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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90 : 조선의 역사 132 (명종실록 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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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90 : 조선의 역사 132 (명종실록 7)

두바퀴인생 2012. 5. 19. 04:39

 

 

한국의 역사 590 : 조선의 역사 132 (명종실록 7)

 

                                                               

 

                                

                                                     명종의 강릉                                          

 

 

 

  

제13대 명종실록(1534~1567년, 재위: 1545년 7월~1567년 6월, 22년)                             

 

 

임진왜란을 앞두고 조선의 무기발전에 대한 한 네티즌의 참고 자료를 소개한다. 아래 글에 의하면 조선은 전쟁이 별로 없이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다가 보니 전쟁을 소홀히 준비하였고 무기발전을 도모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큰 외침을 당하여 무력하게 무너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 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된다. 청의 팔기군이 초기에는 창업의 주력으로 성장하였지만 말년에는 부패하여 외국 군대와 내부의 반란군에 무력하게 무너졌던 역사적인 사실로도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무력하게 외침을 당하였던 조선이 단순히 전쟁이 없어서 군사력과 무기발전을 도모하지 못해서 당했다는 이야기와는 다르다고 생각된다. 당시 조선은 오랜 당쟁과 사화, 무력한 왕권, 척족 세력들의 권력 남용, 유교 사회의 무에 대한 멸시, 국방제도의 허술 등 국방체계가 무력하였고 부패한 조정의 국방정책과 백성들의 무관심이 결국 조선이 외침을 견뎌내지 못하는 무력한 방위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여기에 더하여 전술.전략의 부재, 국제정인 대외정보의 무지, 문을 숭상하고 무를 무시하였던 조선 양반사회의 사상적, 구조적인 군에 대한 멸시와 부정적인 시각 등이 오늘날 우리 사회와 너무나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라와 백성들이 정신적으로 무너지고 있었으며 군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풍조와 지도층 스스로 군을 기피하려는 현실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군대가 대도시로부터 개발이라는 빌미로 교외로 쫓겨나가야 되고, 이전하려는 군부대가 지자체와 주민들의 반대로 갈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으며, 가진자와 지도층의 자녀들이 군을 면제내지 기피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으며, 군대를 미필해도 번듯이 국가 주요 직책에 진출할 수 있는 사회, 또 군 기지를 건설하는 데 반대에 부딪혀 엄청난 국력이 낭비되고 있는 현실, 군인 가족들이 입주하려는 민간 분양 아파트는 민간 입주자들이 군 가족 입주를 반대하며 데모를 벌이는 사회, 그리고 군 스스로 내부적인 부정과 비리, 부패가 만연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생각할 때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당하던 무력하게 무너졌던 당시의 조선시대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된다.

 

 

 

 

조선의 무기발전

 

문명의 발전이라는 것은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비롯된다.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 혹은 헤겔의 변증법, 손자가 말한 정기론일지도 모른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있고 그 자극에 반응해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가 새로운 자극이 되고, 그 자극으로 인해 다른 사회에 변화가 일어나면 그것이 다시 내게로 파급되고, 인간이 홀로 살아갈 수 없듯 민족이든 국가든 뭐든 주위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앞서 발달한 문명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여러 다른 문명들 사이에서 나타난다. 그리스와 로마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예다.

군사 역시 마찬가지다. 기원전 3천 년 경에 나타난 세계최초의 문명 가운데 하나이던 이집트 제국은 기원전 4세기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사실상 멸망당하기까지 거의 사회적인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파라오가 다스리고 있었고, 여전히 옛신들을 믿고 있었으며, 3천 년 전에 쓰여진 지식들이 여전히 당시에도 유용했었다. 군사적으로도 마찬가지여서 앗시리아가 쳐들어 왔을 때 이집트군의 무기나 전술은 히타이트와 싸우던 당시와 크게 차이가 없었고, 페르시아에 멸망하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이집트를 둘러싸고 있던 사막이라고 하는 천혜의 장벽이 그들로 하여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사막을 건너 멀리 이집트까지 쳐들어 올 적이 없으니 전쟁을 할 일도 없고, 전쟁을 할 일도 없으니 군사적인 어떠한 변화를 모색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문명의 몰락은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기까지 하다.

