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626 : 조선의 역사 168 (선조실록 33) 본문
한국의 역사 626 : 조선의 역사 168 (선조실록 33)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아래는 이순신이 옥포대첩을 승리로 장식한 후 여수 본영으로 복귀하여 조정에 보고한 보고서인 '옥포파왜병장'이다. 한마디로 구구절절 처음부터 끝까지 일어난 일을 가감없이 낱낱이 기록하였고, 부하 장수들의 전공도 개인별로 일일이 기록하여 공훈의 근거로 삼았으며, 아군의 이동로와 행동, 명령, 작전지시, 원균의 동향과 행동, 아군의 편성, 적에 대한 모든 것을 세부적으로 기록하여 보고하였다.
오늘날 인식으로 평가하자면 내용이 장황하고 너무 세부적인지라 간단명료를 요구하는 오늘날의 작전 결과 보고서로는 부적절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나라가 국난을 당하여 육군이 연전연패하고 임금이 북으로 피난간 상황에서 일궈낸 적과의 싸움에서 첯 승리였다.
때문에 이순신은 이 보고서를 쓰면서 흥분한 마음을 진정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 자신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을 것이고 승리에 대하여 자랑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승전보는 조정의 임금과 모든 신료들에게, 그리고 온 나라 백성들에게 희망의 불빛이 될 것이며 심기일전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기폭제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구구절절 세부적인 내용을 기록하였고 임금에게 조금이라도 위안과 근심을 들어줄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을 것이다.
장계의 전문 내용을 보자.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 옥포에서 적을 쳐부순 장계)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전날 경상우수사와 협력하여 적의 배를 쳐부수라는 분부를 받고, 지난 5월 4일 새벽 2시경에 출발하면서 전라우도 수사 이억기에게는 수군을 거느리고 신의 뒤를 따라오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수군 여러 장수들이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거느리고 떠나 경상우도 소비포 앞바다에 이르니 날이 저물기로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5일 새벽에 출발하여 전날 두 도의 수군들이 서로 모이기로 약속한 곳인 당포 앞바다에 이르니, 경상우수가 원균이 약속한 장소에 없으므로 신이 거느린 가볍고 빠른 배를 보내어 당포로 빨리 오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습니다.
6일 아침 8시경에 원균이 경상우도 경내인 한산도로부터 단지 한 척의 판옥선만 타고왔는데, 적선의 수와 정박해 있는 곳과 또 접전한 과정을 자세히 물었습니다. 그때 경상우도 장수들인 남해 현령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룡,........등이 판옥선 2척에 나누어 타서 5일과 6일에 잇달아 도착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도의 여러 장수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하여 두 번 세 번 거듭 약속(작전지시)을 분명히 한 뒤에 거제도의 송미포 앞바다에 이르니 날이 저물었으므로 밤을 보냈습니다.
옥포 해전
7일 새벽 다같이 출발하여 적선들이 정박해 있는 천성과 가덕을 향해 갔는데 정오에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척후장인 사도 첨사 김완, 여도 권관 김인영 등이 신기전을 쏘아 올려 변고를 알리므로 적선이 있는 줄 알고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신칙하기를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산같이 정중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고 지시한 후 그 포구 앞바다로 줄지어 나란히 들어가 보니, 왜선 50여 척이 옥포 선창에 나뉘어 정박해 있었습니다.
