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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23 : 조선의 역사 165 (선조실록 30)

두바퀴인생 2012. 6. 21. 02:09

 

 

 

 

한국의 역사 623 : 조선의 역사 165 (선조실록 30)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이순신의 제1차 출동, 그 뒷 이야기

 

 

조선 함대의 막강한 전력

 

제1차 출동을 다녀온 이순신은 "삼가 적을 쳐서 무찌른 일을 아뢰옵니다."라고 시작하는 '옥포파왜병장'이라는 보고서를 조정에 올렸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 수군은 옥포해전에서 총 26척의 일본 함선을 격침시켰는데, 합포해전에서 일본의 대선 4척과 소선 1척을, 적진포해전에서 대선과 중선을 합하여 총 13척의 일본 함대를 격침시켰다. 그러면서 아군의 손실은 거의 없었다. '정병 이선지가 왼쪽 팔 한 곳에 화살을 맞아 조금 상한 것 외는 전상자가 없습니다."라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완벽한 승리의 원인으로 몇 가지를 들 수 있는 데 아래와 같다.

 

첯째가 기습전을 들 수 있다. 옥포해전과 적진포해전에서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출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아무런 경계도 취하지 않은 채 무방비 상태에서 거의 배를 비우고 뭍에 올라 민간 약탈에 전념하다가 당했다. 경상도를 방어하던 박홍의 경상죄수영 함대는 물론 원균의 경상우수영이 거의 괴멸 상태까지 간 상태였으므로 일본군은 해상으로 조선 수군이 공격해올 것은 상상도 못하고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조선 함대의 우수성을 들 수 있겠다. 첯 출동에서 보여준 판옥선은 일본 함선에 비해 속도인 기동력은 떨어지지만 좌우 화력을 제자리에서 사용이 가능한 회전력이 우수하고 그 화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자신들이 그토록 성능이 우수한 함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순신도 거듭 신중을 기하여 출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전에서 자신들이 가진 함선과 무기가 천하제일의 성능을 자랑할 수 있는 무기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아챘다. 조선 함선은 자체 방패를 설치하였음은 물론 조총을 무력화시킬 만큼 합판이 두껍고 튼튼하며 그 규모가 크고 견고했다. 그래서 튼튼하지 못한 일본 함선에 충격을 가하여 부수거나 또 홀수가 낮아 갑판이 높으므로 전투원의 위치가 일본배보다 높아 적군을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싸울 수 있었다. 그래서 반대로 일본군은 조선 배에 쉽게 오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선 함선에 장착된 각종 포의 위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이순신이 옥포에서 벌인 실전을 통해 조선 함선의 힘을 인식한 이상 조선 수군은 더 이상 수세에 몰린 처지가 아니었다.

 

셋째로 조선 수군의 상대적으로 우수한 화력을 들 수 있겠다. 이순신의 함대는 판옥선 24척, 협선 15척의 전력이었으며 그 뒤를 고기잡이 배 46척까지 받치고 있었다. 또 경상우수영의 원균 함대는 판옥선 4척과 소선 2척으로 합류했다. 이러한 조선 함선에는 천.자.지.황포와 장군전, 불화살을 이용하여 막강한 화력전을 전개했다. 천자총통은 사거리가 거의 500미터가 넘으며 나머지 화포도 사거리가 350~200미터 이상 사거리를 가진 화포들이었다. 일본 수군의 조총이 50~100미터 사거리를 가졌다는 사실과 비교했을 때 원거리에서부터 조선 함대는 화력전을 전개하면서 일본 함선을 무력화 시킬 수가 있었다. 

 

첯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마주한 적은 30여 척으로 나름대로 함선 수로 보면 팽팽했으나 그 균형은 합포해전과 적진포해전에서 깨졌다. 합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화력을 총동원하여 대선 4척, 소선 1척에 불과한 일본 수군을 추격전을 벌인 끝에 섬멸했다. 그리고 이어진 적진포해전에서도 적의 대선과 중선을 합하여 총 13척을 격파했다. 아군 함선의 손상은 전혀 없이 두 전투에서 일본 함선 총 18척을 괴멸시킨 것이다. 전투의 최선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고, 차선은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면서 이기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미약한 전력의 적을 격멸했지만 기습 및 화력전으로 펼친 적진포해전과 합포해전은 분명 성공한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 수군의 승리는 전쟁 발발 전부터 전쟁을 예감하고 미리 강병수군을 양성한 이순신의 주도면밀한 전쟁준비에 있었다. 수군과 함선의 철저한 훈련과 양성, 건조는 물론, 작전지역내 지형과 물길을 연구하고 다양한 해전에 대한 전략.전술을 궁리하였으며 각종 무기와 식량을 비축하였으며 관할 지역에 대한 민심 수습은 물론 정신과 육체가 오로지 부하들로부터 믿음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인격과 품성을 지닌 장수였기에 가능했다.

