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우면산의 여름 7 : 민족의 불행 한국전쟁, 호국보훈을 생각하며...3 본문
우면산의 여름 7 : 민족의 불행 한국전쟁, 호국보훈을 생각하며...3
|
|
조선의 눈물은 계속된다.
일제는 청.일전쟁,노.일전쟁의 결과 전승국이 되어 단독으로 조선을 차지하는 우선권이 주어졌다. 일제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고종은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하나 조선은 결국 친일 5적에 의해 일제에 합방당하는 비운의 종말을 고하게 된다.
2. 일제 강점 36년
일제 강점하 36년간 조선은 삼천리 금수강산이 난도질 당하고 산마다 쇠못이요, 젊은 충각.처녀들은 총알받이로 정신대로 전쟁터로 끌려가고, 군수공장. 탄광으로 끌려갔다. 숫가락.젓가락.오강단지까지 공출당하는 수탈의 세월을 당하였다. 철도.광산개발 미명하에 수목은 모조리 절단되어 목재로, 전국의 평야에서 생산되던 쌀은 모조리 공출되어 인천, 군산, 목포, 부산, 원산 등지에서 일본으로 실려갔다. 수많은 왕릉이 도굴되고 값진 문화재는 몰래 밀반출시킴은 물론 조선 반도의 모든 물자를 모조리 수탈해 가져갔던 일제였다.
약삭빠른 조선눔을 일본순사의 앞잡이로 고용하여 권문세가, 사대부 집안, 대부호를 수탈하고 국내잠입 독립투사를 체포.처형하는데 앞장섰다. 친일인사들이 일본 헌병과 경찰에 아부하여 부자들의 농지를 약탈하고 문서를 없애는 등 수없는 범행을 저질렀다. 이에 백성들은 도저히 살 수 없어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간도로 시베리아로 떠났다.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이름도 모르는 곳으로 수 많은 고려인들이 끌려가서 황무지에 내버려지고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동사하거나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으며, 그래도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고 고향을 그리워 하면서 언젠가는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두만강 푸른물에 노젖는 뱃사공...'라는 노래를 불렀다.
일제치하 동안 천만이 넘는 남여 젊은이들이 이역땅에서 이슬처럼 사라져 갔으며 안중근의 하얼빈 쾌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으나.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몸부림에 불과하였고 대동아전쟁을 벌인 일제는 눈에 불을 켜고 조선반도에서 수탈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36년간 통한의 세월을 보내면서 친일파는 고려 시대 몽고군에 빌붙어 조정을 능멸하던 눔들처럼 앞잡이가 되어 독립군, 항일지사를 포함하여 앞장서서 체포.구금.고문은 물론 학살까지 자행한 민족반역자들이었다. 우리들의 할아버지가 친일파였고 일본군 오장이었고 일본 순사 밀정이었다. 우리들의 할머니가 정신대였고 일본눔 씨받이가 되었으며 성노리개였다는 이야기다. 우리들의 할아버지가 항일투사였고 독립군이었으며 일본군으로 끌려가 이름모를 동남아 어느 땅에서 전사하였고 사할린을 포함한 여러 탄광으로 끌려갔으며 731부대 시체해부 대상이 되어 이슬처럼 사라져 갔다는 이야기다.
친일파들은 일제가 그렇게 빨리 망할 것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 말기 몽고군이 그렇게 허망하게 명의 주원장에게 쫓겨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몽고 앞잡이들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의 일제 앞잡이 노릇이 천년만년 갈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태평양 전쟁은 자원 고갈과 물량 부족에 시달리던 일제가 미군에 점점 밀리면서 나중에는 자폭공격을 감행하는 등 이슬람의 지하드 같은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자행하였으니 태평양 바다 속에서 잠들어 있을 그들이 값없는 허망한 죽음에 얼마나 원통해 하고 있을까? 그들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할 뿐이다.
