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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여름 6 : 민족의 불행 한국전쟁, 호국 보훈을 생각하며...2 본문
우면산의 여름 6 : 민족의 불행 한국전쟁, 호국 보훈을 생각하며...2
수많은 영령들이 진달래가 되고, 개나리가 되고, 철쭉이 되고, 벗꽃이 되고, 장미가 되고, 산비둘기가 되어 다시 이 땅에 말없이 피어나는 듯하다. 우리들의 그들의 혼령과 피와 눈물과 땀을 다시 먹으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 땅의 흙은 모두 선조들의 육신들이 썩고 가루가 되어 분토가 되어 거름이 되었으며 그 영양분을 먹고 이 땅의 오곡과 수목들이 자라고 열매가 맺는다. 우리들은 그러한 오곡과 야채를 먹으며 나무로 집을 짓고 불을 떼며 밥을 하고 따뜻한 방안에서 추운 겨울을 지내고 시원한 너무 그늘에서 여름을 지낸다. 그 열매와 과실은 모두 그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으며 육신이 썩어 숨어들어간 알맹이들이 아닌가! 우리들 또한 세월이 지나면 한 줌의 재가되어 이 땅을 기름지게 만들어 후손들이 먹고 마시며 살아가게 만들 것이다. 우면산의 진흙과 먼지가 모두 그 분들의 영혼의 뼈가루인지도 모른다.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남다른 지혜가 있다면 이런 기념일에는 반드시 국립묘지를 참배하도록 하는 게 좋다. 연휴라고 남들이 간다고 비싼 연료 낭비하며 멀리 여행가서 헛돈 쓰고 올 것이 아니라, 이런 날에 온 가족이 간단히 도시락을 싸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국립묘지에 가서 전체 묘역을 골고루 돌되, 제일 위쪽 국가유공자 전직 대통령 묘역부터 각 비문 뒤에 새겨진 눈물어린 글귀를 모두 적고 소리내어 읽게 만들어 보라! 아마 비문 열 개도 안되어서 모두가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어린 자녀들의 교육에는 그만큼 유익한 현장교육이 없을 것이다. 기념일에는 동작동, 대전 국립묘지 등에는 방문자들이 많아 많이 밀리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좋다. 다른 묘역도 돌며 부모들이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일깨워 주는 게 좋을 것이다. 자유를 위해서, 민주화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잠든 그들의 영령들에게 엄숙한 마음과 자세를 갖도록 자녀교육을 시키는 게 좋을 것이다. 위대하고 훌륭한 자식은 부모들의 지혜로운 가정교육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묘역에서 홀로 슬피우는 여인이나 유가족에게 가서 진심으로 위로하고 지나간 진한 슬픈 이야기를 자녀와 같이 들어보라! 어떠한 책보다도 어떠한 산교육보다도 그런 값진 교육은 없을 것이다. 전쟁이란 무엇이며, 왜 인류는 전쟁의 역사를 이루어 왔는지도 설명해주라. 전쟁의 참상도, 전쟁의 비극도 설명해주라.
