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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19 : 조선의 역사 161 (선조실록 26) 본문
한국의 역사 619 : 조선의 역사 161 (선조실록 26)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역사를 보면 나라가 어려울 때는 꼭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던 인물이 나타나 영웅적인 자기희생으로 국난을 극복하는 초석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성웅 이순신 장군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비록 우유부단한 지도자와 조정은 왕권유지와 자신들의 권력투쟁과 당파싸움으로 권력유지에 급급하였고, 양반 사대부들은 처첩을 거느리고 호의호식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영화를 누렸지만, 불쌍한 백성들은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내우외환의 어려운 시기에 그의 처절한 애국정신은 남달리 빛났던 것이다. 이순신의 빛나는 승전은 그의 천부적인 전투감각에 있었다. 그는 지형지물과 해류, 수색정찰로 적의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하였고, 적장의 의도를 예견하는 능력, 적을 자신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유인하는 기술, 매복작전, 육군과 민간인을 이용한 합동작전 능력 등 뛰어난 해전 감각과 사전 충분한 연구와 장병들의 함선 조종 능력과 진법 훈련, 전투 기술 등 전쟁 준비였다.
그가 한국 역사에서 세종과 버금가는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선조라는 인재를 알아 볼 줄 모르는 지도자와 권력투쟁과 당파싸움, 그리고 일당독재로 비리와 부패에 빠진 조정, 허술하기 짝이 없던 조선 육군의 전술.전략과 전투기술, 그리고 무능한 장수와 지휘관들, 그리고 이순신과 너무나 대비되는 원균이라는 무능한 인물이 같은 시대에 공존하였기에 더욱 그의 전승에 대한 업적의 빛이 찬란하게 빛나는지도 모른다.
200년 동안 평화기를 누리면서 내부적으로 병들어 치유하기 힘든 조선은 결국 임진왜란을 당하게 된다. 일본군은 부산진성, 동래성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올라오자 조선군은 도망치기에 바빴고 일본군 소리만 들어도 무너졌다. 이일의 상주 패전, 신립의 탄금대 패전, 한강 방어선 붕괴, 한성 무혈점령, 임진강 방어전 붕괴, 개성-평양 방어 실패를 거치면서 선조는 북으로 북으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이순신이 첯 출전인 옥포대첩에서 일본군을 괴멸시키는 승전보가 전령이 가던 서해안에 일대에 전해졌다. 이 승전보는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전파되었으며 장계 보고를 받은 피난 조정에서는 선조를 포함한 온 조정이 놀라면서 승전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의심하였을 정도였다. 이에 힘을 얻은 의병들이 전국 각지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것은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의 반격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며, 만약 이순신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조선은 망국의 길을 갔을 지 모른다.
우리의 현실은 지금 풍전등화같은 위기를 겪고 있다. 정치는 삼류요 경제는 거품같고 사회는 썩고 병든지 오래요 정신은 물질만능에 빠져 의리와 명분, 양심과 도덕은 사라졌고 이념에 물든 친북.종북 세력이 국론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출세와 진급을 바라느 정치군인이 득실대고 비리와 부패가 끓일날이 없는 군은 천시의 대상이요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안보와 국방은 내부적인 문제와 주변 강대국의 힘에 눌려 사면초가다.
