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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30 : 조선의 역사 172 (선조실록 37) 본문
한국의 역사 630 : 조선의 역사 172 (선조실록 37)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평양으로 올라가는 <옥포파왜병장>
이순신은 여수로 귀항하던 5월 9일, 그 동안 기록해 둔 선상일지를 장계형으로 고쳐썼다. 그리고 5월 10일 송한련과 김대수에게 장계를 받들고 임금이 피난가 게신 곳인 행재소로 가서 임금께 올리도록 했다. 그간 왜군 추격대에 쫓겨 울면서 피난을 떠난 임금과 비빈, 그리고 무너져가는 조정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이순신은 임금과 조정 대신들에게 한시빨리 승전의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이순신은 경기도 바닷길이 왜군에게 차단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도 했을 것이다. 아무튼 장계를 올려 보낼 때 경기도의 해로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상황을 상상으로 엮어보았다.
"대첩 소식이요!"하는 소리와 함께 전라좌수영 깃발을 올리고 산탄포로 무장한 협선 2척이 강화도 해안에 접어들자 포구에는 한강과 임진강 등지에서 피난 온 어선, 상선, 화물선 수백 척이 몰려 있었다. 포구에 도착한 전라좌수영 사람으로부터 사람들은 승첩 소식을 듣자 만세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이들은 감격에 겨워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고 밤이 새도록 모닥불을 피워놓고 승전 전쟁담에 귀를 기울였다. 백성들은 그 동안 어느 때고 들이닥쳐 살육과 납치를 일쌈을 왜군들을 생각하며 기슴을 조여 왔는데, 해전에서 승첩 소긱을 듣고는 '우리도 의병으로 나서서 내 고장을 지키자!'며 결의를 다졌다. 이 승첩 소식은 사람들의 입과 바람, 파도를 타고 전국 각지로 퍼지기 시작했다.
강화도를 떠나 황해도에 접어든 송한련 일행은 연안성 근해에서 조선군을 만나 피난 조정이 평양에 있음을 전해 들었고, 육로와 수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서 평양성에 도착하였다. 평양에 도착하기까지 송한련 일행이 직접 전쟁담을 나눈 사람들은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그 결과 승첩의 해전 소식을 접한 해안지역고 내륙지역에서는 의병 봉기가 시작되었으며 이를 시작으로 의병 봉기는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아래는 조정이 <옥포파왜병장>을 받아본 무렵의 <선조실록>이다.
"5월 23일 임금은 평양에 있었다. 17일 밤을 타고 임진강을 건넜다. 좌위장 이천이 강 상류에서 왜적과 마주쳐 적에게 패하였고, 유극량은 죽었으며, 신할도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왜적은 강 하류로부터 은밀히 도강하여 강을 건너왔다." (선조실록, 1592.5.23)
임진강 방어전에 나섰던 조선군 1만 5천이 왜군의 유인책에 속아서 강을 건너가 추격하려다가 왜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당하였던 것이다. 조선군이 격파되자 임진강을 건넌 가토 가요시마의 2만 군은 철령을 넘어 함경도로 향했다. 임진강 패전과 왜군의 도강 소식을 들은 조선 조정은 눈앞이 캄캄하였는데, 바로 그 때에 이순신의 <옥포파왜병장>의 장계가 올라왔기 때문에 모두가 통곡하였던 것이다.
이때 <선조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수군을 동원하여 타도까지 깊숙히 들어가 적선 40여 척을 격파하고 왜적의 목을 베었으며 빼았겼던 물건을 도로 찿은 것이 매우 많았다. 비변사에서 표창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품계를 올려주라고 지시했다....임금의 지시에 따라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 정2품급 품계)로 품계를 올려주었다. " (선조실록. 1592.5.23)
왜란이 일어난 이후 최초로 접하는 승첩 소식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표창으로 가선대부의 벼슬을 주었다. 이순신의 장계가 도착하자 조정에서는 그때서야 해로와 수군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초보적인 단게의 논의를 시작하게 된다.
아래는 당시 조정에서 해로에 대하여 토의하던 모습이다.
윤두수(좌의정) : 어제 임진에서 얻은 지도를 보았는데, 강화 교동 등지의 물길이 거리를 자세히 적어서 왜적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인심이 이 모양이니 통분하기 짝이 없습니다.
선조 : 바다 길목에 다 척후를 보냈는가?
