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585 : 조선의 역사 127 (명종실록 2)
명종의 강릉
제13대 명종실록(1534~1567년, 재위: 1545년 7월~1567년 6월, 22년)
1. 눈물의 왕 명종의 등극과 끝없는 혼란(계속)
윤형원의 이런 세도가 명종이 친정을 한 이후에도 계속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명종은 드디어 윤형원을 견제하기 위해 중용한 인물이 이량이었다.
이량은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외숙이었다. 하지만 이량 역시 청렴한 인물은 아니었다. 명종이 자신을 신임하자 그는 이감, 신사헌, 권신, 윤백헌 등과 결당하여 세력을 기르고 정치를 농단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자기 편인 김명윤을 재상으로 삼아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자 우의정 이준경의 사직을 간언하기도 했다. 게다가 축재에도 열을 올려 그의 집 앞은 항상 시장처럼 사람들이 들끓었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윤형원, 심통원 등과 함께 '조선의 3흉'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호랑이를 내쫓으려다 호랑이 한 마리를 더 키운 격이 된 명종은 그를 한때 평안도 관찰사로 내쫓기도 했다. 하지만 윤형원의 극심한 권력 독점을 염려한 나머지 1562년 다시 이조참판에 제수하여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이량은 한층 더 세도를 부리기 시작했고 예조,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된 뒤에 그의 권력 남용은 극에 달하였다.
이량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자 사림 세력들은 그를 탄핵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오히려 기대승, 허엽, 윤근수 등의 사림 세력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음모가 그의 조카 심의겸에게 발각되어 사화를 획책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직되었다, 이때가 1563년이었다.
이처럼 권신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명종에게 설상가상으로 문정왕후는 툭하면 떼를 쓰며 왕을 괴롭혔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종이에 적어 보냈다가 그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왕을 불러 면상에다 대고 반말로 욕을 해대는가 하면 심지어는 말을 듣지 않는다고 왕의 종아리를 때리거나 빰을 때리기도 했다.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 신봉자였던 모양인데, 봉은사의 승려 보우의 조언에 따라 선종과 교종을 모두 부활시키고 승과를 부활하는 한편 보우를 도선사 주지로 삼고 도대선사에 올려놓기도 했다.
왕의 권위는 이처럼 땅에 떨어지고 조정 대신들은 권력을 독점하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해 있었기에 자연히 사회는 어수선하고, 민심은 이반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백성의 태반이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고, 나라 구석구석마다 도적떼가 난립하였다.
특히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은 이들 도적떼의 두령들을 끌어모아 관군을 괴롭혔고, 그 때문에 관리들은 그를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임꺽정 무리의 활동은 황해도, 경기도 등 전국 5도를 누비며 1559년부터 1562년까지 무려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는 백성들 사이에서 의적으로 통하고 있었기에 그를 잡으려는 관군이 오히려 민간의 원흉으로 취급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사회가 이렇듯 혼란스러운 지경에 이르자 자연 국방이 허술해졌고, 그 틈을 타서 왜구가 기승을 부렸다. 중종시대의 삼포왜란 이래 세견선의 감소로 곤란을 당해오던 왜인들은 1555년에 배 7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하여 한때 전라도 일부를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들은 결국 이준경, 이경석, 남치훈 등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격퇴되었지만 을묘왜변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민간은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중종 때 임시로 설치되었던 비변사를 상설 기구로 하고 외침에 대비하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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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조선의 3대 도적으로 홍길동·장길산과 임꺽정(林巨正, ? ~1562)을 꼽았다. 성호가 3대 도적으로 이들을 꼽은 것은 비단 대도(大盜)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당시 위정자들은 이들을 도적떼로 몰고 갔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위정자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자 신분해방의 부르짖음이 담긴 의적(義賊)이라는 시각이 담겨있다고 본다. | |
궁궐 밖 의적을 만드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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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의 난은 역대 반란 가운데서도 상당히 장기적으로 지속되었고 조선 전체를 뒤흔들었다. 영의정 상진, 좌의정 안현, 우의정 이준경, 중추부 영사 윤원형 등 당대 최고의 실권자가 모여서 황해도를 휩쓰는 도적떼를 없앨 대책을 세운 것이 1559년(명종 14년) 3월 27일이었다. 이후 관군에 의해 소탕된 것이 1562년(명종 17년) 1월 초였으니 무려 3년이 넘게 관군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황해도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3년 이상 지속된 것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임꺽정의 난에 대해 [명종실록] 편찬자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날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여 정치만 잘했다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리 없다는 말이다. 임꺽정을 흉악범으로 기록해 놓은 [명종실록]이지만, 사관(史官)은 그 본질을 읽고 있었다.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무렵 조선사회는 동맥경화의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른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기였고 이 때의 왕이 명종(明宗)이었다.
