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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01 : 조선의 역사 143 (선조실록 8)

두바퀴인생 2012. 5. 30. 03:27

 

 

 

 

한국의 역사 601 : 조선의 역사 143 (선조실록 8)

 

                        

                       

   
▲ 의인왕후릉(왼쪽)에서 본 선조의 능.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이 둘러쳐져 있고,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된 병풍석이 있으며, 난간석과 혼유석 등 전형적인 석물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3. 사림의 분열과 붕당정치의 전개(계속)

 

이 옥사로 인해 서인이 조정을 장악하긴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591년 정철이 건저의(세자 책봉에 관한 의견) 문제로 실각하자 다시 동인이 득세하였기 때문이다. 건저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선조에게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는 병약하여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후궁 소생의 왕자들 중에 왕세자를 책봉해야 했는데, 이 일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어 쉽사리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때 이 건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시 좌의정이던 정철은 우의정 유성룡, 부제학 이성중, 대사헌 이해수 등과 상의하고 선조에게 건저(왕세자를 세우는 일)할 것을 주청하려 하였다. 정철은 또 한편으로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와도 이 문제를 상의하고 최종 결정을 위해 자리를 마련 하기로 하였으나 이산해는 두 번이나 약속을 어기고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이산해는 이 문제를 이용해 정철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이산해는 정철과 건저 문제를 의논하기로 하는 한편, 후궁 인빈 김씨의 오빠인 김공량과 결탁하여 계략을 꾸몄다.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 김씨 소생인 신성군을 총애하는 것을 알고 김씨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올리고 그들 모자를 죽이려 한다고 무고하였다. 그러자 인빈 김씨는 선조에게 이 내용을 전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선조는 매우 진노하였다. 선조도 이불밑 송사에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정철이 경연장에서 건저 문제를 주청하자 선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대노하였다. 그자리에 잇던 유성룡, 이산해는 침묵을 지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철은 삭탈관직되고 같은 서인이었던 이성중, 이해수 등은 모두 강등되어 외직으로 쫓겨났다.

 

정철이 실각하자 동인은 서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감행했다. 말하자면 정여립 모반 사건에 대한 보복을 할 기회를 맞은 셈이었다. 서인의 주요 인사는 대부분 숙청되고 조정은 완전히 동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동인은 이때부터 인조반정이 있기까지 30여 년을 집권하게 된다.

 

그러나 동인은 정철의 치죄 과정에서 남북으로 갈라서고 만다. 정철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사형을 시켜야 된다는 강경 주장을 펴던 이산해 일파와, 유배로 끝내야 한다는 온건론을 펴던 우성전의 대립이 이러한 분당 사태를 유발하였다. 또한 이산해는 전랑 천거 문제로 유성룡과도 대립하게 되는데, 이것도 분당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에 유성룡과 개인적인 알력이 있던 이발이 이산해와 결합하게 된다. 그래서 유성룡, 우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파를 남인, 이산해와 이발을 주축으로 하는 파를 북인이라고 했다. 이것은 유성룡이 영남 출신이고 우성전 집이 남산 밑에 있었는 데 반해 이산해의 집이 한강 북쪽 편에, 이발의 집이 북악산 밑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유래됐다.

 

이 남인과 북인의 학맥을 살펴보면 근본적으로 둘 다 주리론을 주창한 영남학파였으나 남인은 이황 문하였고, 북인은 조식의 문하이면서도 이이, 성혼 등과 교우 관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철저한 인맥을 중심으로 당을 형성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분당 이후 남인은 우성전, 유성룡, 김성일 등을 중심으로 한때 정권을 잡았으나, 조식의 문하인 정인홍이 1602년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정했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삭직케 함으로써 남인들이 물러나고 북인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정권을 장악한 북인들은 홍여순과 남이공의 대립으로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분파된다. 이산해, 홍여순 등 노장들이 영도하는 당을 대북이라 했는데 기자현, 이이첨, 허균 등이 여기에 속했고, 남이공, 김신국 등 소장 세력이 이끄는 당을 소북이라 했는데 여기에는 유영경, 박이서, 성준구 등이 참여했다.

 

이렇게 북인이 소북과 대북으로 갈리자 남인은 서인과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이에 대응했지만 어쨌던 선조 말기에는 북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노장들인 대북 세력은 정권을 거의 독점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대북은  광해군 대에 가서 내부에서 알력이 생겨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폐위를 주장하던 골북과 육북, 이를 반대하던 중북으로 다시 세 분파로 분리되게 된다. 이때 골북을 주도한 인물은 이산해였고, 육북은 홍여순, 이이첨이었으며, 중북은 유몽인이었다.

 

이렇듯 끝없는 분파를 통해 조선의 붕당정치는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각 당파들은 일당 독재의 경향을 보이면서 처음에는 미숙함을 드러냈지만 후에 인조 대에 가서 서인과 남인이 서로 공조하면서 상호 비판하는 체제를 갖추어 붕당정치의 참모습을 실현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당쟁으로 인해 조선이 망했다는 그릇된 인식을 강요받아왔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강요된 이같은 식민사관의 근본 문제는 바로 붕당정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되었다는 데 있다.

 

당쟁, 즉, 붕당정치에서는 상호 견제하고 대립하는 것이 곧 상호 공존하는 방법이었다. 붕당정치의 본질적인 취지는 바로 일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원리는 현대의 민주주의정치에서도 똑 같이 적용되고 있다.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제 점령되던 시기를 돌이켜보아도 이것은 명백해진다. 흔히 조선 말기를 당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대원군과 민비의 외척, 인척 세력의 독재가 황행하던 시기였다. 이 사실은 조선을 망하게 한 원인이 당쟁이 아니라 일당 또는 일부 세력의 독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당쟁, 즉 붕당정치는 결코 식민사관에서 강요받았던 '망국적 권력다툼'이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붕당정치가 소인의 당이 아닌 군자의 당으로 상호 세력을 견제하며 대립하더라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당리당략을 떠나 공익을 우선시 하고 사익을 버릴 줄 아는 붕당정치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조선의 멸망이 외척의 권력 독식과 부패에 버금가는 당쟁이 국력을 소모시켜왔고 파당과 내분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정치 사회적인 갈등을 증폭시켜 온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정치 현실을 살펴 볼 때 조선에 버금가는 당쟁이 전개되고 있으며 여권의 권력 독식은 사회적으로 격심한 불평등, 갈등과 부패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수와 진보, 주류와 비주류, 당권파와 비당권파, 박씨파와 이씨파, 여권과 야권 등 정치투쟁이 국익에 우선시되고 있으며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서 선거철이면 통합과 분리,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붕당정치의 본질을 상실한지가 오래다. 정치가 구태정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국가 발전에 발목을 잡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나라가 망하는 것이 국론이 분열되고 권력 독식으로 사회적으로 부패지수가 높고 정의와 공정이 사라진 사회가 멸망의 첩경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