 

결과론 적으로 제1차 옥포대첩의 승리는 이순신의 조선 수군만의 승리가 아니었다.  옥포해전 승리 소식을 가진 전령이 조정으로 올라가는 해안가 길목마다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만세를 부르고 기뻐하였으며 의병들이 사방에서 결성되기 시작하였고 조선 조정은 물론 조선 육군과 민중들에게도 희망을 가져다 준 승리였다.

 

초전에 육군이 어이없는 연전연패로 말미암아 임금이 피난가는 등 극심한 패배감에 젖어 있던 조선 육군은 일본군 소리만 들어도 장수는 물론 병사들까지 도망치기에 바빴던 것이다. 이러한 패배감에 젖어 있던 조선은 해전의 승리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었고 조정이나 백성들이 항전의 결의를 불태웠다. 성공적인 제1차 출동이 가져다준 심리적 자신감은 점차 곽재우, 김면 등이 조직하는 의병 활동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이순신의 총동원령

 

이순신은 제1차 출동을 감행하면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에는 모두 소집령을 내렸다. 그것은 이순신의 보고서에서 옥포해전을 다룰 때 "사도진군관인 보인(保人) 이춘은 왜 중선 한 척을....당파했습니다."라고 기록한 것에서 단서를 찿을 수 있다. 여기서 "보인 이춘'은 현역 복무를 하는 정병을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자를 말한다. 이순신은 정병만이 아니라 보인(保人)까지 전투에 소집령을 내렸다. 이순신의 적진포해전에서도 "보인(保人) 김봉수 등이 힘을 합하여 왜 대선 한 척을 총통으로 쏘아 깨뜨리고 불살라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순신이 소집령을 내린 대상은 보인만이 아니었다. 합포해전에서 다룬 이순신의 보고서에는 "방답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전 첨사 이응화가 왜소선 한 척을...깨뜨려서 불살라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죄를 지어 귀양살이를 하는 자도 전투에 참가시킨 것이었다. 이를 볼 때 이순신은 지역내 동원 가용한 전 전투력을 동원하여 전투에 임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원균과의 불화

 

제1차 출동 이전에는 이순신의 보고서와 난중일기의 어디에도 원균과의 불화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순신의 원균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은 선조에게 올린 제1차 출동 보고서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신이 거느린 경쾌선으로 당포로 빨리 나오라고 공문을 보냈더니 6일 진시에 원균이 우수영 경내의 한산섬에서 단지 한 척의 판옥선을 타고 나타났습니다...... 그 도의 여러 장수인 남해 현령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룡, 평산포 권관 김축 등이 판옥선 한 척에 같이 타고, 사랑 만호 이여념, 소비포 권관 이영남 등이 각각 협선을 타고 우치적, 지세포 만호 한백록, 옥포 만호 이운룡 등은 판옥선 두 척에 같이 타고 어제에 이어 속속 뒤따라왔습니다." 

 

이순신은 제1차 출동 보고서에서 원균의 함대와 합류하는 장면을 기록한 대목이다. 보고서를 쓴 시점은 전라좌수영이 설치된 여수로 귀항한 이후였다. 그런데 이순신의 내용을 종합하면 "원균과 그의 부하는 5일과 6일 사이에 판옥선 네 척과 협선 두 척을 끌고 합류했습니다."라고 표현해도 되는 대목이다. 이순신은 원균이 약속한 시간과 지점에 나타나지 않았던 점과 부하들과 같이 일치된 행동을 하지 않은 채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이순신이 보낸 전령이 겨우 찿아 연락을 받은 후에야 못이긴척 나타난 점에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적진포해전에서 일본 함선을 나포한 이순신의 부하에게 함선을 빼앗기 위해 화살을 쏘는 등 전공에 눈이 어두워 행한 태도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다고 판단된다.

 

그래서 이순신의 원균에 대한 불만은 보고서 후반부에서 다시 나타난다.