큰 배는 사방으로 온갖 무늬를 그린 비단휘장을 둘러쳤고, 그 위장 주변으로는 대나무 막대기를 꽃아 놓았으며, 붉은색과 흰색의 작은 깃발들을 어지럽게 매달아 놓았는데, 깃발 모양은 마치 펄럭이는 천이나 매달린 등 모양이었는데 모두 무늬 있는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바람따라 펄럭거려서 바라보니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왜적의 무리들이 그 포구로 들어가서 분탕질을 쳐서 연기가 온 산에 가득 찼는데, 우리 수군의 배를 돌아보더니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뿔뿔이 흩어져 뛰어가서 배에 타고는 아우성을 치며 노를 재촉하여 바다 가운데로는 나오지 못하고 기슭으로 저어가는데, 6척이 선봉에 서서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이 한마음으로 분발하여 모두 죽을 힘을 다하니 또 배 안에 있던 관리와 또한 그 뜻을 본받아 서로 격려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공을 세우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쪽으로 에워싸고 대들면서 대포를 놓고 화살을 쏘아대기를 마치 바람처럼 천둥처럼 하자, 적들도 조총과 화살을 쏘아대다가 기운이 다 떨어지자 배에 싣고 있던 물건들을 바다에 내던지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화살에 맞은 눔은 부지기수였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쳐서 달아나는 눔도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신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이 한마음으로 분발하여 모두 죽을 각오로 힘을 다하니 또 배 안에 있던 관리와 군사들 또한 그 뜻을 분받아 서로 격려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공을 세우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쪽으로 에워싸고 대들면서 대포를 놓고 화살을 쏘아대기를 마치바람처럼 천둥처럼 하자, 적들도 조총과 화살을 쏘아대다가 기운이 다 떨어지자 배에 싣고 있던 물건들을 바다에 내던지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화살에 맞은 눔은 부지기수였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쳐서 달아나는 눔도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적들은 일거에 무너져 흩어져서 바위 언덕으로 기어 올라갔는데, 뒤떨어질까 겁내는 것 같았습니다.
좌부장인 낙안 군수 신호는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고 머리 하나를 베었는데 배 안에 있던 칼, 갑옷, 의관 등은 모두 왜장의 물건인 듯했습니다. 우부장인 보성 군수 김득과는 왜적 큰 배 1척을 쳐부수고 우리나라 사람 포로 1명을 도로 빼앗아 왔으며, 전부장인 흥양 현감 배홍립은 왜의 큰 배 2척을 쳐부수었고, 중부장인 광양 현감 어영담은 왜적의 중간 배 2척과 작은 배 2척을 쳐부수었고, 중위장 방답 첨사 이순신은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었고, 우척후장 사도 첨사 김완은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었고, 우부기전통장 진의 군관 보인 이춘은 왜적의 중간 배 1척을 쳐부수었고, 유군장 발포 가장 신의 군관 훈련봉사 나대용은 왜적 큰 배 2척을 쳐부수었고, 후부장 녹도 만호 정운은 왜적 중간 배 2척을 쳐부수었고, 좌척후장 여도 권관 김인영은 왜적 중간 배 1척을 쳐부수었고, 좌부기전통장 순천 대장(대리장수) 전 봉사 유섭은 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었고, 경상도 여러 장수들이 와적의 배 5척과 우리나라 포로 3명을 도로 빼앗아 왔습니다. 모두 합하여 왜적의 배 26척을 총통으로 쏘아 맞혀 깨뜨리고 불태웠는데, 온 바다에서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합포 해전
산으로 올라간 적도들은 숲 속으로 기어들어가 기가 꺽이지 않은 눔이 없었으므로, 신은 여러 배에서 용맹한 사부(궁수)들을 뽑아서 산에 올라간 왜적들을 쫓아가 잡도록 하려고 생각햇으나 거제도는 섬 전체가 산세가 험하고 수목이 울창하여 발붙이기가 어려울 뿐더러, 당시 우리는 적의 소굴 안에 있는데다 배에 사부조차 없으면 혹시 뒤로 포위당할 염려도 있고 날도 이미 저물어가므로 뜻대로 하지 못하고 영등포 앞바다로 물러나와 머물면서, 군사들을 시켜서 나무도 하고 물도 길어오게 하여 밤을 지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후 4시경(신시 申時)에 멀지 않은 바다에 왜적의 큰 배 5척이 지나가고 있다는 척후장의 보고가 있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웅천 땅 합포(合浦: 마산 근방) 앞바다에 이르니, 왜적들은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아군의 집중 공격으로 사도 첨사 김완이 왜적의 큰 배 1척을 깨뜨리고, 방답 첨사 이순신이 왜적의 큰 배 1척을 깨뜨리고, 광양 현감 어영담이 큰 배 1척을 깨뜨리고, 그 부통(部統)소속으로 방답에서 귀양살이하던 전 첨사 이응화는 왜적의 작은 배 2척을 깨뜨리고, 신의 군관 봉사 변존서, 송희립, 김효성, 이설 등이 힘을 합쳐 활을 쏘아 왜의 큰 배 1척을 깨뜨림으로써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깨뜨려 불태운 후, 밤을 타서 노를 재촉하여 창원 땅 남포(현 구면산 남포리)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치고 밤을 보냈습니다.
