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의인왕후릉(왼쪽)에서 본 선조의 능.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이 둘러쳐져 있고,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된 병풍석이 있으며, 난간석과 혼유석 등 전형적인 석물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
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594 : 조선의 역사 136 (선조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594 : 조선의 역사 136 (선조실록 1)
|
제14대 선조
선조(宣祖, 1552년(명종 7년) 음력 11월 11일 ~ 1608년)는 조선의 제14대 임금(재위 1567년~1608년)이다. 휘는 연(昖). 첫 작위는 하성군이었고, 사후 시호는 선종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宗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며 이후 광해군 때 묘호를 선조로 바꾸고 존호를 더 올렸다.
중종의 서손이며 조선 명종의 이복 조카이고,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의 아들로서, 비는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계비는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이다.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임금이며, 최초의 방계 혈통의 임금이기도 하다. 서자 출신이라는 점과 방계 승통이라는 점이 열등감으로 작용하여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개인적으로는 주자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문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1567년부터 1608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567년부터 1568년까지 이복 숙모 인순왕후 심씨가 섭정을 하였고 1568년부터 1608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생애
잠저 시절
선조는 1552년 음력 11월 11일 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 초(岹)와 하동부대부인의 셋째 아들로 한성 인달방 도정궁(都正宮)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이균이었으나 이연으로 바꾸었다.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순회세자 요절 후 명종의 총애를 받았고, 곧 후사로 낙점된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명종이 1565년(명종 20년)에 병석에서 밝힌 바에 따라 1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여기에 따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하성군이 왕이 된 이유가 담겨있다. 어느날, 명종이 덕흥대원군의 아들들을 불러 익선관을 써보라 하였다. 두 형(하원군, 하릉군)들은 별 말 없이 익선관을 썼지만, 하성군은 현직 왕이 쓰는 것을 함부로 쓸 수 없다하여 명종의 마음에 들었다 전해진다. 선조의 즉위는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 출신이 즉위한 첫 사례이였다. 그러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서자라는 점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일종의 콤플렉스로 작용하게 된다.
선조는 이후에도 여러 번 생부 덕흥대원군을 다시 왕으로 추존하려고 시도하나 성리학자 사림파의 맹렬한 반대에 부딛쳐 결국 취소하고 만다.
즉위 과정
병약한 명종은 후사도 없이 임종을 목전에 두었는데, 이준경은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 균을 왕재로 보았다. 그러나 외척인 좌의정 심통원은 다른 뜻을 품고 있어 동의할 낌새가 없었다. 그러자 이준경이 심통원에게 일렀다.
"태의가 전하를 진맥해 본 결과 아무 약이 효험이 있다고 하니 좌상께서 내의원 별당으로 가서 그 약을 좀 가져오시지요." 심통원은 수하에게 영상의 명을 대행하게 했다. 그러자 이준경은 눈을 부릅뜨고 심통원을 꾸짖었다. "전하의 환우가 심히 불안한 지경인데 상감께 올릴 약을 어찌 아랫사람에게 시킨단 말이오!"
심통원은 얼른 사과하고는 손수 내의원 별당 다락으로 올라가 약을 찾았다. 그때 이준경은 다락으로 통하는 문을 잠궈버렸다. 그리고 다급히 명종을 배알하고는 후사를 지명할 것을 주청했다. "아직 나라의 근본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하교해 주시기 바랍니다." 숨이 턱에 받친 명종이 간신히 입을 열어 "덕흥군 제삼자"라고 말하니 이준경이 뒤를 돌아보고는 큰 소리로 따라 외쳤다. 주서 황대수가 큰 글자로 받아 적어 등에 지고 나갔고, 이로서 하성군이 왕업을 물려받으니 그가 바로 선조였다. 이를 듣게 된 선조는 대비인 인순왕후의 일족에게 감정을 품게 된다.
즉위 초반
친정
선조는 생부와 생모를 1569년(선조 2)에 송(宋)나라 영종(英宗)의 생부 복왕(濮王)을 추존하는 고사(故事)를 따라 생부 덕흥군을 추숭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하고, 생모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으로 추존하였다. 그러나 즉위 초반 그는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다시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중국 송나라의 복안의왕과 안희수왕, 중국 전한의 정도공왕에 대한 고사를 들어 반대에 부딛쳐 성사시키지 못했다.
즉위 직후부터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있었으나, 그는 사림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고 그들을 통해 친정을 유도하게 했고, 인순왕후는 곧 일선에서 물러난다. 인순왕후의 퇴진 직후 이이 등이 부패한 재상 심통원을 탄핵하자 바로 숙청했다. 이는 심통원이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데 대한 감정도 작용했다. 이어 김효원 일파가 심의겸을 공격하자 심의겸을 외직으로 축출해버린다. 대비의 친정 일족을 제거한 소년왕의 면모에, 즉위 초 어린 왕이라고 무시하던 신하들은 경악한다.