사실 조선시대 군사적인 발전이 없었던 것은 조선만이 아닌 청과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청이 명을 무너뜨리고 중국대륙을 차지하여 동아시아의 패자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사실상 군사상의 변화라고 한다면 누르하치가 고안한 팔기군 체제가 거의 유일하다 할 정도로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나마 만주족의 황제이며 몽골의 대칸이기도 했던 청의 황제에 의해 몽골과 만주의 기병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일본이야 이미 말한 그대로였고.

결국 이유는 전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이 명을 무너뜨린 이래 청으로서 국운을 걸어야 했던 전쟁은 19세기 아편전쟁이 처음이었다. 일본이야 에도 막부가 시작된 이래 전쟁이라고는 없이 태평성대가 계속되었고. 물론 청이야 여전히 오이라트나 위구르 베트남 등과의 크고 작은 전쟁을 계속해서 치르고 있었지만, 그래봐야 워낙 상대가 상대인 터라 굳이 군사상의 커다란 변화를 요구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인구도 많고 땅덩이도 넓고 어지간히 피해를 입어도 쉽게 보충할 수 있으니 희생을 줄이고자 고민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할 이유도 없었고. 그러니 항상 그 모양일 밖에.

조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워낙 크다 보니 조선이 마치 허구헌날 외침이나 당하는 나라로 여기기 쉬운데, 조선조 600년 동안 전란이라 할만한 것은 임진과 정유의 왜란과 정묘와 병자의 호란 정도였다. 작게는 을묘왜변이나 니탕개의 난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단지 국경에서의 소란에 불과했지 국가 차원에서 나설만한 대단한 싸움은 아니었다. 그나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모두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불과 수십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니 더욱 평화기간은 길고 그만큼 싸울 일이란 없었던 것이다.

조선전기 조선조정이 국방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고려말 워낙 나라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여진에, 몽골에, 홍건적에, 왜구에, 하여튼 거의 매해 외침이 있고 전란이 있었으니 그만큼 군사력에 대한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무선이 화약을 소개하자 바로 그것을 군사적으로 사용하고자 했고, 한정된 군사력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화약무기에 대해 많은 노력과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전기 조선의 군사행동을 보면 고려말 고려를 괴롭혔던 북방으로부터의 침략과 바다로부터의 왜구에 대한 방어차원의 선제공격이 주를 이룬다. 사군육진도 사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음으로써 여진의 침입을 차단하고자 했던 전략적 필요에 의해 세워진 것들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세종 때 사군육진이 개척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여진과의 경계로 삼게 되자 조선은 더 이상 여진의 침입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실제 이 무렵에는 조선의 군사력은 확실히 여전의 각 부족에 비해 한참 우위에 있었고, 조사의와 이징옥이 여진까지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그것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그렇게 한 번 우위를 차지하게 되자 시시때때로 여진족의 부락에 대해 토벌전을 일으켜 여진이 위협적인 세력으로 크는 것을 방지하고 있었으니. 이미 더 이상의 새로운 시도나 변화 없이도 기존의 확보된 힘만으로도 여진족의 위협 따위는 이때에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또 뭘 더한단 말인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또 그럼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된 을묘왜변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승리를 이끌었던 조선의 수군, 그 수군의 주력전선인 판옥선은 을묘왜변 당시 일본의 전선에 비해 당시 조선의 주력전선이던 맹선이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그 대안으로서 개발한 것이었다. 문제는 당시 오히려 육전에서 난을 일으킨 일본군들을 너무 쉽게 제압하는 바람에 일본군에 대한 경시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 김성일과 조선 조정이 일본군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미리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한 마디로 만만하게 본 것이다. 그러다가 임진년 바다를 건너 온 일본군을 보니 그것이 아니라 더 큰 충격에 패닉까지 느끼게 되었던 것이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아니나 다를까 조선의 군사기술에 있어 큰 변화를 준 사건이었다. 먼저 임진왜란을 통해 그 위력이 입증된 일본도와 조총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일본군을 상대로 위력을 보인 편곤을 비롯 명군이 보유하고 있던 홍이포와 불랑기포 등의 유럽에서 수입된 새로운 화포 역시 수입하게 되었다. 전술상에 있어서도 일본군에 대해 특히 위력을 보였던 명의 남병에게서 기효신서의 절강병법을 받아들이게 되었었고. 물론 병자호란 당시 조령전투에서 지나칠 정도로 조총의 비율을 높인 결과 오히려 청군에 의해 유린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고양에서 있었던 기병의 접전으로 청군의 편곤에 비해 조선군의 편곤이 불리한 점을 깨닫고 개선하는 계기도 마련했었으니 역시 그로부터도 배운 바는 있었다 하겠다.