최흥원 : 경기 수사가 응당 해야 하는데 수사가 도망쳤으므로 다시 새로운 사람을 뽑아 보냈습니다.
선조 : 경기 수사가 정말로 도망쳤는가?
최흥원 :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도망쳤다고 하는데 그럴 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직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한준 : 신도 길에서 들었는데 수사는 군사가 패하자 강원도로 향해 갔다고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1592. 5.23)
좌의정 윤두수는 조선 사람이 해도를 그려서 왜적에게 준 것을 분개했는데, 그 자체도 문제였지만 조정에는 그 같은 해도가 없었던 시대였다. 경기 해안을 경비하고 장악해야 할 경기 수사는 행방이 묘연하였고 조정에는 지방의 정보가 거의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파발마 조직의 붕괴와 관리들이 제 살길만 강구하려 대부분 도망쳤기 때문이다. 이때 한강 방어 실패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도망쳤던 도원수 김양원이 선조에게 부원수 신각이 도망쳣다고 모함하엿다. 당시 신각은 도망치자는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한성을 방어하던 이양원의 군사와 경기도 양주에 모물고 있었는데 그곳에 도착한 함경도 군사와 함류하여 일본군 선발대 70여 명을 매복하여 전멸시킨 직후였다.
김명원의 말만 듣고 선조는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참하도록 했다.선전관이 내려간 사이 신각의 승전 장계가 도착하여 급히 다시 처벌을 중지하도록 선전관을 내려 보냈으나 이미 처형된 뒤였다. 도망친 장수의 말만 듣고 아까운 장수의 목을 벤 선조의 무능함이 극명하게 잘 드러나고 있다. 나중에 이순신의 모함도 조정의 간신배들의 말만 듣고 어리석은 판단을 했던 선조였다.
비변사에서 보고하였다.
"난을 피하여 바다로 나가 모여 있는 경강의 배가 무려 수백여 척이나 됩니다. 또 경성에서 도망쳐나온 사람들이 지금 강화, 인천, 남양, 교동 등지에 많이 들어가 있는데 이들을 불러 모은다면 장정들로 구성된 군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선조실록. 1592.5.29)
피난한 백성들의 대규모 선단이 파악되었고, 서해 해로가 열리고 있으며, 조정의 지휘체계도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6월 1일 고니사와 구로다군은 대동강 건너편에 모습을 드러내자 문신으로 구성된 선조의 조정은 기가 죽었다. 이때 평양성 수비군은 4천 명, 왜군은 3만이었다.
피아간의 직선거리는 약 1킬로미터. 만약 왜군이 강을 건너 평양성을 공격한다면 이전의 부산성과 동래성처럼 성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 문제엿다. 왕과 비빈들이 미리 성을 빠져 나간다고 하더라도 왜군 기마대에 하루 이틀 정도면 붙들릴 수 있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위기 속에서도 선조는 6월 11일까지 평양성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이유는
첯째, 전라,충청, 경상도의 근왕군 5만이 한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고 있었고(이미 6월 3일 대패했다)
둘째, 평양성을 잃으면 더 갈 곳이 없으며
셋째,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기대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게 된 선조는 "의주?, 아니면 설한령을 넘어서 강계?" 하면서 무작정 평양성을 빠져 나갔다. 아슬아슬했던 조선 왕조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6월 14일 조선군의 부주의로 도섭지를 발견한 왜군이 대동강을 도강하기 시작하자 윤두수 등 평양성 수비를 위해 남아 있던 조정의 대신들과 수비군은 왜군이 6개월 간 먹고도 남을 10만 섬의 군량미를 내버리고 도망쳤다. 이에 평양성에 입성한 왜군은 군량미로 술과 떡을 빚어 승전 잔치를 벌엿으며, 어떤 왜군은 평양 기생의 치마저고리를 입고서 왜식 춤을 추었다.
판옥선은 싸움에 이롭습니다.
