그렇다면 4월 23일 발송한 공문이었는데, 그만큼 사태가 다급한 상황이었다.

 

" 이제 경상우수사 원균의 보고서를 본 즉, 각 관포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군사의 위세를 세우고 적을 엄습할 계획이라 하니, 이는 가장 좋은 기회이므로 불가불 원균의 뒤를 따라 나가야 할 것이다. 그대가 원균과 합세하여 적선을 쳐부순다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전관을 급히 보내어 이르니, 그대는 각 관포의 병선을 거느리고 급히 출전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좌부승지 민준의 출동 지시에 대해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출동 계획을 밝혔다.

 

"왜적을 꼭 이때에 제어해야 하겠거니와 다만 적의 배가 500여 척 이상이라 하므로 우리의 위세를 불가불 엄하게 갖추어 엄습할 보습을 보여서 적으로 하여금 겁내어 떨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출전할 기일이 급한데다가 수군의 여러 장수 가운데 보성과 녹도 등지는 3일이나 걸리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통고하여 소집한다 해도 쉽게 모이지 못해 반드시 기일을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밖의 여러 장수들만이라도 모두 이달 29일 본 영 앞바다에 모이게 하여 거듭 군령을 밝힌 뒤에 즉시 경상도로 출전할 계획입니다.

 

4월 28일 날이 저물어 자정이 되었을 때 원균의 긴급 원병 요청 공문이 이순신에게 도착하였다. 이 때 원균은 적의 함대 10여 척을 격파(?)하였으나 경상우수영이 함락되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이순신에게 긴급히 원병을 요청했다. 이순신은 4월 30일 오후 4시에 출동하기로 하고 경상우수영과 통합관리하던 경상우수영 소속인 네 개의 진에 군사와 함선 소집령을 4월 29일 새벽에 공문으로 발송했다.

 

그런데 4월 29일 오후 2시경 여수와 인접한 경상우수영 관할의 남해현이 혼란에 빠졌고 지휘관도 도망갔다는 긴급 보고가 이순신에게 들어왔다. 남해현은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와 가까운 거리에 있어 그곳에 적이 침입하였다면 전라좌수영도 위태롭게 된다. 이에 이순신은 그 보고가 사실이라면 창고와 무기고 등을 불태우라고 지시했다.(이 부분은 이미  불탔다는 이순신의 장계와 이순신이 태웠다는 선조신록과 서로 다른 내용이다).

 

결국 어찌되었던지 남해현은 불태워졌다. 일본군이 보이지 않았지만 남해현에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고 통제가 불가한 상태에서 불탔고 물자와 무기고가 비거나 방치된 상태였고 또 옮기지도 못한 상태에서 불태워진 것이다. 이것도 나중에 이순신 탄핵의 문제가 된다. 선조실록 1952년 6월 28일자 기록에 '남해의 성들이 비록 왜적의 난을 겪지는 않았지만 군량과 무기를 전라좌수사가 먼저 스스로 불태워버려 이미 빈 성이 되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은 경상 좌수영 박홍은 이미 적이 침공할 즈음 스스로 모든 병선을 침몰시키고 도망친 상태였고 원균 이하 경상우수영은 이러한 일본군의 침공 소식을 듣고 겁에 질려 각 진의 첨사, 현령, 수령, 장수 들이 도망을 치거나 피난을 가자 수군 장병들과 백성들도 같이 흩어지는 바람에 물자와 무기고가 같이 흩어지게 되었던바, 스스로 무너진 상태였다. 

 

또 남해 현령 기효근이 이 때 도망갔다고 전해졌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이순신이 제1차 출동을 떠나 원균과 연합 함대를 결성했는데 그 때 기효근도 합류하였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보고서에 "남해 현령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룡, 평산포 권관 김숙 등이 판옥선 한 척에 같이 타고...... 5일과 6일 사이에 속속 뒤따라왔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기효근이 도망갔더라면 그 죄 때문에 나타나지 못햇을 것이다. 따라서 남해의 사정은 이순신의 부하가 정확한 사정을 모른 상태에서 잘못된 보고를 올렸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순신은  29일에 경상도로 출전할 계획이었으나 출동하지 못했다. 군령을 하달했거나 함대를 편제하는 등의 사유 때문이었다고 짐작된다.

 

그래서 이순신은 4월 30일 오후 4시에 출동하기로 하고 인접한 경상도 네 개의 진에 그 사실을 공문으로 통보했다. 그러나 4월 30일에도 이순신은 출동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왜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전력을 최대한 집결할 필요성이 있어 전라우수영 함대를 기다리다가 같이 출동하기로 했던 것이나 우수영 함대가 나타나지를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 이순신이 출동을 지연시킨 것이 나중에 원균이 이순신을 공격할 때 가장 효과적인 빌미가 된다. 이순신은 "일이 매우 급하더라도 반드시 구원선이 다 도착하는 것을 기다려 약속한 연후에 배를 띄울 것'이라고 하여 조정에서도 이순신의 출동 예정일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게 되고 만다. 4월 30일 이순신의 보고서이다.

 

" 평산포 등 네 진영의 진장과 현령 등이 왜적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고 먼저 도피했으므로, 신의 군사로는 그 도의 물길이 험하고 평탄한 것도 알 수가 없고, 물길을 인도할 배도 없으며, 또 작전을 상의 할 장수도 없는데, 경솔하게 행동을 개시한다는 것은 뜻밖의 실패가 없지도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에게 소속된 전선을 모두 합쳐도 30척 미만으로서 세력이 미약하기 때문에 관찰사 이광도 이미 이 실정을 알 고 본 도 우수사에게 명령하여 '소속 수군을 거느리고 이순신 뒤를 따라서 힘을 모아 구원하도록 하라'고 했으므로 일이 매우 급하더라도 반드시 구원선이 나타나 다 도착하는 것을 기다려 약속한 연후에 배를 띄워 바로 경상도로 출전할 계확입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