 

"우수사 원균은 단 세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신의 여러 장수들이 사로잡은 왜선을 빼앗기 위해 아군에게 활로 쏘는 바람에 사부와 격군 두 명이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주장(主將)으로서 부하들의 단속을 잘못한 일이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사부는 활을 쏘는 사람, 격군은 노를 젓는 군사를 말한다. 이 정도의 보고서라면 원균은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원균이 아무리 공을 세우고 싶었다 해도 정도가 심했다고 판단된다. 결국 이런 일이 겹치면서 이순신과 원균은 서로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의 원균에 대한 감정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다시 이어진다.

 

"경상도 소속인 거제 현령 김준민은 멀지 않은 바다에 나가서, 그가 관할하는 지역 안에서 연일 고전하여, 주장인 원균이 빨리 오라는 격문을 보냈으나 끝내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는 해악한 일이오니 조정에서 조치하옵소서."

 

이순신은 남의 부하를 벌하라는 건의까지 했다. 부하의 잘못은 곧 그 지휘관의 잘못이다. 보고서의 칼날은 원균응 향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 전체의 수군 전력을 높이고자 하는 이순신의 고뇌도 엿보이지만 원균 쪽에서 보먄 감당하기 어려운 보고서였다. 원균이 무지하고 욕심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한 행동이 우선 문제였지만 이순신의 보고서 내용도 반대 입장에서 본다면 언젠가 화를 부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이러한 것들이 훗날 이순신이 모함으로 백의종군의 화를 입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또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무시할 수 없는 기록이 있다. 제1차 출동을 끝내고 전라좌수영에 귀항한 날은 1592년 5월 9일이다.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제1차 출동 보고서의 발송 일자는 그 다음 날인 5월 10일이다. 1592년 6월의 <선조수정실록>이다.

 

"처음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적을 물리치고 연명으로 보고서를 올리려 하였다. 이에 이순신이 말하되 '서서히 하자.'하고는 밤을 타서 스스로 보고서를 보내면서 원균이 군사를 잃어 의지할 데가 없었던 것과 적을 친 공이 없음을 보고하니 원균이 이를 두고 크게 유감으로 여겼다. 이때부터 각자의 보고서를 올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반목하게 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이 전하는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순신과 원균과의 불화는 이순신의 첯 출동 보고서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그런데 그 보고서가 원균이 공동으로 작성하자고 했지만 이순신은 '서서히 하자'고 하면서 밤새 혼자 보고서를 작성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내용도 원균에 대한 내용이 부정적인 내영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원균도 합포해전과 적진포해전에서 나름대로 전공을 세웠던 점을 고려할 때 지나친 감도 없지 않다. 그래서 그 보고서를 필두로 두 장군의 관계는 더 이상 화해할 수 없는 지경으로 악화되게 된다.

 

 

 

 

                              

 

 

 

이순신과 원균의 선전

 

옥포해전은 총 26척의 일본 함선을 불사른 대승리였다. 제1차 출동에 대해 기록한 이순신의 보고서는 옥포해전에서 '경상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왜선 다섯 척을 쳐부수고 포로로 잡혀 있던 우리나라 사람 한 명을 산채로 빼앗았는데, 총 왜선 26척을 모두 총통으로 쏘아 맞혀 부수고 불살랐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이순신 측이 21척, 원균 측이 5척으로 총 26척의 일본 함대를 격파한 것이었다. 이순신은 판옥선 21척, 원균은 4척으로 그러한 전과를 올렸으니 이순신은 이순신대로, 원균은 원균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두 번째 전투인 합포해전은 전라좌수영 함대가 일본의 대선 4척과 소선 1척을 모두 격파했지만 마지막 적진포해전에서는 총 13척의 왜선 대선과 중선이 바다 어귀에 열박한채 분탕질을 저지르고 있을 때 이순신 함대가 공격한 것이었다.

 

이순신의 보고서에 의하면 적진포해전에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가 격파한 일본 함선은 총 11척이었다. 만약 조선 함대가 열박한 일본 함선 13척을 모두 격파하였다면 나머지 2척이 빠진 것은 이순신의 계산 착오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균측에서 격파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부적인 내용에는 누락되어 있다.   