실제 명종대의 진정한 대도는 임꺽정이 아니라 실권자였던 문정왕후의 혈육 윤원형(尹元衡)이었다. 윤원형은 명종의 외삼촌이자 문정왕후의 동기간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임꺽정은 우연하게 출연한 도적이 아닌 것이다. 사실, 임꺽정이 활약했던 황해도 지역의 지방 관리들은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친정붙이들이었다. 임꺽정 난이 기록상 보이기 시작하는 1559년 황해도 지역은 극심한 흉년과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할 지경이었다. 가난과 전염병으로 쪼들린 농민들은 살 곳을 잃고 떠돌아 다니다가 도적이 되는 것이 기본 수순이었다. | |
백정출신이 부자들을 향해 칼을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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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의 주동자였던 임꺽정은 백정 출신이었지만, 그와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다양했다. 상인, 대장장이, 노비, 아전, 역리 등 실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임꺽정은 자신만의 리더십으로 이들을 이끌었다. 임꺽정의 활동 무대는 처음에는 구월산·서흥 등 산간지대였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고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지면서 평안도와 강원도, 안성 등 경기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관군들이 일찍이 임꺽정의 세력이 커질 때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황해도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임꺽정과 비밀리에 결탁되어 관에서 잡으려고 하면 그 사실을 미리 알려줬기 때문이다.
결국 관에서는 선전관(宣傳官)이라는 무장을 내세워 추적하게 했지만, 임꺽정과 그의 무리들은 신발을 거꾸로 신고 다니면서 들어가고 나간 것을 헷갈리게 만들어 추적을 불가능하게 했다. 결국 추적에 나선 선전관은 구월산에서 임꺽정 무리들의 발자국을 발견했지만, 들어간 것을 나간 것으로 잘못 알고는 화살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임꺽정 무리들의 약탈 대상은 이른바 부자들이었다. 관청이나 양반, 토호의 집을 습격하여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인 재물을 도로 가져갔고, 심지어 과감하게 관청을 습격하는 등 공권력을 향해 항거하기도 했다. 이는 임꺽정 무리들이 일개 좀도둑이 아닌 농민저항 수준의 반란이었음을 말해준다. 민중들이 관군의 동향을 미리 알려주고 그들의 활약에 환호를 지른 것은 그들이 단순한 도적떼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 |
출세와 현상금에 눈이 먼 관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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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왕이었던 명종은 이들을 ‘반적(叛敵)’이라 부르며 반란군으로 규정했다. 단순한 도적이 아닌 체제도 뒤엎을 수 있는 존재로 본 것이다. 왕의 특명에도 불구하고 임꺽정을 잡기란 쉽지 않았다. 신출귀몰한 임꺽정이 잡히지 않자 그에 대한 현상금은 높아만 갔다. [명종실록]에 실려 있는 임꺽정 기사는 상당부분 가짜 임꺽정을 진짜로 둔갑시켜 출세를 해보려는 자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1561년 1월 3일에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 강원도 순경사 김세한이 임꺽정을 잡았다고 보고했으나, 그들이 잡은 인물은 형인 가도치였다. 이들은 임꺽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출세에 눈이 멀어 가도치를 때려 죽이면서까지 진실을 덮으려 했지만, 발각되어 중형을 받았다.
