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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99 : 조선의 역사 141 (선조실록 6)

두바퀴인생 2012. 5. 28. 04:10

 

 

 

한국의 역사 599 : 조선의 역사 141 (선조실록 6)

 

                        

                        

   
▲ 의인왕후릉(왼쪽)에서 본 선조의 능.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이 둘러쳐져 있고,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된 병풍석이 있으며, 난간석과 혼유석 등 전형적인 석물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1. 문치주의자 선조의 등극과 붕당정치 시대의 도래(계속)

 

선조는 흔히 임진왜란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왕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명종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외척정치를 없앴으며 신권 중심의 정치를 구현한 뛰어난 왕이었다고 판단된다.

 

명종시대까지는 역모에 버금가는 행위로 간주되던 붕당 행위를 선조는 정치적 개념으로 적극 수용해 보다 발전적인 당파정치로 이끌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이러한 붕당정치가 과도기적 양상을 띠고 있었기에 다분히 혼란상을 야기시켰고, 여기에다 임진왜란이 겹쳐 그의 의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어쨌던 선조가 구상했던 당파 중심의 신권정치는 근대적인 정치 형태인 의회정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당파싸움에 의한 국력의 약화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는 시각도 당시 조선 사회와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한 데서 오는 해석상의 오류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선조의 정치적 안정을 위한 노력으로 당시 사회는 명종시대에 비해 비교적 안정된 상황이었 때문이다. 따라서 임진왜란의 근본 원인을 조선 국내에서 찿기보다는 일본의 국내 상황에서 찿는 것이 옳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의 당쟁싸움과 국론분열, 그리고 국방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왜군에게 수군을 제외하고는 초전에 방어체계가 대부분 붕괴되고 말았다는 점도 임진왜란을 유발하게 된 원인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 일본은 이른바 전국시대를 막 끝내고 통일을 이룬 시기였지만 아직까지 지방에서 제후 세력들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로서는 제후 세력이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외부와의 전쟁을 통해 그들의 힘을 축소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시대를 통해 획득한 전술적 능력을 외부로 표출하여 민심을 하나로 묶으려는 의도를 노골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획책한 것이 중국 대륙 진출을 명분으로 한 조선의 침략이었다.

 

 

 

2. 선조의 가족들

 

선조는 총 8명의 부인에게서 14남 11녀의 자녀를 얻었는데, 정비 의인왕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으며, 계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포함해 1남 1녀, 공빈 김시가 광해군과 임해군 등 2남, 인빈 김씨가 4남 5녀, 순빈 김씨가 1남, 청빈 민씨가 2남 3녀, 정빈 홍씨가 1남 1녀, 온빈 한씨가 3남 1녀를 낳앗다.

 

이들 중 의인왕후, 인목왕후 두 왕비의 삶을 약술하고 선조의 아들 중에 적출인 영창대군과 서출 중 광해군과 왕위 계승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던 임해군, 신성군과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 등을 다룬다. 선조 가족들에 대한 기록에 앞서 참고로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이초의 삶을 간단하게 언급하도록 하겠다.

 

 

덕흥대원군 이초(1530~1559년)

중종의 아들로 창빈 안씨 소생이다. 1530ㄴ녀에 태어낫으며 이름은 초, 자는 경패이다. 1538년 덕흥군에 봉해졌고, 1542년 정인지의 손자인 판중추부사 정세호의 딸과 혼인하였다.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 등 세 아들을 얻엇으며 1559년 30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이후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그의 셋째 아들 하성군 균이 즉위하여 조선 제14대 왕 선조가 되었고, 1570년 덩흥대원군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기도 의정부시 수락산에 있다.

 

 

의인왕후 박씨(1555~1600년)

번성부원군 박응순의 딸이며, 1555년에 태어났다. 1569년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였으나 몸이 허약하여 아이를 낳지 못했다. 1600년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능은 목릉이며 산조와 함께 묻혀 있다.

 

 

 

인목왕후 김씨(1584~1632년)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1584년에 태어났다. 1600년 의인왕후가 죽자 1602년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영창대군을 낳았다.

 

이 당시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였던 유영경은 적통론에 입각하여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선조가 급서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게 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들은 왕통의 취약성을 은페하기 위해 선조의 첯째 왕자인 임해군을 제거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페서시킨 뒤 살해했다. 또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고, 인목오아후를 페비시킨 다음 서궁으로 유폐시켰다.