임진왜란 전, 일본 해적(왜구)은 조선 수군을 상대로 싸울 때는 서양식 싸움으로 싸웠는데, 먼저 배를 접근시켜 밧줄이나 사다리를 걸쳐 연결한 다음 배를 타고 넘어와서 백병전을 전개하는 방식이었다. 16세기 당시 유럽은 물론 세계 각국의 해군들이 채택할 만큼 흔히 사용하는 해전술이었다. 그 점에서 일본도 에외는 아니었다. <중종실록>을 보면 "왜적이 칼을 빼어 들고 배 안에 뛰어들면 용감한 군사가 아무리 많아도 당해낼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임란 당시에도 일본 수군은 그런 방식으로 접근전을 펼쳤다. 그것은 일본군이 거듭된 내전으로 칼을 들고 싸우는 데에 조선군 보다 강했던 것이 그 원인이 있었다. 그런 접근전을 펼치는 일본군에 대해 조선 수군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성종실록>에 실린 신숙주의 말은 그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신이 왜선을 보건대 판자는 매우 얇은데다 쇠못을 사용하였고 배 밑은 좁고 위는 넓으며 양단은 첨예하기 때문에 경쾌해서 왕래는 편리합니다. 그러나 배가 동요하면 못 구멍이 넓으져 물이 새고 썩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군선은 몸집이 무겁고 크나 나무못을 사용하여 나무못은 습하면 더 빽빽해지고 선체는 튼튼하고 치밀하여 10년을 쓸 만합니다. 또 왜선보다 3분지 1이나 높아 싸움에 이롭습니다.
신숙주에 따르면 일본 함선은 판자가 얇고, 쇠못을 사용하며, 배 밑은 좁고 위는 넓은 모양의 V자형이며, 속도가 빠르나, 쇠못을 사용하여 내구성이 떨어지고 부식된다. 그에 비해 조선 함선은 몸집이 무거워 속도가 떨어지나, 나무못을 사용하여 나무못이 바닷물에 불어서 함선의 이음매가 더 튼튼해지며, 선체가 튼튼하고, 일본 함선에 비해 3분지 1이나 높아 전투에 유리하다고 했다.
신숙주는 성종에게 조선과 일본 함선의 장점과 단점을 간결하고도 정확하게 지적했다. 하지만 성종의 즉위 기간이 1459~1494년이므로 임진왜란이 발생한 1592년과는 100년 정도의 시차가 있다. 그 기간 동안 삼포왜란 등 여러 왜변을 겪으면서 조선 함선에는 물론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신숙주가 일본 함선이 경쾌하다고 말한 것에 주목해보자. 당시 일본 해적들이 조선 연해안을 습격하여 약탈하는 것이 조선에게는 큰 골치거리였다. 일본 해적은 조선군이 오기 전에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했고 해적선은 속도도 빨랐다. 그러나 조선 수군의 함선은 위에서 말한대로 몸집이 크고 속도가 느려 일본 함선을 발견하고 추격에 나서도 일본 해적선을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일본 해적선의 빠른 속도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여기서 조선 수군 함대의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수군은 일본 해적선처럼 '비거도선'이라는 소형선을 군선으로 할용했다. 비도거선은 당시 어로 활동을 위해 만든 소형 선박이었다.
그러나 비도거선에도 문제점이 있었다. 속도는 빠르지만 선체가 작아 해적 토벌에 필요한 군사와 무기를 충분히 실을 수가 없었다. 해적선을 추격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막상 추격하고 보면 군사와 무기가 적어 황당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백병전에 강한 일본 해적이 오리혀 우리 소형 함선으로 넘어와서 조선 수군을 제압해 버렸다.
그래서 다시 함선 개조론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백병전을 위한 군사와 무기를 넉넉히 실을 수 있도록 함선의 선체를 키웠다. 또 포를 높은 곳에서 발사할 수 있도록 선체 위에 판옥 구조물을 추가로 설치했다. 결과적으로 포가 3층의 높은 곳에 있어 포의 사정거리와 명중률을 높일 수가 있었고 2층에 있는 노젓는 군사와 활 쏘는 군사의 안전성도 향상되었다. 하지만 함선이 커지면서 다시 속도가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의 함선은 선체가 크고 육중하게 바뀐 반면, 일본 함선은 여전히 빠르고 가벼운 상태였다. 하지만 이 기본적인 차이로 인해 조선과 일본의 함선은 전투력에서 막대한 격차를 보였다.
첯째, 함선의 내구성 차이다.
이는 강도의 차이로 이어지는데 앞에서 신숙주가 이야기 한 것처럼 일본 함선은 근본적으로 조선 함선에 비해 강도가 약했고 이는 전투력의 차이로 나타났다. 바로 포의 장착 가능성 여부 때문이다. 일본 함선은 포를 발사할 때의 충격을 견딜 만한 강도가 없어 포를 장착하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일본 함선 대형선에는 포가 겨우 1~2문 정도만 장착이 가능했고 포의 구경도 3센티 미만이었다. 기타 너머지 함선에는 아예 없었다고 보면 된다.