사회 정의와 도덕은 무너졌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비리와 부패가 판을 치고 있다. 공정이 사라졌고 불법이 난무하고 있다. 이념이투쟁에서 보수가 무너져가고 친북, 종북 등 좌익 세력이 당당하게 정치권에 입성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부와 기업은 대중을 기만하고 소비자를 우롱하고 있으며 주머니를 털어가도 아무런 하소연 못하는 봉으로 생각하고 있다. 법조계는 권력과 대기업의 재물에 편승하여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회가 된지 오래다. 초고령, 저출산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노인정책이 미래가 없고 자녀 키우기가 전재산을 투자해야 할 정도로 서민들이 고통받고 있다. 취업과 결혼은 그림의 떡이요 불륜과 매춘, 이혼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말자. 이런 위기에서 나라를 구원하는 인물이 우리들 젊은이 중에서 반드시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 지금도 남은 알아주지도 않지만 사회 각 분야 자신의 영역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이순신같은 그러한 인물이나 그 이상의 유능하고 지헤로운 인물이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
지금부터는 이순신 장군의 초기 대응과 제1차 출동, 옥포해전 승리, 그리고 그 사이에 이순신의 상급자들과 조정의 동향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조선 조정과 변방의 한 장수 사이에 장수가 올린 장계와 조정의 명령, 전투 현장 동향 등 상호관계에서 당시의 긴박했던 순간에 이순신과 통치자인 선조와 조선 조정이 어떻게 대처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 자료는 한 네티즌이 성실하게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작성해 놓은 자료로 임진왜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실효성이 있는 자료이기에 참고로 추가하여 올리되 내용중 일부는 부분 가감하여 올린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출처를 방문하시기 바란다.
폭풍전야
경상도에서 날아온 급보
1592년 4월 12일(이하 음력). 이순신은 거북선을 진수시키고 대포를 쏘아보았다. 이는 그가 전라좌수사로 부임해온 지 1년 만에 거둔 성과 중 하나였다.
"12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 현자포를 쏘아보았다. 순찰사 군관 남공심이 떠났다. 정오에 동현으로 나가 활 10순을 쏘았다. 관청으로 올라가면서 노대석이 놓인 것을 보았다."(난중일기 1592.4.12)
4월 15일에는 거북선 관계 보고서를 전주에 있는 전라감영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날 오후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4월 13일 왜선 90여 척이 부산포에 와 닿았는데 해마다 오는 세견선과는 달리 보인다."는 내용의 공문을 받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렇게 생각한 이순신은 즉각 여수 본영과 관내 10곳 수군 기지(순천, 광양, 보성, 흥양. 낙안 등 다섯 고을 소속 기지와 방답, 사도, 여도, 녹도, 발포 등 다섯 개 포구 소속 기지)에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지별로 굳게 지키라."는 명령과 함께 비상동원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왜적들이 부산포를 공격한 다음에는 전라도 쪽으로 공격해 올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원균의 공문은 통보성 공문에 불과했는데, 즉 향후 적군의 진로에 대해 어디로 향할 것인지에 대한 언급도 없었고 경상도 쪽으로 출동해 달라는 내용은 더더욱 없었다. 당시에는 타도 간에 출동 여부는 조정에서 결정할 사안이므로 지방의 수사급 장수들 간에 구원을 요청하고 또 거기에 응할 수 있는 그런 군령체제가 아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순신이 조치할 것은 예하 기지에 비상체제를 강구하고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순신은 본영과 관내 10곳 수군 기지에 비상소집을 해서 각자 기지를 굳게 지키고 있다가 만약에 별도의 지시가 있으면 여수로 달려 오라는 명령이었다.
같은 날 원균으로부터 또 공문이 왔는데 "왜선단 150여 척이 또 부산에 와 닿았다."는 내용이었다. 이튼날인 4월 16일에는 원균 수사가 다시 400여 척의 왜선단이 부산에 와 닿았다."는 공문이었다. 이렇게 원균으로부터 보내온 공문은 모두 세 차례로 90여 척, 150여 척, 400여 척 등 왜선단의 규모를 알려준 것들이었다.
같은 날 진주에 있는 경상감사(관찰사) 김수로부터 "이달 13일 왜선 4백여 척이 부산포 건너편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적의 형세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극히 우려됩니다. 또 계속 전하겠으니 사변에 대비하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공문이 왔다. 김수 감사의 공문 역시 통보성 공문이며 그, 자신도 자체 방어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 조선은 상하좌우 간에 정보전달 체계는 잘 구비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말을 타고 달리면 서울에서 여수까지 대략 4~5일 정도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통보성 공문을 가진 파말마들이 조정과 각 도, 군대 진영, 그리고 말단 군현까지 신속하게 전달되고 있던 시대였다.