적진포 해전
8일 이른 아침에, 진해 땅 고리량에 왜적의 배가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고 곧 출발하여 안팎의 섬들을 협공하고 수색하면서 저도를 지나 고성 땅 적진포(현 통영군 광도면 적덕동)에 이르니 모두 13척의 왜적 큰 배와 중간 배들이 바다 어귀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왜적들은 포구 안의 민가들을 분탕질한 뒤에 소를 잡아 술과 음식을 먹으며 즐기고 있던 중, 포구로 접근해 들어가는 우리 군사들의 위세를 바라보고는 놀라 겁을 내어 산으로 올라가므로, 아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적선을 불살랐습니다. 이 전투에서 낙안 군수는 그 부통 소속인 순천 대장(代將) 유섭과 힘을 합쳐 왜적의 큰 배 1척을, 방탑 첨사가 왜적의 큰 배 1척을, 그의 부통장(部統將)으로 귀양살이를 하던 전 봉사 주몽룡이 왜적의 중간 배 1척을, 신의 대졸(代卒) 군관인 전 봉사 이설, 송희립 등이 힘을 합쳐 왜적의 큰 배 2척을, 군관 정로위 이봉수가 왜적의 큰 배 1척을, 군관 별시위(別侍衛) 송한린이 왜적의 중간 배 1척 등을 총과 대포를 쏘아 맞추어 깨뜨려 불태웠습니다. 그런 후에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아침밥을 먹고 쉬게 하였습니다.
그때 적진포 근처에 사는 향화인(向化人:왜적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 이신동이란 자가 우리 수군을 보고는 산꼭대기에서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울부짖으며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적은 배로 실어와서 신이 직접 왜적의 소행을 물어보니, "왜적들이 어제 이 포구로 들어와서 민가에서 재물을 빼앗아 소와 말에 싣고가서 자기들 배에 나누어 실었습니다. 그리고 초저녁에 배를 띄워 놓고는 소를 잡아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피리도 불면서 날이 새도록 그치지 않았는데, 가만히 그 노랫가락을 들어보니 모두 우리나라의 노래가락이었습니다. 오늘 이른 아침에 그 반은 남아서 배를 지키고 그 반은 뭍으로 올라가 고성으로 향해 갔는데, 소인의 늙은 어미와 처자들은 적을 보고 숨을 때 그만 놓쳐버려서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라고 하며 슬피울면서 호소하였는데, 신은 그 모습이 불쌍하고 또 다시 포로가 될까봐 염려되어 데려 가려 했으나 그는 자기 어미와 처자를 찿아야 된다며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같이 있던 장수와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는 더욱 통분해하면서 서로 돌아보고 기운을 내어 한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곧 찬성, 가덕, 부산 등지로 향하여 왜적의 배들을 섬멸해버릴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적의 배들이 대어 있는 곳은 지형이 좁고 바다물이 얕아서 판옥선 같은 큰 배로는 싸우기가 매우 어렵고, 본도 우수사 이억기가 아직 오지 않아서 좌수영의 군사만으로 적진 속으로 깊이 쳐들어가기에는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므로 원균과 마주 앉아 좋은 계책을 내어 국가의 치욕을 씻고자 꾀하였습니다.
전해져온 임금의 파천 소식
그때 마침 본 도 도사 최철견의 통첩이 뜻밖에 도착하여 비로소 임금의 어가가 관서로 피난가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놀랍고도 분통함이 그지없어서 온 간장이 다 찟어질 정도로 하루 종일 붙잡고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각각 돌아가기로 하여 9일 정오 때 모든 배들을 거느리고 무사히 본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에게 배들을 더 한층 잘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에 대비하라고 엄히 타이른 다음 진을 파하였습니다.
