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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84 : 조선의 역사 126 (명종실록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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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84 : 조선의 역사 126 (명종실록 1)

두바퀴인생 2012. 5. 13. 02:04

 

 

 

한국의 역사 584 : 조선의 역사 126 (명종실록 1)

 

                                                               

 

                                

      

                                                명종의 강릉                                          

 

                   

제13대 명종                                                                         

 

명종(明宗, 1534년 ~ 1567년)은 조선의 제13대 임금이다. 는 환(峘), 는 대양(對陽). 사후 시호는 명종공헌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明宗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이며 중종의 차남으로 문정왕후의 소생이다.

 

중종의 차남으로 후사 없이 죽은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 모후인 문정왕후의 섭정과, 친정 이후에는 외척인 윤원형, 윤원로, 윤춘년, 윤백원, 이량, 심연원, 심통원 등에 의해 정사가 좌지우지되면서 실권이 없었다. 아들 순회세자를 일찍 잃고 이복 조카인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하였다.

 

즉위와 을사사화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이며, 인종의 이복 동생이다. 어머니는 중종의 2번째 비(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이고, 비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이다.

 

성종 때 싹튼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은 연산군 대의 무오사화·갑자사화, 중종대의 기묘사화로 나타나면서 단순한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 차원을 넘어 양반관료층의 분열과 권력투쟁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명종의 즉위는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중종의 첫 번째 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 소생의 세자 호(岵 : 뒤에 인종)를 왕위에 앉히려는 외척 윤임(尹任) 일파의 대윤(大尹)과, 문정왕후 소생의 세자 환을 즉위시키려는 윤원형 일파의 소윤(小尹)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암투는 중종 말년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544년 인종의 즉위를 계기로 윤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자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들이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1545년 인종이 병으로 죽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권력을 장악하여 대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숙청은 윤임이 중종의 여덟째 아들인 봉성군(奉城君)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윤원형의 탄핵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문정왕후는 윤임·유관(柳灌) 등을 사사(賜死)케 하고 봉성군·이언적·노수신(盧守愼) 등을 유배시켰다. 그뒤에도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 계속되어 을사사화 이래 6년 동안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다.

 

을묘왜변과 비변사의 상설기구화

 1555년 세견선(歲遣船)의 감소로 곤란을 겪어온 왜인들이 전라도 지방을 침입한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에 1510년(중종 10) 삼포왜란 때 설치되어 임시기구로 존속해오던 군사기관인 비변사가 상설기구로 되어, 청사가 새로 마련되고 관제상으로도 정1품 아문의 정식아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비변사는 군사문제를 총괄하는 관청으로서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비변사 기능의 강화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쟁수행을 위한 최고기관으로서 정치·경제·군사·외교 등 군국사무 전반을 처리하면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최고권력기관으로서의 역할은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왕권강화의 시도

1553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親政)을 하게 된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이량(李樑)을 이조판서, 그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전랑으로 기용했다. 그러나 이량 등은 왕의 신임을 믿고 파벌을 형성하여 횡렴을 일삼았으며 사림 출신의 관료들을 외직으로 추방했다. 이에 사림들이 반발하자 이량은 사화(士禍)를 꾀했으나 심의겸(沈義謙)에게 탄핵당하여 1563년 숙청되었다.

 

결국 1565년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20년 동안 명종은 자신의 세력기반을 지니지 못한 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서 왕위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윤원형과 보우(普雨)를 내쫓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1567년 34세의 나이로 죽었다. 인순왕후와의 사이에 낳은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일찍 죽어, 왕위는 중종의 9번째 아들인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의 셋째 아들 선조가 계승했다.

 

최후

병약한 명종은 후사도 없이 임종을 목전에 두었는데, 이준경은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 균을 왕재로 보았다. 그러나 외척인 좌의정 심통원은 다른 뜻을 품고 있어 동의할 낌새가 없었다. 그러자 이준경심통원에게 일렀다.

 

"태의가 전하를 진맥해 본 결과 아무 약이 효험이 있다고 하니 좌상께서 내의원 별당으로 가서 그 약을 좀 가져오시지요." 심통원은 수하에게 영상의 명을 대행하게 했다. 그러자 이준경은 눈을 부릅뜨고 심통원을 꾸짖었다. "전하의 환우가 심히 불안한 지경인데 상감께 올릴 약을 어찌 아랫사람에게 시킨단 말이오!"

 

심통원은 얼른 사과하고는 손수 내의원 별당 다락으로 올라가 약을 찾았다. 그때 이준경은 다락으로 통하는 문을 잠궈버렸다. 그리고 다급히 명종을 배알하고는 후사를 지명할 것을 주청했다. "아직 나라의 근본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하교해 주시기 바랍니다." 숨이 턱에 받친 명종이 간신히 입을 열어 "덕흥군 제삼자"라고 말하니 이준경이 뒤를 돌아보고는 큰 소리로 따라 외쳤다. 주서 황대수가 큰 글자로 받아 적어 등에 지고 나갔고, 이로서 하성군이 왕업을 물려받으니 그가 바로 선조였다. 이를 듣게 된 선조는 대비인 인순왕후의 일족에게 감정을 품게 된다. 능은 강릉(康陵)이다.