그래서 일제는 태평양에서 미드웨이 해전 이후 미군에 계속 밀리면서 전세는 역전되어 갔으니 미군의 본토 상륙에 대비하여 끝까지 결사항쟁을 준비하던 중, 일제는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원폭 두 방에 두 도시가 초토화되고 수십만 인명이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자 결국 무조건 항복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일제의 식민지로 지구상에서 나라가 사라질 뻔 하였던 조선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 뜻밖에 감격스런 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3. 해방
1945년 8월 15일 민족의 염원이던 독립은 되었으나 38도선을 기준 남북으로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하여 진주한 소련군과 미국에 의해 반도는 절단되고 북에는 김일성, 남에는 이승만이 각각 괴뢰정권을 수립하여 자신들이 조선반도의 대표주자들이라고 나섰다.
당시 미군과 소련군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관동군은 소련이, 기타 대본영 소속 군대와 본토는 미군이 무장해제 하기로 약조되었다. 그런데 북한 지역에 주둔하던 대본영 직속 일본군 17사단이 해방 며칠 전 소련군 진주에 대바하기 위해 17사단을 대본영 소속에서 관동군 소속으로 예속 변경을 하여 버렸고 그 바람에 북한 지역이 소련군의 무장해제 지역에 편입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안타까운 사건은 우리 민족에게 남북 분단이라는 불행을 잉태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으며 일본눔들은 두고두고 몸서리칠 정도로 우리 민족의 영원한 원수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한편, 김구 선생을 비롯한 상해임시정부 요원들은 이승만과 미군에 의하여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며, 모든 정치적인 주도권은 미국에서 활약하던 이승만에게 넘어가고 이승만은 정권창출과 군대양성을 위하여 일제하 친일 인사들을 다시 대거 등용하여 행정체제를 구축함은 물론 국방경비대를 급편하면서 일본군 출신 친일파들을 대거 기용하게 된다.
해방 후 5년 동안 남한은 피나는 권력투쟁의 암울한 기간동안 김구 등 수많은 인사들이 저격, 암살, 살해되고 이승만 정권이 자리메김이 점점 가시화 되자, 연일 '북진통일' 외치는 이승만에게 미군은 한국 군대의 편성과 무장에 소극적인 반면, 북의 김일성은 소련 군사고문관 및 군수물자, 장비, 무기 등을 지원 받았고 중국은 국공내전 이후 남아 도는 공산군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고 그래서 북한의 지원 요청에 조선족과 중국 공산군 및 팔로군 출신들을 대거 북한으로 보냈다. 김일성은 그들을 주력으로 편성하여 북한군을 편성하고 소련제 T-34 최신예 탱크 등으로 무장된 북한군을 38도 선 전역에 배치하고 '남조선 해방'이라는 미명하에 1950년 6월25일 새벽 남침을 개시하게 된다.
여기서 요즘 우리 젊은이들이 아직도 한국전쟁은 물론이고 남침인지 북침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잘 모른다고 한다. 머리에 붉은 사상이 불든 전교조 선생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교육받은 불행한 세대들이다. 자료와 문서를 제대로 찿아서 스스로 역사 공부하지 못하는 우리 후손들의 어리석음이다. 그래서 한국전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상세하게 피력하고자 한다.
4. 전쟁발발과 북의 남침전략
당시 북한군의 전략은 개성-문산축선, 동두천-의정부 축선, 철원-포천 축선, 화천-춘천 축선, 동해안 축선 등 5개의 주공격로로 선정하고 개성-문산축선은 한국군을 고착.견제하면서 동두천-의정부 축선, 철원-포천 축선의 주력으로 하여금 한수이북에서 한국군을 1차적으로 이중포위.격멸하고, 화천-춘천 축선의 주력으로 하여금 화천-춘천-지평리-수원.오산 방향으로 진출하여 한강이남에서 2차 포위망을 구성하여 한국군의 주력을 조기에 섬멸하고, 3단계로 태백산맥을 통하여 침투한 침투부대와 해상침투부대 등과 협공하여 남한 전지역을 가장 빠른 시간내에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남한에는 남로당 잔당들과 좌경화 인사들이 군대와 정계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으며 여순반란, 제주 4.3폭동, 대구.서울 등지에서 좌익 폭동이 빈발하였으며 북한군이 남한에 진주하면 남한 전역에서 동조세력이 총궐기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5. 한국군의 초기대응
한국군 총참모장 채병덕 장군은 일제치하 병참장교로 근무했던 사람으로 전략.전술은 물론 기동전을 전개하는 북한군의 공격에 축차적인 병력을 투입하는 등 우를 범하면서 개성-문산 축선, 동두천-의정부 축선, 철원-포천 축선은 적 전차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전선이 밀리면서 계속 후퇴하였고, 축차적으로 투입된 한국군은 소총과 수류탄으로 적 탱크와 맞서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국군의 방어계획도 구체적으로 수립된 상태도 아니였으며 후방에서 올라오는 부대를 순차적으로 전선에 투입시키에 바빴고, 적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적의 의도도 몰랐고 병력규모나 포위전술도 몰랐다.