생환포로 윤백련의 진술
순천 대장 유섭이 도로 빼앗은 우리나라 계집아이는 겨우 4~5세이니 그 부모나 살던 곳 등을 전혀 알 길이 없었고, 보성 군수 김득광이 도로 빼앗은 계집아이 1명은 나이가 좀 들었는데 머리를 깍아서 왜인처럼 되었습니다. 임진년 5월 7일에 심문을 해 보았더니, 동래 응암리(동래읍 오장리) 근방에 사는 백성 윤백련으로 나이는 14살인데, 모월 모일 모처에서 왜적을 만나 모모 사람들과 함께 사로잡혔다가 그날 접전할 때 도로 붙잡혀 나오게 된 연유와 왜적들의 온갖 짓이며 자기의 근본과 신분 등을 모두 말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윤백련과 다른 계집 아이는 순천, 보성 등의 관리들에게 각별히 잘 보호해주라고 다시 내주었습니다. 흉악한 눔들의 해독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러 벌써 많은 살륙과 약탈 행위가 자행되어 이 지역 백성들로서 온전한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신이 이번에 해안을 따라서 두루 둘러보니 지나는 산골마다 피난민이 없는 데가 없었습니다.
신의 배를 바라보고는 아이든 늙은이든 메고 지고 서로 이끌면서 슬피 울부짓는 것이 다시 살 길이나 얻은 것처럼 했고, 적의 종적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보기에 참담하여 모두 다 배에 실어 오고 싶었으나, 그런 사람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싸우러 가는 배에 사람들과 물건을 가득 싣고서는 운행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어 "돌아갈 때 데리고 갈 테니 각자 잘 숨어서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여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라."고 타이른 뒤에 적을 쫓아서 멀리 떠났습니다.
그랬는데 갑자기 전하께서 서쪽으로 행차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노를 재촉하여 돌아왔으나, 불쌍하고 가련한 마음은 여전히 잊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피난 떠난 지 오래되어 이미 가진 양식도 틀림없이 다 떨어져서 굶어 죽을 것만 같았으므로, 그 도의 겸관찰사에게 마땅히 그들을 찿아내어 구호해 주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공문을 보냈습니다.
대개 신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과 관원, 군사들은 분격하여 앞을 다투어 적에게 달려들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함께 크게 이길 것을 기약하면서 전후로 40여 척의 왜선을 불태웠으나,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은 둘 뿐이어서 신이 적을 섬멸하고 싶은 마음을 다 풀지 못하여 통분한 마음을 더욱 심하지만, 접전할 당시 헤아려 보면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선은 빠르고 날아가는 듯한데, 우리 수군을 보고 미처 도망치지 못할 것 같으면 매번 기슭으로 붙어서는 고기 두름 엮은 듯이 배를 저어 가다가 형세가 궁해지면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가 버립니다. 그래서 이번 길에 모조리 다 잡지 못했는데, 간담이 찢어질 것 같아서 칼을 어루만지며 탄식하였습니다.
왜선에서 노획한 왜인의 물건들
왜적의 배에 실렸던 왜적의 물건들은 모조리 찿아내어 5칸 곳간에 채우고도 남았습니다. 나머지 사소한 물건들은 전부 적지 못하고 그 중에서 전쟁에 쓰일 만한 것들만 골라 따로 그 종류별로 모아 놓았으며, 김해부 소속 관리로 하여금 장부를 만들어 부대별로 노획한 각종 활과 화살 등을 차례대로 기록하여 책자로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왜선에 실렸던 우리가 먹을 만한 쌀 3백여 섬은 여러 전선의 배고픈 격군들과 사부들의 양식으로 나누어주고, 의복과 무명 등의 물건들도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어 적을 쳐부순 후 전리품을 바라는 마음을 자극하였습니다.
그리고 왜인의 붉고 검은 철갑과 여러가지 쇠로 만든 투구와 철광대, 금관, 금깃, 소라 고동 등과 같이 기이한 모양과 사치를 다해 꾸민 것들은 마치 귀신같고 짐승같아서 보는 사람들로서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큰 쇠못과 사색 등과 같은 성을 깨뜨리는 기계와 같은 물건도 역시 몹시 괴상하였습니다.