우리의 오늘이 있는 것은 우리들이 잘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 그리고 그들의 육신과 혼령이 이 땅에서 흙이 되고 바람이 되고 꽃이 되어 향기를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배가 부르고 먹다먹다 남은 음식을 버리고 전국 각지를 다니며 식도락을 즐기며 살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자식을 반듯하게 키우려면 풍족을 멀리하라. 어렵고 힘든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만이 세상에서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배부르게 먹고먹여 비만을 만들지 말고 용돈을 충분히 주어 방탕아를 만들지 말고 노력없이 재물을 남겨주어 풍족하게 살게 만들지 말고 스스로 노력하여 부를 갖도록 교육시키는 부모가 지혜로운 부모이다. 그렇지 않으면 임진왜란시 처럼 원균이나 이일같은 장수를 만들어 나라를 거들내거나 종국에는 나라를 팔아먹는 이완용같은 인물이되거나, 권력형 비리와 부패에 연루된 공직자, 판검사, 경찰, 기업인, 다단계 사기꾼, 성폭력 범죄자, 강도.강간범, 살인자 같은 인물이 되느니라~~
얼굴 못 생겼다고, 부모가 능력이 없다고, 가정이 가난하다고, 학벌이 좋지 않다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지 못했다고, 기름진 음식을 못먹는다고, 명품 옷을 못 입는다고, 넓은 집에서 못지낸다고, 외제차를 못 탄다고 그렇게 억울하고 슬퍼냐? 사지와 정신이 멀쩡한 자신이 거리를 마음껏 활보하는 것이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운가? 칠성판에 누워 세상을 바로보았는가? 병원 병실에서 몹쓸 병에 걸려 임종을 앞두고 밖을 내다 보았는가? 한강 다리위에서 자살을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해 보았는가? 2년도 안되는 군대생활을 견디기에 그렇게 힘들었던가? 전쟁의 고통을 당해보기나 했냐고? 보리밥과 미숫가루와 감자, 고구마로 연명하여 보릿고개를 넘어보았느냐고? 허망한 욕심에서 벗어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녀를 반듯하게 키울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은 민족간에 벌어진
냉전시대 강대국의 대리전쟁이다.
1. 조선의 망국
조선은 개국후 강력한 카리스마의 태종, 유능한 세종, 왕권을 찬탈한 세조 등의 유능한 왕들과 개국공신들과 그 후손들로 구성된 훈구파 세력과 더불어 왕조의 안정과 융성을 200년 가까이 유지하여 왔다. 그러는 동안 훈구세력들은 부패하기 시작하였고 성종대에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정치.사회의 새로운 질서를 강조하는 사림세력을 등장시켜자 훈구파와의 갈등은 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 등 네 차례에 걸친 사화로 신진 사림세력은 타격을 받고 정국혼란은 계속되었으며 신분.군역.공납제도는 격심한 문란을 초래함은 물론 민생은 토탄에 빠지고 장부상의 군대만 남는 형상이 되었다.
조선이 논쟁과 당쟁에 국력을 낭비하고 목민을 빙자한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등 극도로 병약해진 상태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으며 이후 7년간 왜란으로 전국토가 왜눔의 말발굽에 초토화 되었으며 그 피멍이 채 가시기도 전에 중원대륙을 통일한 만주의 야만족인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하여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들어가 항쟁하였으나 강.온건파간의 대립으로 갈등을 겪다가 결국 항복키로 결정하고 지금의 송파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의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궁궐로 돌아가던 인조는 길을 뚫어야 했는데, 서울 도성인 한양은 거리마다 시체들로 발걸음을 옮길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불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명청전쟁을 직접 보았고 서양 신부 아담샬을 만나 선진 문물에 대해서 눈을 떤 세자가 돌아오니 인조는 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아들이 자신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할 것을 우려하여 독살하고, 부인 강씨는 사약을 내리고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으나 하나만 살아남고 모두 죽었다. 권력에는 아들도 필요없고 남편도 필요없는 것이다.
무능한 인조가 죽자 인조를 뒤이어 봉림대군 등극하매 효종이더라. 효종은 재임 10년동안 관무재, 진영장 제도를 설치하고 군대양성에 힘을 강화하는등 북벌계획을 수립하여 진행하였으나 송시열 등 사림들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김자점과 인조의 후궁 조씨가 역모를 꾀하는 등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으며 재임 10년째 머리에 난 종기로 침을 맞다가 승하함으로 북벌계획을 채 시행도 하기전에 절명하는 비운을 겪으면서 북벌계획은 무위로 끝난다.
계속된 이씨 왕조는 사색당파와 권력투쟁의 암울한 시대를 보내면서 각지에서는 반정/반역이 빈발하였고 왕권유지와 권력쟁탈, 궁중암투에 부국강병은 커녕 왕조의 핏줄잇기에만 급급하던차, 후사가 없자 유일한 왕족이던 흥선대군 이하응의 아들 고종이 조대비에 의하여 이씨 왕조의 몰락을 재촉하는 임금으로 등극하게된다. 흥선은 고종의 나이가 어린관계로 섭정을 하게 되는바, 강경책으로 일관타가 대원군과 며느리인 명성왕후 간에 끝없는 권력에 대한 주도권 갈등이 계속되던 중 서로 일.중.러 등 외세를 끌여들인 결과 일제는 조선을 삼키기 위해 청,러시아와 일전을 벌이게 된다.
