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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29 : 조선의 역사 171 (선조실록 36) 본문
한국의 역사 629 : 조선의 역사 171 (선조실록 36)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옥포파왜병장'에 담긴 그 밖의 기록들
옥포파왜병장은 오늘날 옥포대첩에 관해서 전해지고 있는 기록 중 한.일 양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자료이다.
이순신은 윤백련 등 민간인 포로를 구출하여 그들이 그때까지 겪었던 모든 사실을 듣고 그것을 장계에 기록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것은 백성들이 어떻게 고통받고 있는지를 선조와 조정의 권신들에게 알려주는 의도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백성들이 전쟁으로 이처럼 고통받고 있는 것은 바로 무능한 조정에 대한 질타의 의미도 있을 지 모른다.
이순신은 윤백련 등 구출해 온 백성들을 순천, 보성 등지로 데리고 가서 보호하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이 소녀는 21세의 여인이 되어 있었을 것인다. 윤 소녀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그러나 이순신이 윤백련 같은 소년 소녀들을 구해내서 양육시키고, 훗날 혼인까지 시켜준 사례는 무수히 많다.
왜선들은 속도가 빨랐다.
이순신은 보고서에서 '왜선들은 빠르기가 날아가는 듯하다'고 했다. 원래 왜선들은 판자가 얇아서 날렵했다. 그래서 속도는 빨랐으나 제자리에서 화전력이나 충돌전에는 약했다. 반면에 조선 수군의 함선은 두꺼운 판자에 굵은 기둥과 나무못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신축력이 있었고 둔중하고 단단했다. 그래서 망망대해에서는 승산이 없었고 효과적인 전투를 위해서는 포구나 만 등 내해에 갇혀 있는 지형에 적 선박을 몰아넣고 탈출로를 봉쇄한 후 공격해야 했음을 알수 있다. 그래서 이순신은 이러한 이치를 이용하여 연전연승하게 된다.
이순신과 원균의 인재 경영
낙안군수 신호는 이순신에게 경상도 쪽으로 출동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반대했던 인물이다. 그는 전라좌수영 장수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경상도로 출동하여 옥포대첩에서 신호는 적의 머리 하나를 베었고 큰 배 1척을 깨뜨렸으며, 왜장의 칼, 갑옷, 의관 등을 노획했다. 이순신은 신호가 으뜸의 공을 세웠다고 여겼음인지 신호 장군의 공을 강조해 두었다. 이순신은 그를 출동 하기 전 며칠 간 특별히 설득 작업을 벌였고 결국 그의 동의를 얻어냈음인지 그를높이 평가하는 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신호 장군은 그 후로도 용감하게 싸웠고, 정유재란 때는 남원에서 정렬히 전사했다. 충무공의 인재 경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원균은 도망을 다니다가 이순신의 연락을 여러차례 받고 겨우 한산섬에 숨어 있다가 약속 장소인 당포로 나와서 이순신을 만났다. 원균의 부하들은 이틀간에 걸쳐 소식을 듣고 각자 다른 섬에 숨어 있다가 판옥선을 타고 나타났다. 그래서 원균측의 판옥선은 총 4척의 판옥선이 이순신 함대와 합류하게 된다. 이순신의 마음 속에는 원균의 이러한 행태가 같은 장수 입장에서 한심하였을 것이다. 원균은 원래 성격이나 언행을 보면 용감한 무장이었고 그를 이순신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초전에 일본군과 제대로 한 번 접전도 못하고 경상우수영이 스스로 졸지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장수와 군사들이 스스로 함선을 좌침시키고 무기와 물자를 바다에 버리고 도망치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래서 경상우수영 일대 각 진과 포구는 무인지경이 되었고 백성들은 파난가기에 바빴다.
또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달린 전투 중에 원균의 부하 장수와 군사들이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병사들에게들 활을 쏘아가면서 적의 수급을 빼앗으려 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정작 적과의 싸움에서 한 명 만이 부상을 당하였으나 이런 과정에서 2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울화통이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인은 원균과 그런 갈등 관계를 수하들을 잘 설득하여 극복하고 넘어가게 된다.