경상도 구원을 위한 출동 준비
4월 20일이 되자 경상감사로부터 또 공문이 왔는데 내용인즉, '전라 수군이 경상도로 구원 나오도록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그 내용을 전라감사와 이순신 수사에게 알리는 바이니 차질이 없도록 준비해 달라'는 당부였다.
이순신은 적이 이미 부산포, 동래, 양산을 함락하고 내지로 침입해 가고 있는 상황을 공문을 통해서 알고나서 놀라고 분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왜적의 침입도 분한 일이지만 조선의 거성들이 허망하게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점이 더욱 분통하고 놀라운 사실이었다.
예로부터 성이란 적이 몰려오면 즉시 나아가 물리쳐야 하고 큰 적이 몰려오면 죽기로 버팀으로써 후방에 제2, 제3의 방어진을 구축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제일의 임무였다. 그럼에도 최전선의 주성들이 그 같은 역활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이 전쟁은 시작부터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이순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공문을 받아본 이순신은 관내 수군 기지에 대하여 병력 소집, 진지 구축, 병선 수리 및 화약무기 탑재 와 점검 등 만반의 출전 태세를 서두르도록 독려했다. 또한 향후 경상도 쪽으로 구원나가라는 조정의 명령에 대비하여 관내 기지 함대들에게 함대를 이끌고 본영에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조정의 출동 명령서
경상감사의 4월 20일 자 공문에 이어 4월 26일과 27일 조정으로부터 출동명령서가 잇달아 내려왔다.
<원균과 합세하여 적을 물리치라고 명령하는 조정의 지시>
"왜적이 이미 부산, 동래를 함락시키고 또 밀양으로 쳐들어 왔다고 하는바, 이제 경상우수사 원균의 장계를 보니 여러 포구의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로 나가 형세를 과시하고 적을 덮쳐 격멸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하니 이는 하나의 좋은 기회이니 그 뒤를 잇달아 나아가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만약 네가 원균과 합세하여 적의 배를 쳐부수기만 한다면 적을 평정시키는 일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선전고나을 보내어 급히 이르도록 하는 것이니, 너는 각 포구의 전선들을 독촉하여 거느리고 급히 달려가서 기회를 잃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천리 밖에 떨어져 있는지라, 혹시 무슨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이 지시에 구애받지 말라"(1592년 4월 27일자 조정 명령서)
조정의 명령서에 왜군들이 '밀양으로 들어왔다.'고 했지만, 이 때는 이미 신립 장군이 탄금대 패전 하루 전이었다. 원균의 장계를 받은 조정은 경상도로 원균을 지원하려 나가라는 조정의 명령서 격이었다. 그러나 '천리 밖에 떨어져 있는 지라 혹시 무슨 뜻밖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이 지시에 구애받지 말라.'고 한 것은 현지의 장수들인 전라감사, 병사, 우수사, 그리고 토호세력(유림과 명문 가문 등, 고경명, 최경희 등도 이 같은 출신이다)들과 충분히 의논하여 추진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한마디로 현지의 급박한 상황을 조정에서 일일이 알 수 없으니 변방 장수들끼리 잘 협의 하여 조처하라는 재량권을 부여한 셈이다.
출동 쪽을 선택하다
조정으로부터 출동명령이 하달된 지 이틀 뒤인 4월 29일. 전라좌수영 수뇌부는 진해루(현재 진남관 앞 망해루 터에 있던 누각)조정에서 내려온 명령서를 두고 논의했다. 대다수 장수들은 '출동하자'는 쪽이었지만 '굳게 지키자'는 쪽도 적지는 않았다.