이사증의 뒤를 이은 인물이 의주 목사 이수철이다. 이수철은 임꺽정과 한온을 붙잡았다고 조정에 보고했으나 그가 잡은 인물은 윤희정과 윤세공이라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임꺽정 무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으나 고문에 못 이겨 죄를 거짓 자백한 후 사형을 당했다. 당시 의주 목사 이수철도 이들이 임꺽정과 한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온갖 고문을 동원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내었고, 늙은 노파를 잡아다가 임꺽정의 아내라 하며 인두질을 해댔다. 사실이 드러난 이후 이수철은 파직처리 당했지만, 이들 외에도 임꺽정을 잡아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한 관리들은 넘쳐났다. | |
서림의 배반으로 체포된 반적의 우두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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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은 선전관과 금부 낭청에게 임꺽정을 잡아오라고 특명을 내릴 정도로 두려워했다. 조선 땅을 떠들썩하게 했던 임꺽정의 난이 진압된 것은 1562년 1월, 토포사 남치근(南致勤)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서였다. 남치근이 구월산 아래에 진을 치고 군사와 말을 대대적으로 모아 임꺽정 무리들이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며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어서 임꺽정 무리 가운데 일찍이 체포되었던 서림(徐林)이 길잡이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체포 작전이 시작되었다.
서림의 배반으로 궁지에 몰린 임꺽정은 산을 넘어 도망치고 급기야 한 촌가로 숨어들었다. 촌가를 관군이 포위하자 임꺽정은 집 주인인 노파에게 집 밖으로 뛰쳐나가라고 위협했다. 노파가 “도적이야” 하고 외치며 문 밖으로 나가자 군인 차림으로 변장을 한 임꺽정이 노파를 뒤쫓으며 “도적은 벌써 달아났다”고 외쳤다. 임꺽정을 알아보지 못한 군사들은 일제히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러는 북새통에 임꺽정은 군사가 탄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났지만 심한 상처를 입어 멀리 가지 못했다. 멀리서 임꺽정을 알아 본 서림이 “임꺽정이다”라고 외쳤고 이후 관군들은 수많은 화살을 그를 향해 날렸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서림이 배반한 것 때문이다. 서림아, 서림아, 네가 어떻게 투항할 수 있느냐...”
1562년 1월 8일, 임꺽정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들은 명종은 “국가에 반역한 임꺽정 무리가 모두 잡혀 내 마음이 몹시 기쁘다”고 말하며 공을 세운 자들에게 큰 상을 내렸다. | |
임꺽정, 소설 [林巨正]으로 다시 부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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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은 사실은 소설이나 드라마로 더 친숙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 이전 [명종실록]을 비롯한 역사 기록물들은 임꺽정과 그 무리들을 약탈과 살인, 방화를 서슴지 않는 인간들로 묘사하였다. 의적은커녕 대낮에 민가 30여 곳을 불태우고 많은 사람을 살해하거나 심지어 배를 갈라 위엄을 보이는 잔혹한 무리들이었다.
임꺽정이 의적으로 부활한 데는 벽초 홍명희(1888~1968)의 공이 가장 컸다. 사회주의자이자 독립투사였던 홍명희는 신간회 부회장을 역임한 인물로 분단된 이후에는 북한에서 부수상을 역임할 만큼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식민지 시기에 홍명희는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방편으로 민중의 결집을 원했고 그런 의식 속에서 [임꺽정]이라는 대하소설을 썼다.
"림꺽정이란 넷날 봉건사회에서 가장 학대밧든 백정계급의 한 인물이 아니엇슴니까. 그가 가슴에 차 넘치는 계급적○○의 불낄을 품고 그때 사회에 대하여 반기를 든 것만 하여도 얼마나 장한 쾌거엿슴니까." ([삼천리] 1호, 1929)
홍명희가 생각한 임꺽정은 도적이 아닌 민중의 영웅이었다. 실존하는 인물에 역사적 해석을 달리하여 새로운 역사 인물을 재창조한 것이다. 1928년부터 10년간 조선일보에서 연재된 소설 임꺽정은 민족해방운동이자 현실적 저항 운동의 일환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