반면 강도가 강한 조선 함선에는 구경 13센티미터, 사정거리 500미터나 되는 천자총통을 여럿 장착이 가능하였고 기타 지자총통, 현자포, 황자포 등 구경이 적은 포와 사거리가 200~300미터 나가는 포를 여럿 장착이 가능했다. 따라서 접근전을 벌일 때 조선 함대는 사거리가 먼 천자총통부터 사격을 하면서 접근하면서 나머지 사거리가 가능한 구경이 작은 여러 포를 이어서 계속 사격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막상 접근전을 벌일 시점 쯤에는 선체 충돌로 일본 함선을 박살내거나 아니면 일본 함선은 이미 침몰하고 있거나 불에 타고 있거나 군사는 태반이 이미 불에 타거나 죽거나 부상당한 상황에서 전투력이 심각하게 손상된 상태에서 조선 수군을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둘째, 형태의 차이다.
일본 함선은 V자형 형태로 속도가 빨라 원거리용에 적합한 반면 U자형 형태의 조선 함선은 속도가 느려 근거리용으로 보면 된다. 조선 함대의 느린 속도는 전함으로서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 있었으나 실제 임진왜란에서는 해안에 가까운 근해에서 대부분 전투가 벌어졌으므로 별다른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또 일본 함선은 V자 형태로 밑이 뽀족하여 선회할 때 회전반경이 컸다. 반면 조선 함선은 U자 형태로 밑이 평평하여 제자리에서 회전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서 전투 때 선체를 신속히 돌릴 수 있었다. 이 차이는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좌우측 선체의 화포를 집중적으로 사용이 가능하였고 다양한 작전을 신속하고 변화무쌍하게 전개할 수 있었다.
셋째, 높이의 차이다.
조선 함선은 기존의 함선 위에 한 층을 더 올려서 결과적으로 3층 구조가 되었지만 일본 함선은 여전히 2층 구조였다. 따라서 조선 함선은 일단 높이의 차이에서 일본 함선을 압도할 수 있었다. 전투 때 조선군은 높은 곳에서 일본군을 아래로 바라보며 무기를 사용할 수 있어 명중률이 높았고, 백병전을 구사하는 일본군의 접근을 막기도 쉬웠다.
넷째, 노의 차이이다.
일본 함선에 단 노는 서양형이었지만 조선 함선에는 한국형 노를 달고 있었다. 텔레비젼의 사극 등에 등장하는 예전의 노는 오늘날 우리가 한강이나 유원지에서 볼 수 있는 보트에 사용하는 노와는 전혀 다르다. 앉아서 젓는 노가 아니라 서서 젓는 노, 그것이 한국형 노이다.
앉아서 상체만 이용하는 서양형 노와는 달리 한국형 노는 선 채로 온몸으로 젓는 것이어서 강력한 추진력을 낼 수 있다. 또 좌우 일렬로 배열된 서양형 노는 함선을 회전시킬 때 회전 각도가 커서 상당한 시간과 힘이 들지만 한국형 노는 밀고 당기는 방향을 다르게하고 노마다 추진력을 다르게 하면 함선을 신속하게 회전이 가능하다.
한편 서양형 노는 함선의 좌우로 뻗어 있어 적함과 충돌하면 노가 부러지거나 깨지기 쉽다. 그에 반해 한국형 노는 물속에 잠긴 채 함선의 뒷쪽을 향하고 있어서 충돌해도 부러지거나 깨지지 않았고 적함과 붙어 있어도 노를 저을 수 있었다. 조선 함대가 튼튼한 본체를 이용하여 적함을 들이받는 충돌 전술을 펼칠 때 한국형 노는 대단한 장점을 발휘했다.
