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597 : 조선의 역사 139 (선조실록 4)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597 : 조선의 역사 139 (선조실록 4)

두바퀴인생 2012. 5. 26. 04:01

 

 

 

 

한국의 역사 597 : 조선의 역사 139 (선조실록 4)

 

                        

   
▲ 의인왕후릉(왼쪽)에서 본 선조의 능.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이 둘러쳐져 있고,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된 병풍석이 있으며, 난간석과 혼유석 등 전형적인 석물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1. 문치주의자 선조의 등극과 붕당정치 시대의 도래

 

명종이 죽고 그를 이을 후사가 없자 중종의 서손인 하성군이 왕위를 이어받음으로써 조선은 이른바 방계 승통 시대(서출 왕위 계승 시대)를 열어나갔다. 이로 인해 외척 중심의 척신정치가 사라지고 사림 세력이 중용되어 붕당정치 시대가 도래했다. 이는 곧 신권중심의 정치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조선 정국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선조는 중종의 정비가 아닌 후궁인 창빈 안씨의 소생 덕흥군 이초의 아들이다. 중종은 모두 9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장경왕후와 문정왕후 등 정실에게서 인종과 명종을 얻었으며 나머지 후궁들에게서 7명의 왕자를 얻었다. 덕흥군은 그들 서자 중에서 막내뻘인 일곱째였다.

 

덕흥군에게는 하성군 외외에도 하원군, 하릉군 등 2명의 아들이 더 있었으나 명종은 셋째 아들인 하성군을 각별히 좋아하여 자주 대궐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그의 부인 인순왕후 심씨는 명종의 유명과 종실의 천거에 의해 하성군을 양자로 받아들이고 명종이 죽고 16세의 하성군이 왕위를 잇자 수렴청정을 했다.

 

선조는 1552년 명종 7년 생으로 덕흥대원군와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슬하의 3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균이었으나 개명하여 공으로 바꾸었으며, 명종의 총애를 받아 어린 나이에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1567년 6월 16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 제14대 왕으로 등극했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이유로 즉위 초에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선조가 어린 나이에도 정사 처리에 능숙하고 친정할 능력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이듬해 17세가 되던 나이에 편전을 넘겨주었다.

 

그는 즉위 초년에는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고 매일 경전에 나가 정치와 경사를 토론하였으며,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하였다. 이에 따라 성리학적 왕도 정치의 신봉자가 되었으며, 정계에서 훈구, 척신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또한 당시 성리학의 거두로 일컬어지던 이황과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기고 극진히 대우하였으며, 심지어 이황이 죽었을 때에는 3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기도 했다.

 

선조는 친정을 하게 되자 가장 먼저 과거제를 개편하여 현량과를 다시 실시하였다. 그리고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증직하고 이후 억울하게 화를 당한 사림들을 신원하였다. 반면에 그들에게 화를 입힌 남곤 등의 관작은 추탈하였다. 또한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유관을 죽이고 녹훈의 영전을 받았던 이기, 윤원형 등을 삭훈하였다. 이로써 민심이 안정되고 정계는 사림이 득세하여 한때 문치의 깃발 아래 조정은 평화를 되찿았다.

 

그러나 이황. 이이 등 조선 시대 최고의 우수한 대학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교적 왕도정치를 펼치던 유능한 군주였던 선조의 이러한 다방면의 노력과 더불어 사림을 중용한 조정은 이제 사림들끼리 학맥, 인맥에 따라 파벌이 갈리어 정권 투쟁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정국의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훈구.척신들이 조정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정권을 장악한 사림은 당시 문명이 높았던 선비 김효원과 명종 비 인순왕후 심씨의 동생 심의겸과의 대립으로 학맥.인맥에 따라 분당되는 사태에 직면했고, 이후 사림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리되어 당파 싸움을 지속하게 되었다. 이는 유교적 이론에 따라 군자의 당인 당파를 조성하여 정치적 견해에 대해 서로 견제하고 합의하며 조정의 중론을 이끌어 가려는 선조의 정치철학이 의도되어 있었다. 그래서 선조는 은근히 당파를 조성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대학자들이 이끌던 당파도 군자의 당이 아닌 소인배의 당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동인에는 주로 주리철학적 도학정치를 펼친 조식과 이황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가, 서인에는 주기철학을 주장했던 이이와 성혼을 추종하는 기호학파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학맥과 인맥에 따라 영남학파와 기호학파가 서로 파당을 이루었고 건전한 견제와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자신들과 파당에 이기적인 반대를 위한 반대가 성행하게 되었고 선조의 중재 능력을 벗어나 극단적인 파벌싸움 양상을 띠게 되면서 조정은 혼란만 가중되고 있었다. 

 

이처럼 사림의 분당과 정치 투쟁 사태가 조정을 극도로 혼란시키자 당시 대사헌 이이는 이들의 중재를 맡았지만 그도 해결의 실마리를 찿지 못했다. 그 후 이이가 죽자 파당으로 인한 대립은 점차 극심해져 치열한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그러던 중 세자 책봉 문제로 정철 등 서인들이 선조의 분노를 사서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득세하게 된다.

 

처음에는 선조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파당을 조성하였지만 방계 승통이라는 열등의식에 빠져 서출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정철의 건의에 대해 불같이 분노하며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정치적 사안에 따라 어러차례 환국을 실시하여 애끗은 사림들의 목숨만 희생시키는 소인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아녀자들에 의해 이불밑 송사로 인해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신성군이 임진오란 중 피난길에 죽자 나중에는 50대 나이에 10대의 왕비를 맞아들여 적출을 낳아 세자로 만들려는 선조의 속깊은 욕심을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건저의 문제(建儲議問題)

 

임진왜란 직전 1591년(선조 24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며, 건저의 사건이라고도 부르며, 건저 문제, 건저 사건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건저의(建儲議)는 “왕세자를 세움에 따른 의론”을 뜻한다.

 

정여립 사건을 가혹하게 처리하면서 서인의 영수 정철은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 이에 동인은 원한을 품고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선조의 총애를 받던 인빈 김씨신성군(信城君, 1578년~1592년 11월 5일)을 낳자 신성군은 선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당시 동인의 영수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인빈의 오빠 김공량(金公諒)과 친교하고 있었다. 이산해는 우의정이던 유성룡, 정철과 함께 세자 책봉을 논의하기로 했다. 그러나 선조의 마음을 아는 이산해는 병을 핑계로 어전에 나가지 않는다.

 

이에 좌의정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정할 것을 주청하자 선조의 미움을 사고 강계(江界)로 유배되었으며, 이에 관련되어 윤두수 등 서인이 파직 혹은 원류(遠流)되어 동인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동인은 이 기회에 기축옥사의 책임을 물어 정철을 죽일 것을 주장하는 이산해를 주축으로 서인에게 강경 보복하자는 강경파 북인과 그에 반대하는 유성룡으로 대표되는 온건파 남인으로 갈라져 대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