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593 : 조선의 역사 135 (명종실록 10) 본문
한국의 역사 593 : 조선의 역사 135 (명종실록 10)

명종의 강릉
제13대 명종실록(1534~1567년, 재위: 1545년 7월~1567년 6월, 22년)
5. 명종실록 편찬 경위
<명종실록>은 총 34권 3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545년 7월부터 1567년 6월까지 22년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명종실록>의 편찬 과정에 대해서는 실록에 정확하게 적혀 있지 않고, 다만 <선조실록>에 1568년 8월 춘추관에서 영의정 이준경, 우의정 홍섬의 주재하에 편찬회의가 개최되었고 총재관 홍삼 이하 당상, 낭청의 임명이 있은지 3년 뒤인 1571년 4월 완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 편수관으로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던 유희춘의 <미암일기>에는 더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어 당시의 편찬 과정이 파악되고 있다.
편찬 작업에 참여한 인물은 김춘추관사 홍섬, 지춘추관사 오경, 이황 등 9인, 동지춘추관사 박순 등 10인, 편수관은 이제민 등 20인, 기주관은 유도 등 17인, 기사관은 홍성민 등 20인으로 총 77인이었다.
<명종실록>의 특징은 여타 실록과 달리 보기에 편리하게 편찬되었다는 것인데, 예를 들자면 사실의 기록을 연대순으로 배열하되 날짜가 바뀌면 줄을 바꾸어 기록했다던가, 또는 같은 날의 기사도 대체적으로 국왕 및 왕실에 대한 일, 대외관계, 국정 집행 및 이에 대한 의정부, 삼사, 육조의 상서, 지방행정, 천문지리학 등의 순으로 배열하여놓았다는 점, 그리고 사론을 본문과 분리시켜 그 위치를 명확히 했다는 점 등이다.
명종시대의 평가
역사에는 종종 여자가 정치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 실정으로 이어져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국고를 탕진하였으며 외척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며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거나 심지어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라의 여왕들 중 나라를 망친 진성여왕이 있었고, 당나라는 측천무후가 국호를 바꿀 정도로 왕을 능가하는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국호를 바꾸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까지 했다. 고려시대는 천추태후가 나라의 근간을 흔들었으며 조선시대는 대표적으로 연산군대의 폐비 윤씨, 명종대의 문정왕후, 고종대의 명성왕후 등 나라를 뒤흔든 여걸들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이 하나같이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바람에 나라는 하나같이 어지러워졌고 백성들은 토탄에 빠져 최악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 여자들은 자신의 자식이 우선이여 그 다음은 처가집 외척들의 등용이다. 그러면서 나라의 발전보다는 사리사욕과 자신의 집안의 융성을 우선시 하였고 권력에 대한 탐욕이 극심하였다. 조선 명종대의 문정왕후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하던 여자였다.
아래는 문정왕후에 대한 글로 한 네티즌의 글을 참고로 싣는다.
조선의 역사는 당쟁의 역사'라 말할 만큼 당쟁은 조선사에서 큰 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당쟁을 야기한 인물이 여자라면 믿을 수 있을까. 쉽게 수긍이 안 가는 사실이긴 하지만, 그 주인공은 바로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의 세번째 부인 문정왕후 윤비이다. 학자들은 그녀에게는 천운이 많이 작용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편인 중종이 줏대가 약한데 비해 문정왕후는 여장부로서의 기질이 농후했다.
이런 그녀의 성격은 당쟁을 불러온, 그리고 조선의 여인들 중에서 여걸로 꼽히는 중요한 이유라 할 수 있다. 중종의 첫째 부인은 단경왕후 신씨였다. 단경왕후의 아버지는 연산군의 처남이자 우의정 이었던 신수근이다. 중종반정을 통해 연산군을 몰아내고 세력을 잡은 공신들은 신수근을 죽이고, 후환을 염려해 단경왕후마저 내쫓아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새 왕비를 맞아들이도록 종용했는데, 그녀가 인종을 낳은 장경왕후 윤씨이다.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은 지 7일만에 산고로 죽은 불행한 여인이었다.
중종은 2년 후 새로운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바로 문정왕후 윤씨이다. 중종은 재위 기간이 39년이나 되었지만, 천성이 약한 기질을 타고나 제대로 왕권을 확립하지 못한 채 신하들에게 휘둘리기만 했다. 중종의 뒤를 이어 30세의 세자가 즉위하였는데, 그가 바로 12대 인종이다. 인종은 총명하고 효성이 깊은데다 성품 또한 너그러운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으로 성군이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성격은 부왕인 중종과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계모인 문정왕후의 장부적 기질을 압도하지 못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생후 7일만에 어머니를 잃은 인종은 계모인 문정왕후 슬하에서 자랐다. 인종은 어머니 대신 문정왕후에게 부모처럼 효도했지만, 그녀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었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종을 핍박하였다. 그러더거 자신이 아들 명종을 낳게 되자 노골적으로 인종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부왕 중종의 죽음으로 상심한 인종을 더욱 매몰차게 몰아붙였으며 부왕의 빈소에서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야위어 가는 그를 하루 빨리 죽이고 자신의 아들을 왕좌에 앉히려고 했으니 핍박의 정도가 어떠했는지는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결국 인종은 재위 8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실록에는 "인종이 부왕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여 병을 얻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야사에는 인종의 죽음과 관련하여 반드시 문정왕후가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내용인 즉, 언제나 인종을 구박하기만 했던 문정왕후가 하루는 웃으며 문안인사를 온 인종을 반겼다. 그리고 인종에게 떡을 대접했는데, 아무런 의심 없이 떡을 먹은
인종이 그 뒤로 앓기 시작하면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인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명종이다. 명종의 즉위는 비극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12세의 어린 나이였던 명종을 대신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녀의 시대라 할만큼 거의 모든 권력이 문정왕후 손에 쥐어져 있었다. 가장 큰 비극은 을사사화의 발발과 당쟁의 원인 제공이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권력이 끝이 없을 것 같던 문정왕후도 명종 20년 4월 6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녀의 권세를 등에 업고 행세하던 보우도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살해당했다. 당대를 풍미하던 여장부 문정왕후 윤비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조선의 정치적 혼란을 가져온 채 태릉에 묻혔다. |
'인종죽음' 뒤에는 계모 문정왕후가 있었다 권력, 천운이 따라야
문정왕후의 일생은 천운이 작용했다는 얘기가 많다. 자신이 왕비에 오른 것은 중종의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출산하자마자 승하했기에 이뤄졌고, 아들 명종 역시 인종의 요절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질이 독하고 질투가 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설에는 인종이 그녀가 건넨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는 설도 있다.