 

가족 관계

  • 부 : 조선 제 11대 국왕 중종(中宗)
  • 모 :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 왕비 :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 아들 : 순회세자 부 (順懷世子 暊)
    • 며느리: 공회빈 윤씨(恭懷嬪 尹氏)
    • 양자 : 선조 연(宣祖 昖)
  • 후궁 : 경빈 이씨(慶嬪 李氏):초봉 숙의(淑儀), 영조대에 경빈에 추증
  • 후궁 : 순빈 이씨(順嬪 李氏)
  • 후궁 : 숙의 한씨(淑儀 韓氏)
  • 후궁 : 숙의 이씨(淑儀 李氏)
  • 후궁 : 숙의 신씨(淑儀 愼氏)
  • 후궁 : 숙의 정씨(淑儀 鄭氏) - 정귀붕(鄭龜朋)의 딸
  • 후궁 : 숙의 정씨(淑儀 鄭氏) - 정수의 딸
  • 후궁 : 숙의 신씨(淑儀 申氏) - 신언숙(申彥淑)의 딸

 

 

 

 

 

 

                                                  

  

 

 

 

제13대 명종실록(1534~1567년, 재위: 1545년 7월~1567년 6월, 22년)                             

 

1. 눈물의 왕 명종의 등극과 끝없는 혼란

 

인종이 죽자 12세밖에 안 된 경원대군 환이 왕위를 이었다. 그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학문을 좋아하고 총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모후 문정왕훈의 극악스러움에 눌려 평생 눈물로 왕위를 지켜야 했다.

 

명종은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아들이다. 이름은 환, 자는 대양이며 태어나자마자 경원군에 봉해졌다. 이후 인종이 즉위하자 1544년 경원대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병사하자 왕위를 이었다.

 

문정왕후는 원래 자녀를 5명 낳았으나 그 중에 아들은 명종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35세라는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다. 그녀가 명종을 낳았을 때 중종의 첯 번째 게비 장경오아훙의 아들 인종의 나이는 이미 20세였다. 때문에 명종이 왕이 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인종에게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만약 인종이 그대로 죽게 된다면 명종의 왕위 계승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문정왕후는 그런 결과를 노리고 잇었고, 마침내 그것은 이루어졌다.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8년 동안 모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문정황후가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신하게 되자 조정의 대세는 문정왕후의 외척인 윤형원 일파에게 돌아갔다. 윤형원은 문정왕후의 친동생으로 1537년 중종 32년 김안로가 실각한 뒤에 등용된 인물이었다. 그는 중종시대부터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 일파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윤임 일파를 대윤, 윤형원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다.

 

인종 즉위 당시에는 한때 대윤파가 득세하여 이언적 등 사림 세력을 등용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오아후가 수련ㅁ청정을 하게 되자 시태는 반전되었다. 윤형우너은명종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윤임 세력의 제거 작업에 착수했다. 윤형원은 윤임이 중종의 여덟째 아들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려 했다고 무고하는 한편, 인종이 죽을 당시에는 윤임이 성종의 셋째 아들 계성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리고 이를 구실 삼아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하여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사사케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일파인 사림 세력들을 유배시켰다.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을사사화'라 한다.

 

을사사화로 조정을 장악한 윤형원은 미처 제거하지 못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양재역 벽서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윤형원을 탄핵하여 삭직시킨 바 있는 송인수,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 등이 사사되고, 이언적, 백인걸 등 사림 세력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또한 윤형원은 자신의 애첩 정난정을 궁중에 들여보내 중종의 아들 봉성군을 역모와 연루되었다고 무고하여 사사시키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도 많은 인물들을 희생시켰다.

 

윤형원 일파가 이렇게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이른바 '외척 전횡 시대'가 도래했고, 이때부터 명종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윤형원은 막상 권력을 독점하게 되자 그동안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하던 친형 윤원로를 유배시켜 사사시키는가 하면, 자신의 애첩 정난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노비 출신인 그녀를 정경부인 자리에 올려놓았다.

 

또한 정난정은 윤형원의 권세를 이용하여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부를 축적하엿다. 이 때문에 윤형원의 집에는 뇌물이 폭주하여, 한성 내에 집이 15채나 되었으며 남의 노예와 전장을 빼앗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도 없었고, 죽고 사는 것이 그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 오갈 지경이었다. 당시 권력을 탐햇던 조신들은 앞다투어 정난정의 자녀들과 혼인줄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켰고,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불교가 융성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