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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98 : 조선의 역사 140 (선조실록 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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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98 : 조선의 역사 140 (선조실록 5)

두바퀴인생 2012. 5. 27. 11:11

 

 

 

 

한국의 역사 598 : 조선의 역사 140 (선조실록 5)

 

                        

                                                                   

   
▲ 의인왕후릉(왼쪽)에서 본 선조의 능.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이 둘러쳐져 있고,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된 병풍석이 있으며, 난간석과 혼유석 등 전형적인 석물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1. 문치주의자 선조의 등극과 붕당정치 시대의 도래(계속)

 

선조의 비 의인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조정은 별 수 없이 후궁 소생 중에 세자를 책봉해야 했다. 그때 좌의정이었던 서인의 거두 정철은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삭탈관직되었다.

 

이 사건으로 서인 세력은 실각하게 되었는데, 정권을 잡은 동인들은 실각한 서인들에 대해 유혈 숙청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 숙청 과정에서 동인은 다시 두 파로 나누어진다. 정철 치죄 과정에서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과격파와 귀양을 보내야 한다는 온건파로 나누어진 것인데, 과격파인 전자를 북인, 온건파인 후자를 남인이라 했다.

 

이러한 분당 사태로 정계가 당파싸움에 휘말리게 되자 조정은 더욱 불안정해지고 국력도 점차 쇠약해졌으며, 변방 야인들의 노략질도 더욱 극성스러워지고 있었다.

 

야인들은 1583년과 1587년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이탕개가 주동이 된 이 반란으로 한때 경원부가 함락되고 부내의 관할권이 완전히 장악당하자 조정은 온성부사 신립과 첨사 신상질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도록 했다.

 

한편 1590년 왜의 동태가 수상하다는 판단에 따라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을 왜국에 보내어 그곳 동향을 살피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통신정사 황윤길은 왜국이 전쟁 준비에 한창이라고 보고하면서 그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고, 통신부사 김성일은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 것 없고 군사 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기에 전쟁에 대비히는 것은 민심만 혼란스럽게 할 뿐이라고 했다. 이런 의견 대립은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인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결국 김성일의 주장대로 전란에 대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후 김성일은 이 일로 인해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임진왜란 중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성일의 주장과는 달리 이듬해 1592년 4월 왜국은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해왔으니,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조일전쟁)이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에 습격한 고니시 부대에 의해 부산포가 함락되면서 이어 동래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무서운 속도로 북상하여 상주에서 급조한 이일의 조선군을 괴멸시킨 후 보름 뒤인 4월 29일 충주를 장악했고, 탄금대에서 급편 방어전을 펴고 기다리던 조선군 최고 정예부대인 신립의 7천 조선 기마대를 괴멸시킨 뒤, 5월 2일에는 한강을 방어하던 조선군이 뿔뿔이 도망치자 한양에 무혈입성 하였다. 이후 북진을 계속한 왜군은 개경과 평양을 함락시키고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을 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급기야 왕이 피난해 있던 의주성 주위만 남겨 놓은 채 함경도 일원까지 점령당해 명나라에 원군을 청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수군 이순신의 활약과 의병의 봉기, 명나라의 원군에 힘입어 선조는 적의 포로가 되는 신세는 면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다시 왜군을 남쪽으로 격퇴하여 이듬해인 1593년 4월 한성을 수복하였다. 그러자 왜군은 남쪽으로 물러나 경상. 전라도 일원에 왜성을 구축하면서 명나라와 회담을 하면서 한동안 소강 상태가 지속되다가 결국 명과 왜의 화의가 깨지면서 6년이나 지나 1597년에 정유재란이 발생했지만, 1598년 8월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은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7년 동안 지속된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전란으로 인한 피해 복구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력을 쏟는다. 그래서 스스로 음식과 의복을 절제하여 사치를 배격하는 한편, 농토를 개간하고 양식을 절약하는 정책을 실시해 민간 경제를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또한 민간의 사기를 돋우고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전란 중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공신을 녹훈하였다.

 

하지만 선조의 전란 복구 노력은 거듭되는 흉년으로 인해 쉽게 효과를 볼 수 없었으며, 조정은 당쟁이 더욱 악화되어 혼란이 점차 가중되었다. 결국 선조는 전란의 뒷수습을 채 마무리짓지 못한 채 1608년 59세를 일기로 41년 동안의 치세를 마감해야 했다.

 

선조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일부 신하들을 불러놓고 자신의 나이 50세가 넘은 1602년에 19세의 어린 신부 인목왕후를 맞아들여 낳은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하지만 선조의 급서로  왕위를 이은 세자 광해군이 즉위함으로써 그의 유언은 오히려 영창대군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선조는 의인왕후를 비롯하여 총 8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그들에게서 14남 11녀의 자녀를 얻었다. 능은 목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