그리고 긴긴 200여 년의 평화... 나선정벌이야 청과 러시아가 국경분쟁을 일으키는 데 괜히 한 다리 걸친 것이고, 실제 조선이 위협을 느낀 군사상의 충돌은 병인양요가 200년 만에 처음이었다. 문제는 이 병인양요에서 어설픈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인데, 신미양요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기는 했지만 미군으로 하여금 물러나게 했고, 덕분에 조선이 서양의 앞선 군사기술에 대한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 되었다. 차라리 일본처럼 무기력하게 개항을 하게 되었다면 앗뜨거라 놀라서 좀더 적극적으로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아무튼 요약하자면 조선에 있어서도 중요한 군사적 발전은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고려말 숱한 외침에서 조선전기 군사적 발전의 동력이 만들어졌고, 을묘왜변에서 판옥선이라고 하는 조선의 주력전선이 만들어졌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후기 조선의 군사력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병자호란에서의 패전과 그에 대한 설욕의지가 조선후기 무려 중앙군의 절반 이상이 화약무기로 무장하는 청과 일본보다도 앞서는 화약무기 무장율로 나타나게 되었었고.

문제는 워낙 조선에 전쟁이 적었다는 것이다. 거의 전쟁으로 날이 새고 날이 지던 유럽과는 달리 - 유럽에서의 군사상의 발전이 근대 들어 비약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워낙 전쟁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역사를 보면 거의 전쟁이 없던 해가 없을 정도이니, 그것도 조선처럼 작은 국경분쟁 정도가 아니라 국가규모의 전쟁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다. 그렇게 전쟁을 하면서도 배우는 바가 없고, 그렇게 전쟁을 하면서도 또 이기려는 궁리가 없다면 그건 바보라 할 밖에.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럽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중국이라는 강대한 제국이 있어 전쟁이 거의 없었던 동아시아,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국경을 맞대고 있어 날만 새면 전쟁이던 유럽, 전훈을 살려 무기를 만들고 전술을 개발하려 해도 일단 전훈이라는 게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던 유럽에 비해 동아시아는 서로간의 왕래마저 그리 쉬운 편이 아니었으니 남의 전쟁을 보고 간접적인 경험이라도 쌓으려 해도 그것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평화와 폐쇄적인 환경과, 필요를 느낄 여지조차 없는데 무슨 군사적 발전이겠는가.

항상 느끼는 것이 조선을 비판할 때 마치 그것이 조선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처럼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조선이니까. 조선이기 때문에. 그러다 건국 이야기까지 나오고. 무슨 한국인이 외계인이거나 다른 세상의 존재도 아닐 텐데 조선만 따로 떼어 놓고 말하는 것이다. 동서고금, 말 그대로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 처한 상황과 놓인 여건이 그러했을 뿐 별달리 특별할 것도 없는 것들인데 말이다. 자학도 이 정도면 어지간히 자만이라 하겠다. 거의 병적인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