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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02 : 조선의 역사 144 (선조실록 9)

두바퀴인생 2012. 5. 31. 04:47

 

 

 


 

 

 

한국의 역사 602 : 조선의 역사 144 (선조실록 9)

 

                        

                                                                                   선조의 목릉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4. 임진왜란과 조선 사회의 변동 1

 

전쟁발발 이전 상황

 

임진왜란이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왜국이 조선을 침범한 사건을 말하며, 1차를 임진왜란, 2차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포괄적 의미에서 1,2차를 합쳐 통상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이 사건을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의 역'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이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선조 대의 조선은 약 2백 년 동안 부분적인 외침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쟁을 치른 적이 없는 나라였다. 때문에 조선 전역은 불시에 예상되는 전쟁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정은 명종 대에 외척 세력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자행한 학정의 잔재들을 정리하고 붕당정치의 기반을 닦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붕당정치는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리메김을 하지 못하고 세력 경쟁으로만 치닫고 있던 중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양반계층은 붕당정치에 대한 참여만을 모색하고 있었고, 국방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왜국의 상황은 달랐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랫동안 지속되던 전국시대를 종결하고 나라를 하나로 통일한 시점이었다. 15세기 후반에 상인을 앞세운 서양 세력이 점차 일본으로 밀려들었고, 그 결과로 일본에는 신흥 상업도시가 발전하여 종래의 봉건적 지배 형태가 위협을 받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상업도시를 기반으로 한 신흥 세력이 힘을 키우자 위협을 느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흥 세력의 힘을 직접 자신이 토사구팽시키는 것보다 그들의 힘을 밖으로 내몰고 국민을 하나로 뭉치기 위한 방책을 모색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외부로의 힘의 투사였다. 이를테면 전국시대를 통해 얻은 전쟁 수행 능력을 효과적으로 소모시키고 신흥 세력들의 힘을 축소시키기 위해서 국제전을 벌이는 일거양득의 전략을 구사하려 했던 것이다.

 

'대륙 정복'이라는 구호를 내건 도요토미는 1589년 대마도주에게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서로 수호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이 조선과 수호하려는 목적은 서로 힘을 합쳐 명을 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마도주는 가신들을 조선 조정에 보내어 서로 통호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제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선조는 찬탈시역한 나라의 사신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정2품 이상의 대신들이 모여 숙의한 끝에 관례대로 사신을 받기로 합의하고 선조에게 건의하여 일본의 수교문을 받게 되는데, 내용이 오만무례하다는 이유로 보서(사신의 서찰)만 받고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은 채 회답을 보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수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통신사를 보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마도주 가신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후 몇 번에 걸쳐 일본은 통신사를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1589년 9월경에 여러 차례 논란을 거듭한 끝에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동시에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0월에 정여립 모반 사건이 터져 관련자 1천여 명을 처형, 유배보내는 등 조정의 대혼란 등으로 결정이 다시 지연되다가 11월 중순쯤에 겨우 통신사 일행을 선정했는데, 통신정사는 황윤길, 부사는 김성일, 서장관에는 허성으로 결정했다.

 

통신사 일행은 1590년 3월에 일본으로 떠나 이듬해 3월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통신사로 갔다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일본 정세에 대한 견해 차이로 조정은 한동안 동인과 서인 사이에 논박을 벌이고 있었다.

 

서인인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는 등 반드시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데 반해 동인인 김성일은 전쟁을 일으킬 조짐이 없을 뿐 아니라 도요토미는 두려워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고 하였다. 이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하였고, 김성일을 수행하였던 황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간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잘라져 자당의 인물을 비호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동안 외침없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조선 조정은 어리석은 결론을 내고 말았다.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전쟁설을 퍼뜨려 민심을 혼란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 조정이 엄청난 오류를 범하게 되는데 여러 차례 대마도주의 경고와 분위기를 전달하였으며 그래서 왜국의 전쟁 의도를 알면서도 무시하였다는 점이다. 그만큼 조선은 국제정세에 어두웠고 한편으로 왜국을 얕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임진왜란의 발발 원인이 비록 일본 국내정세에 따른 원인으로 치부하기에는 조선은 너무나 허술하였고 무방비 상태로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그동안 성을 수축하는 등 전쟁에 대한 방비를 하던 것마저 각 도에 명을 내려 중단시켰다. 이후 선위사 오억령이 "일본이 다음 해에 조선의 땅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하려 한다."는 보고를 했으나 묵살당하고 도리어 파직을 당하고 말았다.

 

그 후 왜관에 머무르고 있던 왜인들이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어 왜관이 텅비게 되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그때서야 조선 조정은 일본의 대대적인 침략을 감지하고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을 전라감사, 윤선각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을 구축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로 신립을 경기도와 황해도에, 이일을 충청도와 전라도에 도순변사로 삼아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때가 늦은 조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