<선조실록>을 보면, 거제현령 김준민은 그 무렵 경상감사 김수의 명령에 따라 육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균은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그래서 육전에 참가하게 된 사실을 보고하고자 하였으나 원균이 계속 도망다니는 바람에 보고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김준민은 거제읍 행정관아와 원균의 가베랑 군영은 인접한 곳이었는데도 서로 간의 정보가 불통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는 관아와 군영이 따로 놀았기 때문에 원균의 가베량 본영조차도 행적적 지원을 받지 못했다.
반면에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은 순천부의 행정적 지원을 받는 체계였는데 순천부사 권준은 행정적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했으며 제2차 출동 때에는 순천부 소속 거북선을 거느리고 나와 중위장을 맡았다. 권준은 그 후에도 이순신의 오른팔 역활을 하였으며 승승장구하여 임진왜란 이후에도 중책을 맡았다가 1611년에 사망하였다.
권준(權俊, 1541~1611년)은 문신 겸 무신으로 자는 언경(彦卿), 호는 원당(元堂)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본래 문관이었으나 이순신의 휘하에서 큰 공을 세웠다.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양촌 권근의 후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다 임진왜란 당시에 순천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 배속되어 중위장으로 활약하며, 옥포대첩, 사천해전, 한산대첩, 부산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연승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 공을 인정되어 원균에 이어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통제사가 되자 사직하였다. 1592년 2월 나주목사가 되었고, 칠전량 해전에서 조선의 수군이 패한 이후 7월에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었고, 임진왜란이 이후에는 경기 방어사가 되었다. 1600년 선조의 어명으로 전마를 하사받았다.
1601년에는 충청병사에 임명되었고, 1604년 임진왜란의 전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이 책록되었고, 안창군(安昌君)에 봉해졌다. 1605년 황해병사가 되었으나 1607년 해량도 사건이 일어나 직무를 제대로 못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후 전라병사에 임명되었다가 1611년 사망하였다
이처럼 이순신과 원균의 인재경영은 천양지차이가 났고 그것은 바로 전투력의 승수효과로 나타났던 것이다. 원균의 부하 김준민은 이듬해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수전맹(水戰盲), 육전맹(陸戰盲)의 선조와 조정 문신들
세종대왕 때는 수군을 육성하여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나 섬 전체가 바위와 돌로 이루어진 척박한 섬으로 인해 점령 가치에 비해 막대한 군대 유지비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대마도주의 조공 약조만 받고 결국 조선 수군은 철수하였다. 거제도, 남해안에는 세종 때 쌓은 성들의 유적이 오늘에까지 전해져 온다. 하지만 선조 무렵에는 조정이 수전맹, 해운맹에 빠져 있었고, 때문에 부산포 앞바다, 한강, 임진강, 대동강에서 막을 수 있었던 것이나 결국 일본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였다.
또 조선은 육전맹이었는데, 당시 군사제도에 따라 주요 방어 지역에 주변 군사들을 집결시켜 조정에서 장수가 내려와서 통솔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적정에 대한 정보제공 시스템이 부재하였고 급조한 부대라 훈련도 제데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태였다 또 조정에서 장수가 제때에 내려오지 않아 대구의 경우처럼 경상도 일대의 군사들이 집결하였으나 주장이 없는 상태라 일본군의 침공 소식만 듣고도 그만 흩어져 버리거나 주요 길목의 성주나 관리, 군사들이 무기와 물자를 방치한채 도망치기에 바빴다.
또 일본군이 진격하는 주요 길목에 천혜의 장벽인 소백산맥 일대의 죽령, 조령, 추풍령 등에 군사를 배치하지 않고 적정도 모른체 급조한 오합지졸을 훈련시키다 패전한 상주전투의 이일이나 오합지졸을 거느리고 8천 기마대로 탄금대 전투에서 패전하여 전원 전사한 신립처럼 허허발판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해안에 상륙하기 전에 삼도수군을 집결시켜 부산포 앞바다에서 해상전으로 막을 수 있었던 기회도 놓치고, 한강, 임진강, 대동강 등 주요 하천선 방어 작전도 대부분의 장수들과 군사들이 군령체계가 혼란하였고 장수들의 결전의지가 부족하여 대부분 장수들이 먼저 도망치면 뒤이어 군사들도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신립도 한양에서 병력을 모을 수가 없자 소수의 병력만 데리고 충주로 내려가면서 경기, 충청도의 역마 등를 모조리 동원하여 끌고 갔고, 이에 경상, 전라, 충청, 경기도엔 파발조직이 무너졌으며, 이로인한 조정과 지방의 명령전달 체계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로인해 말할 수 없는 혼란과 통신 불능 사태가 야기되고 말았다.
