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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88 : 조선의 역사 130 (명종실록 5) 본문
한국의 역사 588 : 조선의 역사 130 (명종실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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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의 강릉
제13대 명종실록(1534~1567년, 재위: 1545년 7월~1567년 6월, 22년)
3. 명종시대의 주요 사건들(계속)
임꺽정의 난
임꺽정은 사회가 혼탁하고 민심이 흉흉하여 도적이 들끓던 명종시대의 대표적인 도적 두목으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의적으로 통하던 인물이다. 양주의 백정 출신인 임꺽정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힘이 장사인데다가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당시의 양반 사회에 불만이 많았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임꺽정이 출몰하기 시작하던 1559년은 명종은 허수아비요 문정왕후의 난정이 극에 달하고 있던 시절로 척족 윤원형 일파와 이량 일파가 발호하여 온 나라가 그들의 세도에 눌려 있었고, 반대로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사회는 온통 부정과 부패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고, 민간은 학정과 수탈에 시달리며 고통을 호소해야 했다.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몇 년째 흉년이 계속되어 사방에 거지가 늘어나고 도적떼가 할거하였으며, 남쪽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민가를 불사르고 약탈을 자행하는 등 그야말로 조선 사회는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임꺽정은 이런 아수라장을 이용하여 자신의 처지를 타개하려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처음에 그는 도당 몇 명과 함께 민가를 돌아다니며 도둑질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로 진출하여 구월산 등에 본거지를 두고 주변 고을을 노략질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점점 도적떼 무리가 커지자 마침내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의 관아를 습격하여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의적으로 둔갑했다.
이러한 의적 행각은 백성과 아전들의 호응을 얻어, 백성들이 관아를 기피하고 오히려 임꺽정 무리와 결탁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관아에서 그를 잡으려고 병력을 동원하면 백성들은 그들을 숨겨주거나 달아나도록 도와주었다. 일이 여기까지 이르자 조정에서는 선전관을 보내어 그들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되레 선전관이 그들에게 잡혀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조정에서는 임꺽정을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관아에서는 임꺽정이 도적의 괴수라는 사실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임꺽정 무리는 개성에 나타나기도 했으며, 1560년에는 마침내 한양에까지 출몰하였다.
1560년 8월 임꺽정 무리를 쫓던 관원들이 그의 아내를 잡는 데 성공하여 그녀를 형조 소속의 종으로 삼게 했다. 그리고 이 해 10월에 들어서는 한양으로 진입하는 길을 봉쇄하고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그러나 이들 도적의 무리는 봉산에 중심 소굴을 두고 평안도의 성천, 양덕, 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등지에 출몰하여 더욱 극성을 떨었다. 이들은 황해도에서 빼앗은 재물을 개성에 가서 팔기도 하고, 한양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황해도 일대는 길이 막히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 병력이 임꺽정 무리를 잡는 데 투입되었다. 이 해 12월에는 엄가이라는 도둑 두목이 잡혔는데, 그는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이라는 자였다. 관아에서는 서림의 입을 통해 임꺽정 일당이 장수원에 모여 있으면서 전옥서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할 계획을 짜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들이 평산 남면에 모여 자신들을 여러 번 잡아 그 공으로 영전한 봉산 군수 이흠례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에 조정에서는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백 명을 모아 평산 마산리로 보냈으나 오히려 그들에게 패하여 후퇴하였고 부장 연천령이 죽고 군마를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사건이 이렇게 되자 조정에서는 임금이 직접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등 각 도에 대장 한 사람식을 정해 책임지고 도독을 잡으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무렵 서흥부사 신상보가 도둑 무리의 처자 몇 명을 잡아 서흥 감옥에 가두었는데, 한낮에 도둑떼가 들이닥쳐 옥사를 깨고 그들의 처자를 구출해간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관군은 본격적으로 도적 소탕 작전에 돌입하여 그해 12월에 황해도 순경사 이사중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를 했다. 하지만 그가 잡은 사람은 임꺽정이 아니라 그의 형인 가도치였다. 그래서 이사중은 이 허위 보고에 책임을 지고 파직당해 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5도의 군졸들이 모두 임꺽정을 잡기 위해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1561년 9월 평안도 관찰사 이량은 의주목사 이수철이 임꺽정을 잡았다고 보고를 했으나 그는 임꺽정을 가장한 가짜였다. 이 때문에 이수철은 허위 보고로 파직당하였다.
그해 10월에 임꺽정 무리에 의해 해주의 민가 30호가 불타는 화재사건이 발생했고, 이때부터 관군들은 서림을 앞세워 임꺽정을 체포하기 위해 나섰는데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구타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한양의 옥사에서는 온종일 호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관청은 일을 중단하고 임꺽정을 색출하는 작업에 투입되었고, 5도의 전 시장들을 휴업하게 하였다. 또한 황해도에서는 양민들이 도둑에 가담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전세를 전부 탕감해주었으며, 평안도에서는 전세의 절반을 깍아주기도 했다.
이렇게 소란이 심화되자 군민은 피로에 지치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토벌 대장인 토포사를 다시 한양으로 올라오게 하고 임꺽정 잡는 일은 평안도, 황해도의 병사와 감사가 맡게 하였다.
