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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89 : 조선의 역사 131 (명종실록 6) 본문
한국의 역사 589 : 조선의 역사 131 (명종실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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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의 강릉
제13대 명종실록(1534~1567년, 재위: 1545년 7월~1567년 6월, 22년)
3. 명종시대의 주요 사건들(계속)
을묘왜변
을묘왜변은 1555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왜구가 전라남도 강진, 진도 일대에 침입하여 약탈과 노략질을 통해 민간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의 원활하지 못했던 외교관계와 일본 내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발생하였던 사건이다.
당시의 조일 관계를 보면 1544년 사량진왜변으로 조선에서는 왜인의 내왕을 금지시킨 바 있었지만, 대마도주의 사죄와 통교 재개 허용을 바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1547년 정미약조를 맺고 왜인들의 통교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정미약조는 왜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때문에 왜인들은 조선과의 무역에서 여러 가지 규제를 받게 되었고, 거기에다 일본 전역이 전운에 휩싸여 있던 터라 내부의 무역 사정도 좋지 못해 결국 명나라 해안과 조선 해안지방에서 노략질을 감행하게 되었다.
1555년 5월 왜구는 선박 70여 척을 앞세워 전라남도 남해안 쪽에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였고, 어란도, 장흥, 강진, 영암 일대를 횡행하면서 노략질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왜구 토벌대를 전라남도를 급파하였지만 절도사 원직, 장흥부사 한온 등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이 포로가 되는 등 패전하고 말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조정은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 남치훈을 방어사에 임명하여 토벌대를 급파했다. 결국 이들에 의해 왜구가 섬멸되자 대마도와의 무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조선과의 무역 관계가 악화되자 난처해진 대마도주는 조선을 약탈하고 만행한 왜구의 목을 잘라와 사과하며 세견선의 증가를 간청해왔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의 생활 필수품을 돕고자 식량 등의 사정을 고려하여 세견선 5척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일본 내의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고, 왜구의 침입도 줄어들지 않았다.
드디어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시키자 왜구는 단순히 노략질 차원을 넘어 대구모 전쟁을 감행해왔다. 이것이 곧 임진왜란이다. 이 난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통교는 거의 중단되고 말았다.
중종.명종대의 대일관계
삼포는 1407년에 개항하였다. 왜인들의 거주를 허락하였고 세공선도 초기에는 60척으로 제한하였다. 점점 왜인이 늘자 왜리라는 왜인 거주지역을 설정하여 거주토록 했으며 왜인 스스로 자치 행정망을 보유하였다. 또 면세 혜택도 주어지고 자체적으로 세금을 징수하여 대마도주에게 바치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자 거주 왜인 수가 급속하게 늘어나 성종 25년 1494년에는 525호에 3,105명이나 되었다.
성종 이후 조선의 엄격한 교역 통제책과 연산군대의 실정으로 인해 운영상의 부실로 왜인들 특히 대마도인들의 불만이 증가되었다. 변방 관리의 횡포와 접대 위반 사례가 증가하였고 모든 것을 계해약조에 준하여 처리하였다. 그후 재정의 악화로 긴축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고 통제를 강화하자 왜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이에 조정은 회유책으로 일관하며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못했다.
이때 결국 삼포왜란이 발발하였는데, 중종 4년 4월에는 왜구들이 보길도를 침범하여 제주에서 공마를 싣고 오던 배가 왜인들의 습격를 받았다. 당시 대마도주 종재성이 사망하고 종의성이 도주가 되었으며 종성명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삼포의 왜인들은 자신들의 불만 사항을 호소하며 무장봉기도 불사하겠다며 종성명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중종 5년 4월 4일 제포 추장이 종성권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4~5천여 명의 왜인들을 동원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대마도주 종의성은 200여 척의 선단을 동원하여 지원하였다. 왜인들은 부산포를 공격하여 첨사 이우중을 살해하였는데, 이우중은 평소 왜인들을 철저하게 통제하였던 관리로 그들의 원한이 깊어 일차적인 공격 목표가 되었다. 삼포왜란 6일 동안 삼포는 초토화되었고 조선군이 진압하면서 종성권이 전사하고 삼포의 선박은 모두 전소되었다. 살아남은 왜인들은 대마도로 도주하였다. 조선군은 진압 과정에서 272명이 전사하였고 민가 600여 호가 전소되었으며 왜 선박 5척이 격침되었고 300여 명이 살해되었다.