조선 함대의 특징인 U자 형태와 노의 장점은 이순신이 '한산대첩'에서 학익진을 펼칠 때 그 진가를 보였다. 후퇴하는 척하면서 일본 함대를 바다 한 가운데 유인 후 선체를 회전하면서 적의 함대를 학의 날개에 속에 가두어 궤멸 작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조선 함대의 우수성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실전에서는 지휘관의 전술, 군사들의 훈련 정도와 사기, 전투기술 및 숙련도, 기후 및 기상 등 제반 요소가 복잡하게 작용하여 전투의 흐름이 결정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고려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단순히 함선 측면만 중점적으로 가상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 수군이 먼 바다에서 접근하는 일본 함대를 척후선에 의해서 탐지한다. 적 함선이 사정권에 들어오자 먼저 사거리가 먼 천자총통을 무차별 발사한다. 강력한 조선 함대의 포에 상당수의 함선을 잃은 일본 함대는 후퇴하게 된다. 빠른 일본 함대는 조선 함대의 추격을 따돌리고 도망치면서 이 전투는 조선 수군의 승리로 싱겁게 끝난다.
그러나 일본 수군 장수의 전투 의지에 따라 계속 공격하여 사생결단 접근전을 펼치기를 기도하면서 조선 함대에 접근했다. 쌍방이 200~300미터 어느 정도 접근하자 일본 함선에서는 조총이 발사되었고 조선 함선에서는 지자총통, 현자총, 황자총, 발화탄, 불화살, 화살 등을 적진에 쏟아 부었다. 그러나 조총은 사거리가 50~100미터로 조선 함선에 미치지 못하기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일본 함선의 소형 총통이 발사되었지만 소수에 불과하여 조선 함선에 별다른 피해를 유발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일본 함선에서는 선체 갑판과 적병들은 불이 붙어 불에 타거나 선체를 이탈하는 등 아수라장으로 변하게 된다.
서로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3층 높이의 조선 함선의 장점이 발휘되었다. 적은 위를 보면서 조총을 쏘지만 주선 수군은 아래를 보며 적에게 화살을 발사했다. 조선 수군의 명중률은 상당히 높았지만 일본 수군은 헛되어 조총 탄환만 낭비하는 격이 되었다. 이 때도 조선 함선의 포는 계속 일본 함선에 대하여 가공할 화력을 퍼부었다.
양쪽의 함대가 더욱 가까워지자 일본 함대의 수장은 그들의 장기인 백병전을 펼치기 위해 그나마 남은 군사를 독려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에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규모도 크고 선체도 튼튼한 조선 함대는 속도를 줄이기는 커녕 더 빠르게 돌진하면서 이미 조선 함대의 포격으로 넝마가 된 일본 함선을 그대로 들이받아 부숴버렸다.
후위 일본 함대는 그들의 선봉 함선들이 조선 함의 충돌 작전에 산산 조각이 나자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하기 위해 선체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 함선은 선체를 돌릴 때 회전반경이 컸고 설상가상으로 서양형 노를 달고 있어 회전 각도를 크게 잡아 먹는 바람에 마음이 급한 일본 수군은 더욱 당황했다.
일본 함대가 선체를 돌리는 데 애를 먹는 사이에 조선 함대는 다음 목표점을 향해 신속하게 선체를 회전하고 포와 화살을 무자비하게 날리면서 돌진해 들어갔다. 조선 함대는 일본 함대 근처에 다가가서도 육중한 선체를 멈출 기세가 전혀 아니었다. 조선 함대의 충돌 작전에 일본 함선은 종잇장처럼 부서지곤 하였다.
판옥선의 판(板)은 '판자' 또는 '널빤지'를 뜻하고, 옥(屋)자는 '집' 또는 '지붕'을 뜻한다. 판옥선은 기존의 함선에 널빤지로 집처럼 한층 더 쌓아올린 함선이라고 보면 된다. 판옥선의 크기도 조금씩 달랐는데, 학자들은 지휘관 탑승용 판옥선은 탑승인원 164명, 노 18자루였고, 일반 판옥선은 인원 125명, 노 12~14자루였으며 포는 좌우 각각 10문 정도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선조실록> 1606년 12월 24일 기록에는 "거북선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활 쏘는 군사와 노 젓는 군사의 숫자가 판옥선의 125명보다 많고 활을 쏘기에도 불편합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협선은 협(挾)은 '끼다'라는 뜻으로 '끼인 배'를 말한다고 볼 수 있는데, 판옥선이 옆에 끼고 다니는 적은 배라고 생각하면 된다. 협선은 전투함인 판옥선에 배속되어 물자, 인원 등의 수송에 쓰이거나 정찰, 연락을 담당하던 5인승 초소형 군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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