군사용으로 사용되는 물건 가운데 가장 요긴한 것 한가지씩 뽑아 봉해 올립니다. 그 중에는 철갑, 총통 등의 물건도 들어 있으며, 낙안 군수 신호가 벤 왜의 머리 하나는 왼쪽 귀를 도려내어 궤에 넣고 봉해서 접전할 대 공로를 세운 신의 군관 송한련과 전무 김대수 등에게 주어 올려보냅니다. 나머지 올려 보낼 물건들도 수량대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원균과 그 부하들의 행태
접전할 때 순천 대장선의 사부이자 순천부의 정병인 이선지가 왼쪽 팔 한군데에 화살을 맞아 조금 상한 것밖에는 부상당한 군사가 없습니다. 우수사 원균은 단지 3척의 수군만을 거느렸는데, 신의 여러 장수들이 잡은 왜적의 배를 심지어 활을 쏘아대면서까지 빼앗으려 하였는데 그 바람에 두 사람이 화살에 맞아서 부상당하였습니다. 주장으로써 이보다 더 심한 경우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같은 도 소속 거제 현령 김준민은 멀지 않은 바다에서 연일 싸움이 벌어지고 잇는데도 그 주장인 원균이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격문을 보냈는데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 소행이 심히 해괴합니다. 이는 조정에서 조처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간 적을 막는 계책에 있어서 수군이 대함대를 이루어 나아가고 물러나는 게 아니라 오로지 뭍에서의 싸움만으로 성을 지키기에 힘썼기 때문에 나라의 수 백 년 내려온 기업이 하루아침에 적의 소굴로 변한 줄로 압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으며, 만일 왜적이 본도를 침범해 온다면 나가서 수전으로써 죽기를 각오하고 막아내겠지만, 만약 육로로 침범해 온다면 본도의 장수들과 군사들은 전마 하나 없으니 막아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순천, 돌산도, 백아곶, 흥양, 도양의 목장에는 전쟁에 쓸 만한 말들이 많으니 넉넉히 뽑아내어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고 살찌게 먹이고 길들여서 전쟁터에서 쓴다면 이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신이 멋대로 건의 할 일이 아니지만 사태가 위급하므로 겸관찰사 이광에게 감목관을 정하여 보내고 말몰아내는 군사는 각 진과 포구의 분부군으로 충당하되 하루나 이틀의 기한을 정하여 잡아내어 훈련시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내용으로 공문을 보냈습니다."(옥포파왜병장, 1592.5.10)
이상이 옥포대첩 이후 여수 본영으로 귀대한 이순신이 조정에 보고한 장계인 '옥포파왜병장'의 내용이다.
이순신의 제1차 출동은 5월 4일 새벽 2시경에 전라좌수영(여수)에서 출발하여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에서 승리하고 적진포에서 마지막 해전을 치른 후에 정오에 적진포에서 회항을 결정하고 여수 본영으로 귀대하기까지 6일간 소요되었다. 출전 경로는 전라좌수영(여수) 출발-평산포-상주포-미조항-소비포(5월 4일)-당포(5일)-거제도 남단의 송미포(6일)-옥포해전-영등포-합포해전-적진포해전(8일)-견내량-여수 본영이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함대는 전라좌수영의 전선 24척, 원균의 경상우수영 소속 전선 4척 합계 28척의 배로 세 차례 전투에서 적선 26척을 깨뜨리거나 불태워버리는 큰 전과를 거둠으로써 임진왜란 개전 이래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는 왜적과의 싸움에서 조선군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면산의 여름 5 : 민족의 불행 한국전쟁, 호국보훈을 생각하며...1 (0) | 2012.06.25 |
---|---|
한국의 역사 627 : 조선의 역사 169 (선조실록 34) (0) | 2012.06.25 |
한국의 역사 625 : 조선의 역사 167 (선조실록 32) (0) | 2012.06.23 |
한국의 역사 624 : 조선의 역사 166 (선조실록 31) (0) | 2012.06.22 |
한국의 역사 623 : 조선의 역사 165 (선조실록 30) (0) | 2012.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