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587 : 조선의 역사 129 (명종실록 4) 본문
한국의 역사 587 : 조선의 역사 129 (명종실록 4)

명종의 강릉
제13대 명종실록(1534~1567년, 재위: 1545년 7월~1567년 6월, 22년)
3. 명종시대의 주요 사건들
을사사화
을사사화는 무오, 갑자, 기묘사화와 더불어 조선의 4대 사화 중 하나로 1545년 명종 즉위년에 일어난 사화로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과 소윤 윤형원의 반목으로 일어나,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정계 점면에서 후퇴하자 심정, 이항 등의 세력과 김안로 세력이 치열한 권력다툼을 일으켰다. 이때 김안로는 심정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으나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내통하여, 심정 일파가 유배 중이던 경빈 박씨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탄핵하여 그들을 사형시키고 다시 정게에 복귀하게 된다.
정권 장악에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반대파를 몰아내고 허항, 채무택 등과 결탁하여 권세를 부렸으며 뜻이 맞지 않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들은 문정왕후를 몰아내려고 음모를 꾸미다 문정왕후의 숙부 윤안임의 밀고로 발각되어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이때 허항, 채무택 등도 함께 처형되었는데 이들 셋을 '정유3흉'이라 했다.
김안로가 실각한 뒤 정권 쟁탈전은 권신에서 척신으로 넘어갔다. 이들 척신들의 세력다툼운 먼저 세자 책봉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중종에게는 왕비가 3명 있었는데, 정비 신씨는 중종반정의 성공으로 중종 즉위 직후 간신의 딸이라 하여 후사 없이 폐위되었고, 첯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세자 호(인종)를 낳고 7일 만에 죽었다. 그 뒤 왕비 책봉 문제로 조신 간에 일대 노란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 1517년 윤지임의 딸이 두 번째 계비로 책봉되었는데, 그녀가 바로 문정왕후로 경원대군(명종)의 어머니였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자 그녀의 친형제인 윤원로, 윤원형은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계략을 세웠다. 하지만 세자 호(인종)의 외숙 윤임이 이를 저지해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때문에 조신들 또한 각각 대윤파와 소윤파로 갈라지게 되었고, 이 양 세력의 다툼은 날로 심해져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잇었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척인 대윤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윤임의 주변 세력은 대개 이언적 등의 사림파가 많았던 관계로 인종 재위시에는 다시 사림파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종은 즉위 9개월 만에 아무런 후사 없이 세상을 떴으며, 그래서 열두 살밖에 안 된 배다른 동생인 명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명종이 나이가 어린 탓에 어머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고, 때문에 조정의 권력은 자연히 소윤파에게 돌아갔다.
소윤파는 윤임 등이 역모를 홱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여 대윤파를 궁지로 몰아넣어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그 결과 윤임 및 그 일파인 유관, 유인숙 등을 비롯하여 게림군, 이휘, 나숙, 정희등, 박광우, 곽순, 이중열, 이문건 등이 처형되었다. 이때의 사건을 흔히 을사사화라 하는데 그것은 윤임 일파에 사림 세력이 몰려 있다가 한꺼번에 참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윤원형은 이 사건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나머지 사림 세력과 윤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양재역 벽서사건'을 기화로 다시 정미사화를 일으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 후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1565년까지 약 20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무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하게 된다.
양재역 벽서사건
'양재역 벽서사건'은 을사사회 2년 뒤인 1547년에 일어난 것으로 윤원형 세력이 윤임파의 잔당과 사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치 쟁점화했던 정적 숙청사건이다.
1547년 9월 부재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여 임금께 보고한 것이다.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이 윤임파에 대한 처벌이 미흡하여 생긴 사건이라 주장하며 그 잔당 세력을 척결할 것을 간언했다.
이 말을 들은 문정왕후는 명종으로 하여금 윤임의 잔당 세력과 정적들을 제거하도록 했다. 그 결과 한때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직케 했던 송인수와 윤임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를 사사하고,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황, 유희춘, 백인걸, 김난상, 권응정, 권응창, 이청계 등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그 중에는 특히 사림계 인물이 많았다. 또한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환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으며, 그 밖에도 애매한 이유로 많은 인물들이 희생되어야 했다. 그러나 1565년 문정왕후가 죽고 소윤 일파가 몰락하자 이때 희생된 사람들 모두 신원되었으며, 이 사건 자체도 소윤 일파의 무고로 처리되어 노수신, 유희춘, 백인걸 등 유배되었던 사람들이 다시 등용되었다.
이 사건은 사실 익명으로 쓰여진 벽보를 소윤 일파가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다지 대단치도 않은 일을 소윤 일파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의로 확대시킨 사건이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589 : 조선의 역사 131 (명종실록 6) (0) | 2012.05.18 |
---|---|
한국의 역사 588 : 조선의 역사 130 (명종실록 5) (0) | 2012.05.17 |
한국의 역사 586 : 조선의 역사 128 (명종실록 3) (0) | 2012.05.15 |
한국의 역사 585 : 조선의 역사 127 (명종실록 2) (0) | 2012.05.14 |
한국의 역사 584 : 조선의 역사 126 (명종실록 1) (0) | 2012.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