한국군에게는 전차는 한대도 없었으며 제대로 된 대전차 무기도 없었다. 오로지 소총과 수류탄, 화염병이 전부였다. 전선에 투입된 수많은 젊은 병사들이 처음보는 괴물같은 적 전차 앞에서 낙엽처럼 쓰러졌고 적 전차는 파죽지세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오고 있었으며 서울 함락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당시 한국군 선무대는 서울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서울 시민들에게 집에서 나오지 말도록 방송하면서 아군이 적을 물리치고 북진을 하고 있다는 등 거짖말로 시민들을 안심시키려 하고 있었다.
화천-춘천 축선은 아군 6사단의 춘천남쪽 고개에서 선방하고 있었다. 그러자 적은 수원 이남에 목표를 둔 2중포위 시도가 지연되자 해당 군단장을 교체하는 등 춘천 지역 전선을 독려하였지만 춘천 지역의 아군 6사단은 효과적인 방어전투로 적의 기도를 분쇄하면서 전선조정을 위해서 남쪽으로 서서히 후퇴하였다. 한편 동해안 축선은 태백준령으로 침투한 침투부대와 해상침투부대가 7번 국도를 다중으로 차단하자 전선은 남으로 계속 밀리고 있었다.
멀리 한강 철교가 보인다
6. 서울 점령
미아리 고개를 넘은 적 전차 수대가 서울시내로 진입하자, 정부의 선무 방송에 마음 놓고 있던 시민들은 북진한다던 국군은 커녕 인민군 전차가 서울에 갑자기 나타나자 수도 서울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갑자기 수많은 서울 시민들은 황급하게 남쪽으로 피난을 가기 위해 한강대교 일대로 몰려 들었다. 당시 한강대교 폭파 임무를 맡은 아군 공병장교는 시민들이 계속 한강대교를 건너오는 상황이고 시민들에 섞여 침투한 적 침투부대에 의해 폭약과 도화선이 해체되거나 절단되는 문제를 우려하여 상부의 폭파지시를 받으려고 수차례 시도하였으나 상부 지휘관들과 무선교신은 물론 연락이 되지 않자 책임장교는 아군의 주력부대가 미쳐 빠져나오기도 전에 한강대교는 다리위 시민들과 같이 천지를 진동하는 엄청난 폭음을 내며 폭파되었다. 전후 한강대교 조기폭파 문제로 공병감이 총살형에 처해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된다. 수많은 시민과 아군 주력부대는 지리멸렬 상태로 모든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맨몸으로 한강을 헤엄쳐 건너고 있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면산의 여름 8 : 민족의 불행 한국전쟁, 호국보훈을 생각하며...4 (0) | 2012.06.28 |
---|---|
한국의 역사 630 : 조선의 역사 172 (선조실록 37) (0) | 2012.06.28 |
한국의 역사 629 : 조선의 역사 171 (선조실록 36) (0) | 2012.06.27 |
우면산의 여름 6 : 민족의 불행 한국전쟁, 호국 보훈을 생각하며...2 (0) | 2012.06.26 |
한국의 역사 628 : 조선의 역사 170 (선조실록 35) (0) | 2012.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