왜란 이후 삼포는 폐쇄되었고 대마도와 통교가 단절되었다. 하지만 대마도는 물자부족으로 대마도주가 국교 재개를 간절히 요청하게 되었는데, 삼포왜란 주모자를 모두 참수하여 머리를 들고 왔으며 피로인들을 모두 송환하였다. 이에 중종 7년 1512년 8월 임신약조를 체결하게 된다. 임신약조는 총 9개조로 되어 있는데, 삼포에 왜인의 거주를 불허하였고 세견선 50척에서 25척으로 반감하였으며 제약 및 구속 사항이 주된 내용으로 징벌적 성격이 강하였다.
임신약조 이후 대마도는 물자부족에 허덕였으나 왜구들의 여전히 침입이 계속되었다. 중종 36년 1541년에는 왜관을 부산포로 옮기게 된다.
왜구들의 침입이 비교적 규모가 큰 것은 중종 17~18년(1522~1523년)의 침입, 중종 39년 1544년 사량진 왜변, 명종 10년 1555년 을묘왜변이다. 당시 일본 본토는 치열한 내전 중이었고 명나라 등지에서부터 화약, 병기 등 제조기술을 습득해와서 군대를 강화하는 한편 선박 건조 기술도 도입하여 견고한 선박을 건조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왜구들의 무장력도 증가되고 있었다.
사량진왜변은 중종 39년 왜선단 20여 척에 200여 명의 왜구들이 사량진(현 통영군 사량면)을 습격하여 약탈하여 피해가 10여 명이었으나 그 영향은 컸다. 조선 조정은 대마도와 통교를 단절하고 3년 후 명종 2년 1547년 대마조주의 재개 요청에 정미약조를 체결하였다. 이는 교역 재개를 허락하였으나 무역량을 제한 하는 등 징벌적 벌칙을 강화하였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1467~1568년 사이 내란시대를 말한다. 당시 왜구는 성행하였고 주로 명의 연안을 노략질하였으며 조선 연안도 출몰하여 침범하였다. 명종 10년에 일어난 을묘왜변은 삼포왜란보다 그 피해 규모가 컸다.
을묘왜변은 명종 10년 5월 왜선 70여 척이 전남 해남 달량포에 침입하여 전라부사 원적, 강흥부사 한온을 살해하고 영암까지 침범하였다. 그러다가 달량포에서 퇴각한 왜구는 천여 명 규모로 제주도 하북포에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제주도 침입 10여 일전 대마도주는 조선 조정에 그 정보를 알려주었다. 천여 명의 왜구가 대마도를 습격하고 90여 척의 선단을 셋으로 나누어 조성으로 향했다는 것이며 나머지는 잘 달래서 대마도에 잔류토록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왜구 침략에 대한 대책을 심각하게 논의 하였으나 해결방안을 강구하지 못하고 대마도주를 회유하자는 이야기만 거론되었다. 당시 영의정 등은 왜구들의 무장력이 강하여 토벌이 어렵다는 이야기만 할 뿐 조신들은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을묘왜변 이후 조선은 비변사를 상설기구로 설치하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게 된다. 왜인 접대를 감축하고 생포한 왜구는 참형에 처하는 등 강력한 조치로 일관하였다. 조선 조정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 전선의 건조를 시도하여 판옥선을 개발, 승자총통 등 선박과 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수군의 이러한 발전에 비해 육군 등 전체적인 국방체계는 조정의 당파싸움과 사회 지도층의 비리와 부패, 각종 군역체계의 부실, 양반들의 면역 부정과 부패, 탐관들의 수탈, 전략.전술의 부재, 일본의 군사력 등 국제적인 정보 부실 등 구조적인 문제점으로 인해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조선의 국방력은 종잇장에 불과한 무기력한 상태로 세월을 보내다가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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