여기에서 함석헌옹이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마지막 부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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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민족
이때 역사의 요청은 한마디로 깨는 데 있었다. 민족으로 깨고, 세계에 깨고, 시대에 깨야 한다. 역사는 무서운 속도로 급선회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대국 중국.왜눔이 문제가 아니라 영국.미국.독일.불란서.러시아.화란 등 얼굴이 다르고 말과 글이 다른 그리고 색깔도 다른 수많은 외국들이 들어 닥치고, 전에 보지도 못하던 총.육혈포.자명종.천리경.인쇄기 등이 들어오니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지 그 누구하나 그들의 문명을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강변한 사람은 없었다.
일이 급해졌다. 이제까지 바다 가운데서 노략질이나 하던 왜구의 나라 일본이 '명치유신'을 하여 봉건시대의 막부를 집어치우고, 근대식의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천황이라 하고, 나라를 열어 세계 모든 열강과 교통을 하면서 우리더러 나라를 열라고 트집을 해온다. 일찌기 이런 세상은 보지를 못하였다. 우리나라 유신들이 보기에는 '사서삼경'에서도 못보던 것이요, '팔만대장경'에서도 못 보던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김씨고 이씨고 양반이라 자랑하고 있을 수도 없고, 양반이요 상눔이요를 가릴 수도 없다. 노론이요 소론이요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토록 조상 대대로 섬겨오던 대국 중국이 코쟁이 양눔들에게 꼼짝을 못하고 청국군대가 서양군대에 대패를 하고, 그래서 항구를 조차하고, 땅을 빼았기고 ,배상을 물지않나? 이런 경우는 절대로 본적이 없는 조선은 천지가 개벽하고 모든 사상과 사고가 혼돈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이때 유신들이 하는 일이란 제것 챙기고 나라 망하기 전에 더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자손대에 물려주는 일만 생각하고 백성들 쥐어 짤 궁리만 하고 있었으니 가련한 것은 우리 조선의 선량한 민중들 뿐이라! 이때에 살려거든 우리도 한 민족으로 깨어 말을 같이하고 힘을 모아 낡은 생각을 버리고 나날이 발달해 가는 새 지식.새 기술을 배워 여러 나라와 어깨를 겨루고 나갈 결심을 했어야 할 것이었지만,
그것을 하자는 실학이었는데 실학파가 그것을 못하고 낡은 책장만 뒤집다 말았지 민심을 뒤집지 못하였다. 그래서 천주교였는데 천주교는 천당.지옥만 찿다가 말았다. 그후 홍경래가 나타나 한번 역사를 뒤집어 보려 하였지만 비만 들다가 조선의 더러운 찌꺼기를 쓸지도 못하고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고, 개신교도 바람을 불러 일으켰으나 민중의 힘으로는 중과부적이라 그만 지쳐 수구려들고 말았다.