그 후 1562년 정월, 군관 곽순수와 홍언성이 임꺽정을 체포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진짜 임꺽정이었다. <기재잡기>는 임꺽정이 잡힐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민가에 숨어 있던 임꺽정은 주인 노파를 위협하여 '도둑이야'라고 소리치게 한 다음 자신이 뛰쳐나가 도둑이 달아났다고 소리쳤다. 이 말을 믿고 군졸들이 임꺽정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몰려가자 그는 군졸들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났다. 그때 서림이 저 사람이 임꺽정이라고 소리쳐 군졸들이 추격하자 끝내 상처를 입고 생포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임꺽정은 조정에서 체포령이 내려진 지 3년 만에 붙잡혔고, 체포된 지 15일 만에 처형당하였다.
<명종실록>의 사관은 임꺽정 무리에 대해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 기록은 당시의 사람들이 임꺽정을 단순히 도적의 괴수로 생각하지 않고 민심을 대변하는 의로운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의적으로 추앙했으며, 무수한 설화와 소설로 그의 행적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임꺽정을 가리켜 앞 시대의 홍길동과 후세의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둑이라고 했다.
임꺽정은 평민과 몰락한 양반들에게는 의인으로, 그리고 가진자들인 사회 지도층의 양반들에게는 도둑으로 평가되었다. 어쨌던 그의 도적 행위가 단순히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은 사실이었다. 또한 그의 활동이 3년 동안이나 조선의 행정을 마비시킬 정도였다는 점에서 임꺽정의 난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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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은 시대가 낳은 의적
시대가 인물을 낳는다 했다.
명종시대 모후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거치면서 외척들의 싸움질 속에 을사사화를 겪으면서 수많은 사림들이 목숨을 잃었고, 윤씨 척족들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부정과 비리를 마음껏 부리고 있던 시절, 수많은 백성들이 수탈과 노역으로 고통에 시달리다가 유랑객이 되었고 살기 위해서 도적떼가 되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임꺽정은 지도층과 양반 귀족들에 대한 불만으로 백성들을 규합하여 도적이 되었으며 탐관들이나 척족들이 매관매직으로 임명한 관리들이 있던 관아를 털고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의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호응이 있었고 임꺽정은 백성들의 도움으로 3년 동안이나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평안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관군을 속이면서 조정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인물이다.
국란의 위기에 충신이 나타나듯이 왕이 무능하고 외척들이 권력을 장악한 조정이 난정으로 인한 부정과 부패가 극에 치닫고 있던 시절에 나타난 임꺽정은 가난한 백성들을 대변하였고 양반 귀족들을 징벌하여 그들의 재물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던 의로운 도적임에는 틀림없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대통령 측근들의 낙하산 인사는 조선시대 척족들이 임명한 탐관들이요, 저축은행 사건은 낙하산 인사와 금융감독원 현직과 퇴직자들이 공모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전형적인 수탈에 해당되며, 측근들의 권력형 비리는 전형적인 척족들의 부정과 비리, 부패로 대변될 것이다. 또 국무총리실 민간이 사찰은 척족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벌인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사찰과 숙청에 비유된다.
시간은 흘러 역사는 반복되듯이, 인간의 탐욕은 시대를 불문하고 변하지 않고 재발되고 있다. 그들이 누리던 무소불위의 권력과 수많은 재물, 그리고 부귀영화는 권불십년이라, 아무리 절대권력도 누려도 그 권력은 흐르는 물과 같아 고이면 썩고 부패하게 되는 것인바, 세월이 지나가면 모두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남아 있다면 그들이 누운 흙무덤과 비석 조각 뿐일 것이다.
모든 정책은 나라와 백성의 입장에서 수립하고 백성들의 삶에 대한 고통을 항상 고뇌하며 정책을 펼친다면 세종과 같은 성군이 될 수 있을 것이나 반대로 자신의 권력과 척족들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국고를 탕진한다면 그 시절은 혼란과 고통의 세월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서민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은 모두 사회 지도층의 무능과 권력 남용, 그리고 그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찿아야 할 것이다. 세간에 드러나고 있는 갖가지 부정과 비리는 지도층에만 국한되지 않고 정치권, 법조계, 교육계, 공.사기업, 예술계, 연예계, 종교계, 군대, 공공기관 등 나라 전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위로는 청와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래 말단 공무원들까지 전염되어 온 나라가 부정과 비리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역사를 보면 이러한 징조는 나라가 혼란해지고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도적떼가 일어나며 외적의 침범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징조이다.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면 민심이 이반하고 국방이 소홀해지며 국론이 분열되는 것은 당연지사, 결국에는 망국의 길로 갈 수 있다는 안타까움이다.
오늘날 누가 임꺽정 같은 의적이 될 것인가? 부정과 부패, 비리로 재물을 모으거나 탐욕스런 가진자를 징벌하고 그들의 재물을 삶이 어럽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의적은 왜 나타나지 않는가? 현대판 임꺽정을 기대하면서 과거와 오늘을 되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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