사림정치의 확립
선조가 즉위할 무렵 조선 사회는 성종 때부터 중앙정치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이 정계를 주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선조는 주자학을 장려하고 사림을 널리 등용했으며, 스스로 학문에 힘써 강연(講筵)에서 이황·이이·성혼 등 대유학자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했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를 비롯한 여러 사림을 신원하고 을사사화로 귀양가 있던 노수신(魯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하여 기용하는 한편, 훈신세력인 남곤(南袞)·윤원형(尹元衡)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거나 삭훈(削勳)했다. 또한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설치하고, 유일(遺逸)을 천거하도록 하여 조식(曺植)·성운(成運) 등을 등용했다. 이황에 대한 신뢰와 함께 그가 죽자 이이를 신임하였는데, 이이에 대한 신임은 그가 죽을때까지 계속된다.
또한 잠저시절부터 학문적 소양이 있었던 그는 유교사상 확립을 위해 명유들의 저술과 경서의 간행에 힘써 1575년 〈주자대전〉의 교정본을 간행하고 1585년에는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해 경서의 훈해(訓解)를 교정하게 했다. 1588년 사서삼경의 음석언해(音釋諺解)를 완성하고 〈소학언해〉를 간행했다.
한편 조선초부터 명나라와의 외교문제가 되고 있던, 즉 명나라의 〈태조실록〉·〈대명회전 大明會典〉 등에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과 함께 4명의 왕을 살해했다고 되어 있는 것을 고치기 위해 주청사를 거듭 파견했다. 그리하여 1584년 황정욱(黃廷彧)이 중찬된 〈대명회전〉의 수정된 조선관계 기록의 등본을 가져옴으로써 종계변무(宗系辨誣)의 목적을 달성했고, 1589년 성절사 윤근수(尹根壽)가 〈대명회전〉 전질을 받아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동서분당과 붕당정치의 성립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은 척신정치하에서 성장한 구세력의 제거를 둘러싸고 전배(前輩)와 후배(後輩)가 대립하게 되었다. 전배는 소윤(小尹)세력이 우세하던 상황에서 심의겸(沈義謙)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한 인물들로서 심의겸을 척신이지만 사림의 동조자로 받아들인 데 반해, 소윤세력의 몰락 이후에 정계에 진출한 후배들은 심의겸을 포함한 구세력의 제거를 주장했다.
1575년 전배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이, 후배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이 되었다. 서인의 주요인물은 박순(朴淳)·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이고 동인의 주요인물은 류성룡(柳成龍)·이산해(李山海) 등이었으며, 각각 이이와 이황의 학문에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학풍·학연을 배경으로 한 대립의 양상도 띠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세력은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1591년에는 건저 문제로 정철이 파면되면서 동인이 집권하게 되었으나, 정철의 처벌을 둘러싸고 온건파는 남인(南人)으로, 강경파는 북인(北人)으로 다시 나누어졌다.
이발, 정인홍 등이 우성전의 축첩을 문제삼은 것 역시 동인 강경파들의 온건파에 대한 의심과 불신의 한 원인이 되었다. 우성전은 여러 명의 첩을 두었는데 이 점이 일부 동인 소장파들에 의해 의혹으로 제기되었다.
동인의 분당에는 우성전의 기생에 대한 파격적인 총애 역시 작용했다. 우성전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동인들은 이이를 의심했다. 우성전은 당시 동인들이 떠받들던 인물이었다. 그는 학문적 소양도 폭넓었고 지략이 남달랐으며, 경세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였다. 동인들이 평소 "우성전이 대신이 된다면 만백성이 잘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동인들이 떠받드는 새로운 지도자였다. 이런 우성전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기생 한 명을 지나치게 좋아한 것이었다. 심지어 우성전의 부모상 때에도 이 기생이 상례에 어긋나게 머리를 풀고 우성전의 집에 출입할 정도였다. 선조는 우성전의 상중에 기생이 출입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환국의 시초
상중에 기생이 우성전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보고 해괴하게 여긴 인물은 동인 이발이었다. 이발은 장령으로 있던 정인홍에게 우성전의 부모상에 기생이 출입하더라고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훗날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는 정인홍은 재야에 오래 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깨끗한 처신을 자랑삼아 온 인물이었다. 그는 예에 어긋난 이러한 일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앞장서서 우성전을 공격했다.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한 것은 이처럼 동인인 이발의 토로에 의한 것이었는데, 동인들은 이 것 역시 이이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이이를 의심하였다.
동인의 내분이 강화되자 선조는 남인의 손을 들어준다. 그뒤 선조 집권 후반의 정국은 류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이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이항복(李恒福) 등의 중도적인 서인세력을 포섭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그러나 북인계열에서 곽재우, 정인홍 등의 의병장들이 쏟아져나옴으로서 전란 직후 북인에게 정권을 넘긴다. 선조대에는 집권당이 서인-동인-남인-서인-북인으로 집권세력을 교체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꾀했는데, 이는 후일 환국정치의 모범이 된다.
.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596 : 조선의 역사 138 (선조실록 3) (0) | 2012.05.25 |
---|---|
한국의 역사 595 : 조선의 역사 137 (선조실록 2) (0) | 2012.05.24 |
한국의 역사 593 : 조선의 역사 135 (명종실록 10) (0) | 2012.05.22 |
한국의 역사 592 : 조선의 역사 134 (명종실록 9) (0) | 2012.05.21 |
한국의 역사 591 : 조선의 역사 133 (명종실록 8) (0) | 2012.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