역사에는 그래도 행운.시운이라는게 있는 법이라, 일본이 '페리 제독'의 강권에 못이겨 나라를 열게 된 것은 참 운이 좋다 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으나 종내 그저 지나가고 말았다. '하멜' 일행이 십수 년을 제주에 있었건만 서양 소개를 못하였고, '병인양요'에 불란서가 물러간 것은 저희 나라 일 때문이건만 이쪽에서는 우리 세력이 세서 됐거니 생각하여 점점 더 문을 닫게 되었고, 대동강에 '셔먼 호'가 들어온즉 때아닌 홍수에 속아 불타 실패하게 되고, 일이 모두 이런 식이어서 기회는 다시오지 못하였다. 우리에게도 '페리' 같은 강한 함대가 몰려와서 조선 양반눔들 간담을 쓸어내려 왜 강제로라도 열게 하지 못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마지막 막
그때 우리나라 꼴은 무엇보다 전주 이씨 집안에 잘 나타나 있다. 하필이면 대원군이요, 민비인가? 이것이 다 마지막 망국극을 하기 위해 준비된 마지막을 선택된 배우들이었다. 당파 싸움을 하다 하다, 외척이 전권 세도를 하다 하다, 끝마무름이 그 궁중의 싸움이었다. 흥선은 영악한 왕족이었다. 안동 김씨 세도천하가 계속되는 동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미친척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철종이 후사가 없으니 시간을 기다린 것이다. 다 계산된 임금 만들기를 예견하고 죽임을 피하면서 때를 기다린 사람이었다. 거지처럼, 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미친척 숨죽이고 있다가 철종이 후사가 없이 갑자기 죽자 왕족의 혈육으로 임금이 된 자신의 아들 열두 살짜리 고종으로 등극하고, 그리고 섭정을 보게 된 그 아버지 흥선군은 영화를 누리자는 생각이었지, 그 운명이 그 아이의 손에 잡혀 있던 연줄처럼 끓어져 나갈 것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어린 임금의 왕후를 구하는데 고르고 골라 외척들이 말썽이 없을 만한 민씨집 딸을 대려올 때, 그것이 다음날 자기와 세력을 겨루다 집안 망치고 나라를 망칠 싸움의 적수인 민비가 될 줄은 천만 뜻밖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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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황실 대한제국과 덕수궁' 사진전 |
정국은 혼란을 거듭하는 가운데, 위로는 임금과 왕후를 포함하여 모든 당상관들은 매관매직에 정신이 없고, 평양감사 자리는 민씨네 집안이 독식하고, 지방의 모든 관리는 부패와 무능이, 매관매직으로 본전 뽑기에 백성 수탈이 판을 치고 백성들은 굶고 지치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유랑민이 되어 도적떼가 되거나 낭인신세가 되어 이 장터, 저 장터를 돌아다니며 시장터 국밥이나 한 그릇 얻어먹는 거지신세가 된지 이미 오래고, 지방곳곳의 향교는 유신들이 진을 치고 백성들을 대려다가 곤장을 치고 관리를 협박하고 향교에 몰려 앉아 양반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수구파요 개화파요, 친일이요 친청이요, 친로요 친미요 하는 파들을 갈라 배치되어 서로 싸우고 물고 뜯고 하고 있는 모습은 그 모양이 늙은 창녀촌 갈보와 같다 아니 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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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박물관, 흥선대원군 특별전 |
제가 스스로 제 운명을 개척하고 사람 노릇을 하자는 생각은 없고 오늘 이눔에게, 내일은 저눔에게 빌붙어 가랑이 벌리고 그때 그때 구차한 안락을 탐하고 돈푼께나 받고 군것질 하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이눔에게도 사랑을 잃고 저눔에게도 미움을 사 몹쓸 병이 들어 자식 하나 없이 단칸방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늙은 창녀처럼 한 몸이 망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부 먼저 깬 사람들이 갑신정변.갑오경장 하는 운동이 없지는 않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싸움의 결과 대원군은 중국에 붙들려 가고, 민비는 일본눔들 손에 죽고, 임금은 자리에서 쫓겨나고 아들이 대신 들어섰다가 그나마도 오래 못가고 1910년 8월 28일에 한일합방이 되어 나라가 아주 망해 버렸다.
이 민족의 부끄럼이 이제는 끝에 간 것이다. 고구려 때에는 욕을 먹었는지 모르고, 신라때는 매 맞았는지 모르고, 고려 때에는 넘어졌는지 모르나, 이번에는 아주 거꾸로 쳐박혀 버렸다. 고구려에는 발해가 있고, 신라에는 마의태자.궁예가 있고, 고려에는 최도통.정포은이 있었으나 이조에는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들 뿐이었다. '이준'이 헤이그에서 붉은 피를 뿌리고, '민충정'이 서울에서 푸른 대를 올렸으나, 그것으로 가리기에는 그 허물이 너무나 컸다.