또 각 섬에 목장을 두어 군마를 키우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수군이 무너지는 바람에 말들이 섬에 방치되고 있었고 효과적으로 활용하지도 못했다. 이 역시 군마 관리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육전맹인 조정 문신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왜란은 개전 초에 막을 수 있었다는 이순신의 증언이 '부원경상도장' 장계에 잘 나타나 있다.
"지난날 부산과 동래 연해안 여러 장수들이 만약 전선과 노를 잘 정비하여 바다 가득히 진을 치고 있다가 왜적의 배들을 들이칠 위세를 보이면서 정세와 힘을 잘 살피고 헤아려서 적절히 병법대로 나아가고 물러남으로써 적들이 뭍으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하는 환란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앗을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감정이 더욱 북받쳐, 원컨데 한 번 죽기를 각오하고 곧바로 왜적의 소굴을 짓이겨서 요망한 기운들을 쓸어버리고 나라의 부끄러움을 만분의 일이라도 씻고자 하옵니다. 성공과 실패, 잘되고 못되는 것이야 신으로서는 미리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옵니다."(부원경상도장, 1592. 4.30)
이 말은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하기 전에 해상에서 삼도 수군을 모두 집결시켜 해전으로 적선을 격멸하였더라면 이러한 환란을 예방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일본의 여러 차례 전쟁의 경고도, 일본을 직접 방문한 조선 통신사들의 보고도 무시하고 조정이나 변방의 군대에서는 일본군이 전쟁을 일으켜 15만 병력을 배에 싣고 부산포에 상륙할 때까지도 아무도 일본이 침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민심을 동요케 한다면서 그동안 진행해오던 전쟁준비도 중단시킨 조정이었고 임금은 왕권유지에, 조정 권신들은 파당을 이루어 권력장악에 열중하다보니 국재정세에 대해서는 외교맹, 즉 모두가 까막눈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420여년 전 조선 조정의 돌아가는 꼴이 꼭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는 것 같다. 작금의 우리 상황도 주변 4대 강대국들과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는 가운데 정치권은 진보와 보수, 여와 야, 충선과 대선 등 국론분열과 권력투쟁에 전력하고 있으며 군에 대한 불신과 천시풍조가 확산되어 있으며 국제정세는 무감각하다. 또 청와대를 비롯한 권력형 비리를 포함하여 사회 각 분야는 비리와 부패로 썩지 않은 곳이 없을 뿐 아니라 국민들의 삶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으며 비정상적인 형태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풍전등화!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이 투영되는 것 같아, 아 씁쓸하기만 하다......
충무공 항해의 특징
이순신이 1차 출동 때 당포에서 송미포(거제도 해금강 인근)까지 이동로를 보면 외항 쪽으로 돌아서 이동하였다. 더구나 오늘날에도 한산도에서 해금강 쪽으로의 항로는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파도가 거칠기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이 멀고 함난한 길을 선택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첯째, 왜군들의 눈이 띄지 않게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둘째,송미포에서 하루를 쉰다면 격군들의 피로는 쉽게 풀릴 것이므로 이튼날 남풍을 업고 순풍을 받으면서 옥포와 가덕도 쪽으로 접근하고자 했었던 것같다.
셋째, 견내량을 통과해서 가덕도 쪽으로 나가려면 견내량이 문제였다. 만약 소수의 왜선단이 잠복해 있었다면 조선 함대는 통과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조선 함대의 기습전이 노출될 수도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견내량 해협을 이용하지 않았다. 대신 여수로 귀항할 때는 견내량을 통해서 단거리로 이동했다. 거리도 가깝고 북병한 적도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간 기착지인 당포항을 지나서 직진 코스로 미조항을 지나왔다.
이처럼 이순신은 주도면밀하게 움직였고 주변 섬에 대한 수색과 정찰을 철저하게 하면서 적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면서 이동한 것이다. 전후좌우 사방에 대한 적정을 게을리 수집하고 부대를 함부로 이동하다가 적의 매복에 걸리면 그것은 함대의 전멸, 즉,죽음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고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던 이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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