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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91 : 조선의 역사 133 (명종실록 8) 본문
한국의 역사 591 : 조선의 역사 133 (명종실록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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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의 강릉
제13대 명종실록(1534~1567년, 재위: 1545년 7월~1567년 6월, 22년)
4. 명종시대를 이끈 사람들
주리철학의 선구자 이언적(1491~1553년)
이수회의 손자이자 이번의 아들인 이언적은 1491년 성종 22년에 태어났다. 본명은 적이었지만 중종의 명으로 '언'자가 더하여져 '언적'이라 하였으며 호는 회암, 주희의 학문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회재라고 하였다.
그는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에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 응교 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중앙으로 올라온 뒤에 다시 이조, 예조, 형조판서를 거쳐 1545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 해에 윤원형 등의 척신 세력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사림들을 심문하는 추관을 맡았으나 자신도 이때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6년을 보내다가 1553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을사사화같은 시련기에 이언적은 판의금부사라는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윤원형 일파에 의한 사림의 피해를 막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힘이 부족하여 자신도 결국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이를 두고 이이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하지 못했던 점을 들추면서 절개를 지키지 못한 우유부단한 학자로 비판하고 있지만,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강구하던 치밀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조의 성리학을 정립한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스승도 제대로 없던 그는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확립하였으며, 이황의 성리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7세 때 당시 영남지방의 선배 학자인 손숙돈과 조한보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 쟁점인 무극태극 논쟁에 뛰어들어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에서 손숙돈돠 조한보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그의 견해는 이황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 성리설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만년에 유배생활 동안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서들을 남겼다. <구인록>, <대학장구보유>, <중요구경연의>, <봉선잡의> 등이 그것이다. <구인록>은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으로 인(仁)에 대한 그의 견해와 관심이 집약되어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을 살피면서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 정신을 탐구하고 있다. 이 탐구를 살펴보면 그는 주희를 추종하긴 했으나 주희가 강조했던 '격물지치'의 내용을 거부하고 철저한 주리론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그의 학문적 관점은 이황에 의해 집대성되어 영남학파를 이루는 근거가 되었다. 도학적 수양론과 실천을 강조한 그는 군자의 길을 닦는 것이 곧 학문이라고 강조하면서 조선 성리학의 우뚝한 봉우리가 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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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에서 주리철학에 대한 참고 자료를 올린다.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도 어렵고 내용이 추상적인 내용이며 공허한 논쟁이라 깊이 살피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대략 무슨 내용인지 알고는 가야 할 것 같아 싣는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의 삶은 내팽개친채 지도층인 조정과 사림들은 주리론, 주기론 논쟁으로 허송세월만 보냈고, 예송논쟁 등으로 허레허식만을 강조하였던 사회였다. 그래서 조선의 유교 사상에 대하여 결국은 나라를 망하게 만든 사상이라 별로 관심이 없다.
주리철학 (主理哲學) |
조선시대 성리학의 양대 학파 가운데 하나로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바탕으로 하는 성리학에서, 우주 만물의 궁극적 실재를 이(理)로 보는 이황(李滉)의 학설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철학을 가리킨다. 즉 이와 기(氣)가 어디까지나 두 가지이지 한 가지가 아니며, 기는 결코 상존하지 않고 생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이는 항존불멸하는 것으로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이며, 능동성을 가진 이가 발동하여 기를 주재한다는 주장이다.
즉, 16세기에 이르러 우리나라 유학자들에 의해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본격화될 때 그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심성론(心性論)이다. 이것은 특히 오상(五常)과 사단칠정(四端七情)으로 포괄되는 인간의 성정(性情)을 이기론적으로 해석한 것인데, 그 대표적인 학자가 이황이다. 그는 사단칠정이라는 인간의 감정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사단과 칠정에 이와 기가 모두 관여하지만 그 발하는 바의 '소종래'(所從來)와 '소주이언'(所主而言)의 차이에 따라 사단은 이발(理發)로, 칠정은 기발(氣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이황의 견해에 대해 당시 기대승(奇大升)의 이견이 있었으며, 그후 기대승의 견해를 계승한 이이(李珥)에 의해 사단과 칠정을 모두 기발로 설명하는 이론이 제시되었다. 이 사단칠정론의 차이는 이기론·심성론·수양론을 포함하는 성리학 전체의 이론적 체계를 달리하는 것이었으며, 그후 이황과 이이의 제자·문인들에 의해 두 사람의 성리학이 계승·발전되면서 우리나라 성리학을 대표하는 두 계열의 학파와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게 된다. 그 가운데 이황의 견해를 따르는 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을 주리파(主理派) 혹은 주리론이라 하며, 이이의 견해를 따르는 학자들과 이들의 이론은 주기파(主氣派) 혹은 주기론이라 한다.