인종은 조선의 역대 왕들 중 가장 짧은 치세를 남긴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8개월여 왕위에 머물며 지극한 효성과 너그러운 성품, 금욕적인 생활 등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으로 당시 사람들은 성군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성품은 계모 문정왕후의 표독하고 사악한 성격을 방치하게 했고 자신의 생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생모(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고 7일만에 죽자, 그는 문정왕후 손에서 자라게 된다. 인종은 계모이긴 했지만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 문정왕후에게 효도를 다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왕후는 항상 인종을 원수 대하듯 했고 문안 인사차 들른 인종에게 “우리 모자(그녀와 명종)를 언제쯤 죽일 것이냐”고 닥달하며 괴롭혔다. 그러나 인종은 자신의 효성이 부족함을 개탄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며 지냈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명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자식을 두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정사에는 ‘인종이 도학사상에 깊이 매료돼, 철저한 금욕생활을 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종, 독살설의 시초
야사에 따르면 문정왕후 윤씨는 몇 번이나 인종을 죽이려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그와 세자빈이 잠들어 있는데 주위에서 뜨거운 열기가 번져 일어나 보니 동궁이 불에 타고 있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아내를 깨워 먼저 나가라고 하고 자신은 조용히 앉아 서 타 죽겠다고 했다고 한다. 누가 불을 지른 것인지 알았기 때문. 그 때 밖에서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중종의 목소리였다. 인종은 그 소리를 듣고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겐 효행이 되나 부왕에게는 불효이자 불충이라고 말하며 아내와 함께 불길을 헤쳐 나왔다.
이런 연유로 인종의 죽음에 문정왕후가 개입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정사인 ‘인종실록’에는 ‘인종이 부왕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야사에는 어김없이 문정왕후가 등장한다. 즉 그녀가 독살했다는 것. 매번 인종을 핍박했던 대비 윤씨가 하루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문안인사차 온 인종을 반겼다. 그리고는 떡을 대접했다.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반겨주는 것에 감격한 인종은 아무 의심 없인 그 떡을 먹었다. 그 후 인종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숨을 거두었다. 인종의 장례도 독살설에 설득력을 갖게 했다. 인종의 장례는 ‘갈장(임시로 빨리 장례를 지내는 것)’으로 집행됐다. 문정왕후를 따르던 세력들이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인종은 독살설의 시초 임금이 됐다.
불교 부흥시대 이뤄
그녀는 명종을 대신해 8년간 수렴청정을 했는데 왕권을 완전히 장악, 효를 빙자하여 아들인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수렴청정 기간 중 윤원형은 인종의 외척 세력들이었던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일파를 모두 제거하고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농단하였다. 문정왕후 윤씨는 수렴청정을 끝내고도 명종의 정사 운영에 지나치게 간섭을 했다. 심지어 왕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매질을 하거나 독설을 쏟아 붓기도 했다고. 이런 지난친 집권욕은 명종 시대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많은 선비의 피를 빼앗아간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양주의 백정 임꺽정이 3년여 간이나 황해도와 경기도 일원에서 횡행했다. 또 밖으로는 삼포왜란이 일어나전라도 및 남해안 일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명종은 문정왕후에 반기를 들며 을사사화 때 죽은 선비를 신원하고 신진세력을 등용하고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했으나 번번이 어머니의 벽에 막혀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문정왕후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키고 폐지됐던 승과와 도첩체를 실시하기도 했다. 또 승려 보우를 총애해 병조판서직에 재수하는 등 사대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문정왕후와 승려 보우와의 관계를 의심하기도 했다. 문정왕후 사후 보우는 유배지에서 죽고 불교는 다시 배척당하게 된다. |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595 : 조선의 역사 137 (선조실록 2) (0) | 2012.05.24 |
---|---|
한국의 역사 594 : 조선의 역사 136 (선조실록 1) (0) | 2012.05.23 |
한국의 역사 592 : 조선의 역사 134 (명종실록 9) (0) | 2012.05.21 |
한국의 역사 591 : 조선의 역사 133 (명종실록 8) (0) | 2012.05.20 |
한국의 역사 590 : 조선의 역사 132 (명종실록 7) (0) | 2012.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