 

 

 

제1차 출동과 5천의 결사대의 전력

 

'5월 3일, 녹도 만호 정운이 들어와서 말하기를'우수사 이억기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니 통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늦추다가는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중위장 이순신(李純信)을 불러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을 약속하고 즉시 장계를 썼다. 이날 여도 수군 황옥천이 왜적의 소리를 듣고 달아났다. 집에서 잡아 목을 베어 군중 앞에 높이 매달았다.'(난중일기. 1592년 5웛 3일)

 

이순신과 관내 각 기지 장수들은 4월 30일까지 여수 본영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던 이억기 함대와의 합류를 손꼽아 기다리고 잇었다. 그러나 달이 바뀌어 5월 2일이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순신은 더 이상 출동을 늦출 수는 없었다.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휘하 장수들과 논의 끝에 전라좌수영 함대만이라도 단독 출동하기로 결정했다. 출동을 결심한 이순신 심정은 아주 복잡했다. 아직 적에 대해 입수된 정보가 별로 없었다는 점이 우선 마음에 결렸다. 즉, 적이 어디까지 진출해 있는지, 그 규모와 전력은 어느 정도인지, 어떤 임무를 띠고 있는지....등 등 모든 것이 불확실 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경상좌.우수영 함대의 행방도 묘연했고 기대했던 전라우수영 함대와 연합도 물건너 간 것상태였다. 본영인 여수를 비운 사이 있을  수 있는 적의 기습도 커다란 고민거리 중의 하나였다. 적이 여수를 손에 넣기라도 하는 날에는 전화가 전라도와 충청도에까지 미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또 적이 전라도를 병탄하고 서해를 돌아 한성 이서에 상륙한 후 전.후.좌.우에서 도성을 압박한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의 첯 출동은 여러가지에서 불확실 투성이에다 전하좌수영 단독으로 외소하고 불리한 전력으로 적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 만약 초전에 승리하지 못하고 패전한다면 조선 수군은 영원히 적을 바다에서 막을 수 없을 것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슴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책임의 막중함으로 인한 심적 부담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5월 4일 이른 새벽, 출동을 위해 각 기지에서 모여든 전라좌수영 소속의 병선들이 여수항을 가득 메웠다. 판옥선 24척, 협선(중선)15척, 포작선(소선) 46척, 총 85척으로 구성된 함대의 위용은 늠름하고 당당했다.

 

각 병선의 선상에는 커다란 방패가 빽빽히 들러쳐졌고, 그 뒤로 사령관의 승선을 기다리는 수병들이 장승처럼 도열해 있었다. 이른 새벽 1시경이었지만 포구에는 많은 인파가 운집해 있었고 이들 중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절망과 감동, 슬픔과 환희 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진 눈물이었다. 또한 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전장으로 자식과 지아비, 아비와 오라비를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절규이자 응원의 환호이기도 했다. 과연 누가 그들의 생사를 장담할 수가 있었을까?

 

새벽 2시경, 마침내 출항의 북이 울렸다. 북소리와 함께 우렁찬 군악이 울렸고, 기지 함대들은 일제히 황포돛을 올리고 선봉, 중군, 후군 순서에 따라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차레로 여수항을 빠져 나갔다.

 

첯 출동에는 총병력 1만 5천 명 중 5천 명이 선발되었다. 기타 병력은 여수 본영과 각 기지의 수비를 위해 잔류해 있었으며, 우후(부관 역) 이몽구가 진에 남아 있으면서 후방 방비의 충책임을 지는 유진장을 맡았다.

 

전라좌수영이 단독으로 1만 5천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의 평소 빈틈없는 군영을 경영해온 결과였다. 관내 기지들에 대한 점고와 훈련, 도망병 단속 등 철두철미한 후방 경영이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조차 못해낸 병력을 준비해 둘 수 있었던 것이다.

 

왜란을 대비하여 특별히 만든 거북선은 첯 출동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전란이 터지기 바로 며칠 전에야 진수식을 마쳤기 때문에 실전 배치를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거북선을 활용한 다양한 전술을 익혀야 했고,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탑재시켜야 할 무기의 종류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이 아직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순신도 거북선이 참전 할 수 없었던 점을 매우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5월 4일. 맑다. 먼동이 틀 때에 출항했다. 곧바로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다시 약속했다. 우척후, 우부장, 중부장, 후부장 등은 오른편에서 개이도를 돌아 적을 찿아 치게 하고, 나머지 대장선들은 아울러 평산포, 곡포, 상주포, 미조항을 지나갔다. 남해도 앞을 돌아 소비포에서 밤을 지새고 새벽 일찍 출발하여 당포로 향했다."(난중일기 1592. 5.4)