 

대북파의 의견에 따라 저지른 광해군의 이 같은 패륜 행위는 정변의 구실을 주게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광해군은 폐위되고 인목왕후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 최고의 어른 위치에 있으면서 가끔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훈민정음으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후 1632년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의 소생으로 영창대군 외에 정명공주가 있다. 금강산 유점사에는 그녀가 친필로 쓴 <부문경> 일부가 전해지고 있으며, 인목왕후 필적의 첩이 남아 있다.

 

죽은 후 선조와 의인왕후가 묻혀 있는 목릉에 묻혔다.

 

 

영창대군(1606~1614년)

선조의 14명 아들 중에 유일한 적출이며 인목왕후 김씨의 소생이다. 1606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의다.

 

왕비에게서 태어난 유일한 적출이고 또 선조가 늦은 나이에 낳은 까닭에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선조는 이지 세자로 책봉되어 있던 광해군을 페하고 그를 세자로 책봉할 생각을 품엇다. 여기에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북파의 유영경 등은 선조의 생각에 부응하여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급서하는 바람에 이것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선조는 죽으면서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잘 돌봐달라는 유교를 남겼는데, 이 유언은 오히려 영창대군을 궁지로 몰아넣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그들은 선조의 유교를 염두에 두고 영창대군을 경계하였다. 그러던 중 161`3년 소양강을 무대로 유흥을 즐기던 서양갑, 박응서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옥에 갇힌 이른바 '7서의 옥'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이이첨 등은 그들이 역모를 위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김제남이 이를 주도했다는 진술을 유도한 후,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유배하는 한편 김제남은 사사시켰다.

 

영창대군이 강화도에 유배된 후 조야에서는 끓임없이 그를 구원해달라는 상소가 이어졌다. 그러나 1614년 봄 이이첨 등의 밀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영창대군은 살해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아홉 살이었다.

 

이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관작이 복구되었다.

 

 

임해군(1574~1609년)

선조의 서출 장남으로 공빈 김씨 소생이다. 1574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진이다.

 

적출은 아니었지만 세자 책봉 당시에 선조에게 적자가 없었기에 그가 당연히 세자가 되어야 했지만 성질이 난폭하고 군왕의 기질이 없다 하여 책봉되지 못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명에 의해 근왕병을 모집할 목적으로 함경도로 갔다가 반란군이었던 국경인 일당에 의해 역류되었다가 왜장 가토에게 넘겨졌다. 이후 몇 번에 걸쳐 이송되다가 겨우 석방되어 한양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원래 성질이 포악한 데다가 포로로 잡혔다는 굴욕감에 사로잡혀 그 정도가 날로 심해졌다. 그래서 그 분을 삭이기 위해 술로 세월을 보냈고, 툭하면 상민을 구타하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한편 왜장 가토는 그가 포로로 있을 때의 신분과 친분을 이용해 여러 차례 그에게 서신을 띠워 내정을 탐지하려 했다.

 

임진왜란 후 1603년 사옹원도제조가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세자 봉작에 대한 서얼 문제가 명나라에서 다시 거론되어 현장 실사를 위하여 사신이 파견되었는데, 이 때문에 임해군이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다 하여 대북파의 주청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이이첨 일파에 의해 살해되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복작 신원되었다.

 

 

신성군(1574~1592년)

선조의 넷째 아들이며 인빈 김씨 소생으로 1574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후, 한성부우윤 신립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인빈 김씨가 선조의 총애를 받을 당시에 태어나 부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세자의 물망에 오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중 피난을 가다가 병사하였기 때문에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다.

 

 

정원군(1580~1619년)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인빈 김씨 소생이고, 신성군의 동복동생이다.

 

1587년 정원군에 봉해졌으며 좌찬성 구사맹의 딸과 결혼하여 능양대군, 능원대군, 능창대군 등을 얻었다.

 

임진왜란 중 왕을 호종하였으며 공으로 호성공신 2등에 붕해졌으며, 인조반정으로 아들 능양대군이 왕이 되자 한때 대원군에 추존되었다가 많은 논란 끝에 다시 왕으로 추존되어 묘호를 원종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때 그의 부인 구씨는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능은 장릉으로 경기도 김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