이기론에 있어 주리론과 주기론은 다같이 이와 기를 세계의 근원적 존재로 인정하며, 이와 기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물이 형성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이기에 관한 가치론적 설명에서 기보다 이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그러나 이기의 분개(分開)와 혼륜(混淪)에 대한 강조의 차이에서 나타나듯이, 주리론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을 철저하게 고수하여 '이기결시이물'(理氣決是二物)이라는 분개의 측면을 강조하는 데 반해, 주기론은 이기의 차별성을 인정하면서도 '이기원불상리'(理氣元不相離)라는 혼륜의 측면을 강조한다. 따라서 주리론에서 이는 객관적 실재로서의 성격이 명백하게 드러나며, 또 이와 기의 차별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이와 같이 주리론에서는 이와 기의 차별을 강조할 뿐 아니라 '이선기후'(理先氣後)라는 기에 대한 이의 선차성(先次性), 혹은 '이본기용'(理本氣用)과 같은 기에 대한 이의 우위성을 이발설을 통해 강조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즉 이의 능동성을 주장해, 이를 형태는 없으나 운동능력을 가지는 것으로 파악하여, 기와 함께 이에도 동정·운용·조작 등의 능력을 부여했다. 심성론의 측면에서 주리론과 주기론이 모두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는 점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기의 분개를 강조하는 주리론은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별개의 존재로 파악하며, 또 이의 운동능력을 인정함으로써 '성발위정'(性發爲情)의 논리에 따라 사단은 본연지성이 발한 정으로, 칠정은 기질지성이 발한 정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갖춘 심은 이기의 합(合)으로 이해했으며, 심에도 형기(形氣)에 근원하는 인심(人心)과 성명(性命)에 근원하는 도심(道心)의 2가지가 있다고 했다.
따라서 심성론(心性論)의 주요 논제인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설명함에 있어 심성 내부에 존재하는 천부적인 선한 본성인 사단은 이가 발동한 것이고, 선과 악이 섞여 있는 칠정은 기가 발동한 것이라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이 처음 주장한 것을 이황이 집대성하였고 이현일(李玄逸), 이재(李栽), 이상정(李象靖), 유치명(柳致明), 이진상(李震相), 이항로(李恒老) 등에게 계승되었다.
즉, 이황이 확립한 주리론을 계승해 주리파가 하나의 학파로 성립한 것은 17세기 후반의 이현일(李玄逸)에 의해서이다. 이황의 성리학설에 대한 이이와 그의 제자들의 비판을 재비판하는 형식으로 주리론을 옹호한 이현일과 그의 학맥을 계승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주리론이 발전되었으며 주리파가 형성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는 이현일과 그의 아들인 이재(李栽), 이재의 외손이며 문인인 이상정(李象靖), 이상정의 제자인 남한조(南漢朝)와 그의 문인인 유치명(柳致明), 그리고 유치명의 학맥을 계승하여 주리론의 발전을 정점으로 이끈 이진상(李震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주리파는 이황의 학설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퇴계학파라 부르며, 영남지방에 근거를 두고 활약했으므로 영남학파라 부르기도 한다. 주리파는 이이의 성리학설을 비판하고 이황의 견해를 옹호하기 위해 무엇보다 이기의 근본적 차별성과 기에 대한 이의 선차성·우위성·능동성을 강조했다. 그결과 유치명에 이르면 기의 활동을 기다리지 않고 이의 자발적 능동성만으로 천지만물의 유행(流行)을 설명하게 되며, 이진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는 스스로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의 동정에 의해서만 동정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기의 능동성을 부정하고 이의 능동성만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진상은 주리론에 입각하여 성리학을 교과서적으로 체계화한 <<이학종요>>를 저술했다. 그의 성리학설에 의하면 이기의 관계는 '이주기복'(理主氣僕)의 관계이며, 이는 능동(能動)·자동(自動)이며 기의 동정은 이의 동정으로 인하여, 이의 시킴을 받아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성(性)의 명의(名義), 심(心)의 주재(主宰), 정(情)의 근인(根因)은 모두 하나의 이(理)일 뿐이다. 그 가운데 성은 미발(未發)의 이이며, 정은 이발이 있을 뿐이고 기발은 없다. 정 가운데 이가 경기(經氣)를 타고 직출(直出)한 것은 사단이 되며, 이가 위기(緯氣)를 타고 횡관(橫貫)한 것은 칠정이 된다. 그리고 심의 본체는 이에 있고 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심의 정체실상(正體實相)을 바로 가리킨다면 '심즉리'(心卽理)하여야 한다. 이진상의 이러한 성리학설은 이전까지의 주리론을 계승·발전시킨 것이지만, 그 가운데 '심즉리'의 명제는 주리론의 전통적인 '성즉리', '심이기합'(心理氣合)의 명제와 충돌함으로써 주리론 내부에 이론적인 분화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19세기 주리론의 발달에서 특징적인 것은 이제까지 영남지방에만 그 학설이 계승되어 오던 상태에서 벗어나 기호지방에 근거를 둔 학자들까지 주리론을 주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항로(李恒老)와 그의 문도로 이루어진 화서학파(華西學派)는 그 활동지역이나 당색으로 보아 영남의 남인학자들과는 별개의 학자들이었으나 주리론을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그리고 기호지방의 학자들 가운데서 기정진(奇正鎭)은 주리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리론(唯理論:理一元論)의 성리학설을 수립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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