 

여수항을 빠져나온 함대는 남해도의 남쪽 끝 미조항을 돌아 소비포 쪽으로 향했다. 단순한 동진이 아니었다. 함대는 육지 쪽 조선군의 형편과 어디엔가 매복해 있을지도 모를 왜군의 동향을 살피면서 빈틈없는 수색전을 병행했다. 만약 왜군 기동함대가 숨어 있는 것을 모르고 부산 쪽으로 나갔다가는 여수 등 후방기지들이 기습을 받게 될 수 있음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함대는 귀향할 곳도 없이 해상에 고립되는 신세가 될 수 있으므로 이순신으로서는 신중을 기해에 했다.

 

5월 6일 이순신은 사전 연락을 통해 합류하기로 되어 있던 원균을 겨우 연락을 취하여 당포에서 만났다. 원균은 한산도 섬에 숨어 있다가 겨우 판옥선 1척만을 이끌고 나타났다. 원균의 경상우수영은 거제도 남쪽 가배랑에 위치하여 있었기 때문에 분산 일대의 왜군 함대와는 아직 교전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그렇다면 평소에도 판옥선 5척, 협선 10척, 포작선 20여 척 정도는 보유하고 있어야 했지만 거느리고 온 병선은 웬일인지 판옥선 1척이 고작이었다. 잠시후 남해도의 고을 수령과 미조항 등의 경상우수영 관내 기지 대장들이 2~3척의 판옥선을 타고 나타났다. 원래 이들 기지들도 판옥선 1~2척과 그 밖에 일정 수의 협선과 포작선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지만 역시 판옥선 1척 뿐이었다. 아무튼 원균 함대는 이틀 동안에 나타난 함선을 합쳐 모두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이 전부였다. 병선은 그렇다치고 병력과 노꾼, 화약무기, 군량미는 제대로 갖추었는지도 의문이었다.

 

이순신은 대략 이들의 형편을 짐작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전쟁 준비가 소홀했던 이들은 각 기지들이 왜란의 소식을 듣자 당황하여 우왕좌왕했고, 이에 동요된 백성과 관리들은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버리고 말았고, 급기야는 군관과 군사들마저 자신들의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가버리자 대장들만이 일부 병졸을 모아 남아 있던 판옥선을 타고 나타난 것이었다. 

 

아래는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 임진왜란 초기의 경상우수사 원균의 초라한 모습이다.

 

"우수영에서는 수사와 우후가 병영을 제 손으로 불태워버리고 우후는 행방불명이 되었고 한 척의 배만 타고 지금 사천 포구에 들어붙어 있는데, 수십 명의 격군뿐이고 군사들은 모두 흩어지고 한 명도 없습니다. 수사가 지난 19일에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서 지켜볼 생각으로 배를 고을 지경에 대었더니, 전에 쳐들어 왔던 왜적 1백 여명이 배반한 백성들을 거느리고 나시 와서 성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돌아가지 못했습니다."(선조실록 1592.6.28)

 

"왜적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우수사 원균은 대적할 형편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전선과 무기들을 모조리 바다에 가라앉히고 수군 1만 여 명을 흩어버린 다음, 단지 옥포 만호 이운룡, 영등포 만호 우치적과 함께 남해현 앞바다에 머물러 있다가 육지에 올라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선조수정실록 1592.5)

 

본래 경상우수영 함대는 전라좌수영보다 넓은 해역을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대의 규모도 두 배는 됐어야 했다. 그러나 평소 병선 건조와 동원훈련 등을 소홀히 했고, 게다가 원균 수사는 개전 2개월 전에야 부임한 탓으로 이렇게 초라한 모습의 함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왜적 1백여 명을 보고도 겁이 나서 피하는 전력으로는 결코 20~30척 규모의 왜군 기동함대를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원균은 그 동안 숨어 지내면서 구원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행여 왜군들 눈에 뜨일 새라 보름이 넘는 기간을 숨바꼭질 하듯이 숨어 지내던 원균은 그겋게 이순신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한 곳에 모으고 두번 세번 약속을 했다.' 고 한 것은 부임 2개월 만에 전란을 맞은 원균 쪽이 화약무기 등에 대한 준비와 훈련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대응책 논의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