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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인왕후릉(왼쪽)에서 본 선조의 능.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이 둘러쳐져 있고,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된 병풍석이 있으며, 난간석과 혼유석 등 전형적인 석물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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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00 : 조선의 역사 142 (선조실록 7) 본문
한국의 역사 600 : 조선의 역사 142 (선조실록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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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3. 사림의 분열과 붕당정치의 전개
16세기에 이르러 조선의 정치 형태는 당파를 형성하여 집단적인 논쟁을 수반하는 투쟁 형태로 발전했다. 이는 외척정치가 종식된 선조 대에 정권을 장악한 사림 세력이 다시 학맥과 인맥, 사상적 차이로 인해 붕당을 형성한 결과였다.
사림 분열의 직접적인 요인은 1575년에 발생한 명종 비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과 신진 시류 김효원의 암투에서 시작되었다.
김효원이 인사권을 쥐고 있는 전량직에 천거되자 심의겸은 그가 윤형원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권세에 아부한 소인배라고 비난하면서 그 같은 요직의 적임자가 아니라고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효원은 전량직에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뒤 김효원은 다른 자리로 이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그 후임으로 전량직에 천거되었다. 그러자 김효원은 왕의 외척이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전량직에 앉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며 심충겸의 전량직 취임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와 같이 전량직을 둘러싼 두 사람의 대립이 가속화되고 있었는데, 다시 이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벼슬아치와 사류들이 학맥과 인맥에 따라 두 편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그리고 급기야 정치적, 이념적 성격을 띤 붕당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들 파벌을 동인과 서인으로 불렀는데, 심의겸의 집이 도성 서쪽 정동에 있었고,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 건천동에 있었던 까닭이다.
이들의 분파는 비록 단순한 감정 대립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내부는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학맥과 사상을 달리하는 세력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동인은 '주리철학적 도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형성된 이황, 조식 문하의 '영남학파'였고, 서인은 '주기철학에 근거를 두고 형성'된 이이, 성혼 문하의 '기호학파' 사류들이엇다. 이러한 학맥과 사상의 차이는 붕당정치를 기반으로 한 당쟁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유교 정치사상에서 원래 붕당정치는 금기 사항이었다. 그러나 중국 송대에 들어오면서 정치 참여 자격층 내지 정치 참여 의식층이 확대됨에 따라 전통적인 붕당관은 크다란 변모를 겪게 된다. 즉 구양수와 같은 인물은 '붕당을 공도의 실현을 추구하는 자들의 모임'인 '군자의 당'과 '개인적인 이익을 도모'를 일삼는 '소인의 당' 두 가지로 나누어, 전자를 '진붕', 후자를 '위붕'이라고 규정하고 군주가 진붕의 승세를 유지시킨다면 정치는 저절로 바르게 이끌어진다고 하였다. 성리학의 대성자인 주희 역시 기본적으로 구양수와 견해를 같이하면서 더 나아가 붕당이 있는 것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군주까지도 군자의 당에 끌어들이도록 하여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이론은 붕당정치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킨 이론이나 인간 사회의 탐욕을 무시하고 다소 이상적인 성향을 띤 붕당론이라고 판단된다.
16세기 조선은 전통적인 붕당관과 성리학의 붕당관이 혼재되어 엇갈리고 있었다. 훈척 세력은 한, 당대의 붕당관에 바탕을 두고 사림의 세력 결집을 비판하는 동시에 탄압의 구실로 삼았으나, 사림계는 구양수의 붕당론에 근거하여 권세로써 정권을 독점하고 있는 훈척 세력을 '소인의 당'이라고 비난하였다.
사림 세력은 선조 대에 이르러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고 구양수의 붕당론에 따라 당파를 조성하기에 이른다. 이의 시초가 바로 동인과 서인이엇다. 주리론자들로 구성된 동인과 주기론자들로 구성된 서인들의 정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극한적인 대립 양상을 띠게 된다.
동서로 갈라진 뒤 대사헌 이이는 이들 두 당의 충돌을 극소화하기 위해 심의겸과 김효원을 각각 외직인 개성유수와 부령부사로 물러앉게 한다. 이후 1580년 낙향했던 심의겸이 다시 예조판서에 제수되자 동인인 장령 정인홍이 그를 탄핵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나, 이이의 중재로 정치적인 파장이 확대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584년 중재자 구실을 하던 이이가 죽자 동인과 서인은 본격적인 정치 투쟁을 감행한다.
이발, 백양유 등의 중도파 세력이 동인에 가세해 서인의 거두 심의겸을 탄핵하자 서인 중에 탈락자가 생기면서 심의겸도 파직되고 조정은 점차 동인 세력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인이 거의 조정을 장악했다고 판단했을 무렵인 임진왜란 발발 직전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발생하여 관련자 1천여 명이 참살당하거나 유배당하는 비극적인 '기축옥사'가 발생하게 되고 조정은 다시 서인들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된다.
정여립은 원래 서인 세력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편에 들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 박순을 비판한 인물이었다. 서인 세력들은 정여립의 배반을 비판하였고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린다.
그가 서인을 공격하게 된 구체적인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 그가 이조전량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던 적이 있긴 햇으나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직선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의 성향과 일치하였던 것이 동인에 동조하게 된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쨌던 그가 이이를 공격하게 된 이유로 서인의 미움이 그에게 집중되었을 것이고, 선조는 그의 이당에 대해서 주관과 이념이 뚜렸하지 못한 점을 비난하였다. 그래서 그는 동인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관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정여립은 성격이 직선적이고 활발하여 장부의 기질이 농후하였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낙향한 후에도 동인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고 고향 진안 죽도에서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달 모임을 갖는 등 세력을 규합하면서 준군사 세력을 확장하여 나갔다.
1587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하였을 때는 관군들이 왜군을 물리치지 못하자 당시 지방 관리의 요청에 의해 대동계를 동원하여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 이것은 조정에 불길한 여론을 조성하였는데, 그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어 관군을 능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의 대동계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승복, 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 기인, 모사 세력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조정의 주목을 받게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황해도관찰사의 고변이 선조에게 전해지자 조정은 커다란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조정과 선조는 경악하였다.
이 때문에 정여립과 그 일당에 대한 체포 및 진압 작전이 시작되었다. 관군이 정여립을 체포하기 위해 진안으로 밀려들자 정여립은 아들과 함게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점점 좁아지자 결국 스스로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서인의 정철이 선조에게 청원하여 위관이 되어 사건을 조사하면서 동인의 정예 인사들이 대부분 제거되었고 이때 숙청된 인사는 장살로 죽은 이발을 포함하여 약 1천여 명에 육박하였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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