지키자는 쪽은 '기지를 비운 사이 적이 기습을 해온다면 전라도마저 적에게 내주게 될 것이며 그것은 함대 본연의 임무에 위배된다.'는 의견을 주장했고, 반면에 출동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 '적이 남해안 일대를 거점화하기 이전에 소탕해야만 전라도를 지킬 수 있다'고 맞섰다. 아침 일찍 시작된 회의는 정오가 될 무렵까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급박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유를 들어 장수들에게 설명하고 출동을 선택하게 된다.
첯째, 지키고만 있다가는 조만간 경상도 쪽에 주둔해 있는 왜의 해군이 한꺼반에 공격해 올 것이므로 절대 불리한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적은 20~30대 규모의 기동함대로 편성되어 있다. 따라서 왜적을 해상에서 각개로 격파하면서 선제공격을 감행한다면 해볼 만한 싸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왜군의 주력은 이미 문경세재(조령)을 넘어 한성을 향해 북상하고 잇다. 만약 당장이라도 한성이 함락되고 만다면 앉아서 이곳을 지키고 있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 이상 출전의 불가함을 말하지 말라.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이후부터 소속 부대의 군기를 엄히 세우라.
이렇게 결론을 낸 이순신은 이날 회의에서는 출동이 결정되었다. 중지가 결집되자 곧이어 출병에 따른 기지별 준비 상황과 해전을 위한 세부 작전계획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결정된 사항은 전라감사 이광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보내졌는데, 공문의 내용은 '북상 중인 적을 교란시키고 서해안 방어와 부산 근해의 적 해군을 소탕하기 위해 4월 30일, 이억기 함대가 오는대로 함께 출동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5월 2일. 맑다. 삼도순변사 이일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도착했다. 송한련이 남해에서 돌아와 하는 말이'남해 현령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룡,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김축 등이 왜적의 소식을 한번 듣고는 벌써 달아났고, 무기 등 온갖 물자도 모두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햇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12시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군수 신호 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아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잇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고 한들 그게 될 법한 일인가. 저녁에 바답의 첩입선 세척이 돌아와 앞바다에 정박했다. 비변사에서 세 어른의 명령이 내려왓다. 청평현령이 부임하였다는 공문을 와서 바쳤다. 이날 저녁의 군호는 용호라 하고, 복병은 산수라 하였다."(난중일기. 1592. 5.2)
모두 떠나버린 남해도 여러 고을
엣날에는 변변한 지도도 등대도 없었다. 특히 다도해에는 섬과 암초가 많고, 안개와 비, 그리고 강품이 부는 날이 많았다. 때문에 해역을 여러 개로 나누어 구역마다 세습으로 이어오는 수로 뱃사공 겸 안내인들을 두었다. 더구나 그때는 전시였으므로 야간 항해도 해야 했고, 또 애군 함대가 어디에 잠복해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출동일이 4월 29일, 경상우수영 관내인 남해도에 군관 송한련 등을 보내서 해로 안내를 요청하도록 했다. 그런데 송한련 일행이 돌아와 말하기를 '남해 일대 각 고을 이 텅텅 비었고 무기 등 물자들이 흩어져 버려 남은 것이라고는 없다'고 했다. 이순신을 비롯한 군사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왜군이 아직 부산 근방에 머물러 있을 터인데 어떻게 멀리 떨어진 남해도가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경상우수영은 낙동강 하구에서부터남해도에 이르기까지 3도 수군 관내 중 가장 넓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원균 함대에게 병선과 무기, 군량을 공급해야 할 후방 고을들의 형편이 이와 같다면 사실상 원균의 함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판단했다.
이순신은 이러한 함대와 합동작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할 것으로 판단했다. 경상우수영 함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해상 기지로서는 전라좌수영이 최전선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4월 30일까지 여수에서 합류하기로 한 전라우수영 이억기 함대는 5월 1일이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물라도 출동준비에 차질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와 당혹감이 전라좌수영 수뇌진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경상우수영 관내가 온통 비어 있고 전라우수영 함대도 당장 출동을 못할 형편이라면 전라좌수영 함대는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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