신라가 당나라에 수구렸다 하나 그래도 반도의 땅을 찿는데 힘을 쏟았고, 고려가 몽고에 굴복하였으나 나라는 지켰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라가 아주 없어지고 남의 한 개 식민지가 되어버렸으니, 5천년 역사에 먼저간 조상들이 바라볼 때 얼마나 한심한 모습이었을까! 수많은 영웅과 충절을 지키던 선조들이 지하에서 땅을치고 통곡을 하였을 것이다. 이순신의 7년 전공 23전 23승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항몽.항청을 통해 수많은 애국 충신들은 무어라 통곡하였을까? 5천년 역사에 나라 팔아먹는 일, 이런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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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필이면 일본이냐? 일본은 우리민족이 고대로 부터 바다를 건너가 구주지방에 정착한 민족의 물결이었다. 그들의 신화가 말해주고 석기시대의 유물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들에게 한자와 유교.불교를 전해주었고 대륙의 모든 문물이 우리들이 전해 주었고 그래서 임나도 나온 말이요 왜구도 그래서 긴 세월을 두고 그렇게도 반도 해안을 들락거리며 약탈과 행패를 일삼아온 집나간 자식같은 말성꾸러기 일본이었다.
우리가 고구려 이래 전래된 용맹한 기상과 상무정신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힘과 제도를 정비한 힘찬 주권을 가지고 만주를 뒷마당 근거지로 북만주와 한반도를 호령하고 일본 열도를 앞 방파제로 삼아 대국경영을 펼칠 수가 있었다면 역사는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친일.친로.친청 하며 몇십 년을 국제 매음을 하다가 우리가 길러내고 업신 여기던 섬나라 일본한테 나라를 몽땅 빼았겼으니, 이것은 마치 행랑체 머슴한테 그집 주인 아내 주부가 정조를 주고 집문서 내주면서 서방눔은 독살하고 그 머슴눔의 바지가랑이 밑에서 힘찬 밤일 즐기기를 좋아하는 창녀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
그래서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많은 민족이 해방되었으나 우리는 빠졌다. 3.1운동의 물결이 일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이었다. 세계 2차 대전을 통해 민족의 의식은 실날같이 꺼져가는 촟불같은 신세로 빠져 들고 있었다. 수많은 청년과 처자들이 전선으로 끌러가서 천황눔의 총알받이가 되고, 정선대가 되어 이팔청춘 다 썩히어 썩은 몸이 되었고, 온 반도는 먹는것 입는 것 지하지원 할 것 없이 모두가 수탈의 극을 달했다. 몽고도,중국도, 만주족도 그토록 이 땅에서 고혈을 빨아가지는 않았다. 씨를 말리고 이름을 바꾸고 모든 것을 일본눔들 제도로 바꾸려고 하였다. 36년간의 길고긴 암흑의 시대.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마지막 남은 피 한방울까지 흡혈귀처럼 빨려지게 만들었다. 이제는 빨릴 피마져도 남은게 없는 앙상한 여윈 몰골로 휘청이는 민족, 그것이 피맛이냐 ? 물맛이냐? 고통이 온 반도에 뼈저리도록 사무치게 휘몰아 쳤고, 민족은 짐을 싸서 만주로 간도로 사할린으로 고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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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마지막 단풍 |
이것으로 우리 고난의 역사 대충 보기는 끝났다. 돌아보면, 아, 아, 삼국시대 이래 그 걸어온 길이 얼마나 잔혹했나? 눈물과 피로 걸었다기보다 기었고, 기었다기보다 굴러왔고 발길에 채어왔다. 그리고 5백 년 수난도 오히려 부족하여 돌아오던 회복의 기운도 사라지고 다시 더 심한 연옥의 바닥으로 거꾸러져 내려가는 뒷모양을 보며, 아니다, 우리 자신이 그것임을 의식하면서, 그러나 그보다도 날이 장차 오면 이것이 다 뜻이 있는 한 구절이 될 줄 믿으면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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