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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변화와 기회에 대하여

우면산의 봄 15 : 탐욕에 찌든 우물안 개구리들......

 

 

 

우면산의 봄 15 : 탐욕에 찌든 우물안 개구리들......

 

                                                                            

 

                                                         철쭉이 화사하게 핀 지나번 찍은 사진, 흰철쭉과 맑은 하늘이 아름답다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폐비 윤씨가 성종에 대한 투기로 인해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고 인수대비의 분노를 싸서 폐서인되어 궁궐를 쫓겨나는 장면이 어저께 방영되었고, 드라마는 조선 왕실의 내면을 보여주며 연산군의 광기가 나타날 클라이막스를 향해 진행되고 있다.

 

또 드라마 '무신'에서 고려의 승려 김윤후가 몽고 대원수 살리타이를 살해하는 장면이 지난 주 방영되었다. 고려 시대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불교가 퇴페하여 가기는 했으나 국란의 위기에 스스로 의병이 되어 처인성 전투에서 김윤후가 이끄는 승병들이 몽고군을 끈질기게 추격하며 일격을 노리다가 자만심이 빠져 소규모 군사들만 데리고 야간 달구경을 나갔다가 고려 승병들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고 김윤후의 칼에 허망하게 죽음을 당했다. 김윤후는 살리타이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그의 목을 쳤다.

 

"고려의 수많은 장졸들과 백성들의 흘린 만든 피에 대한 응징이며 그들 원혼들을 대신하여 너를 죽인다..." 

 

오늘이 부처님 오신날이다. 불교계가 도박과 성상납 시비로 몸쌀을 앓고 있다. 훌륭한 스님도 많으나 대부분은 가짜 중이 많고 재물에 욕심을 내는 무리들이 종단을 휘젖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 교계의 현실이다. 종교는 비대해지면 세속화되는 법, 가톨릭 교황청에서도 2인자 싸움질이 한창인 모양이다. 기독교도 부패해져 권력에 빌붙어 분규가 끓일날이 없는 소망교회나 여의도 순복음 교회 목사 일가가 400억 원 가까운 피해를 교회에 끼쳤다고 한다.

 

재물에 권세에 탐욕으로 찌든 종교계가 세속에서 벗어나 종교의 본연의 정신인 중생을 구도하는 바른 태도와 정신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나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국란의 위기에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할 뿐이다.

 

 

사림의 파당과 붕당정치로 허송세월을 보낸 조선, 임진왜란을 당하다.

 

박영규씨는 그의 저서 '조선왕조실록'에서 선조의 유능함과 붕당정치의 타당성을 변호하면서 임진왜란 발발 원인을 당시 풍신수길의 전국통일과 넘쳐나는 무장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명나라를 친다는 이라는 대외적인 원인에서 찿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꼭 그런 원인만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당시 조선 조정의 상황은 선조의 파당 용인과 건전한 붕당정치를 의도하였으나 파당의 대립이 극심해져 대학자 이이조차도 해결책을 찿지 못했고 정치적인 정책을 이끌어내려는 것보다 자신들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붕당을 이루어 혼란만을 조성하면서 토탄에 빠진 백성들의 삶과 종잇장에 불과한 군역제도, 무기.군제 등 전술.전략의 부실로 허술한 국방력에 그 원인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조선 선조시대의 이야기다.

 

명종이 죽고 그를 이을 후사가 없자 중종의 서손인 하성군이 왕위를 이어받음으로써 조선은 이른바 방계 승통 시대(서출 왕위 계승 시대)를 열어나갔다. 이로 인해 외척 중심의 척신정치가 사라지고 사림 세력이 중용되어 붕당정치 시대가 도래했다. 이는 곧 신권중심의 정치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조선 정국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선조는 중종의 정비가 아닌 후궁인 창빈 안씨의 소생 덕흥군 이초의 아들이다. 중종은 모두 9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장경왕후와 문정왕후 등 정실에게서 인종과 명종을 얻었으며 나머지 후궁들에게서 7명의 왕자를 얻었다. 덕흥군은 그들 서자 중에서 막내뻘인 일곱째였다.

 

덕흥군에게는 하성군 외외에도 하원군, 하릉군 등 2명의 아들이 더 있었으나 명종은 셋째 아들인 하성군을 각별히 좋아하여 자주 대궐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그의 부인 인순왕후 심씨는 명종의 유명과 종실의 천거에 의해 하성군을 양자로 받아들이고 명종이 죽고 16세의 하성군이 왕위를 잇자 수렴청정을 했다.

 

 

 

선조는 1552년 명종 7년 생으로 덕흥대원군와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슬하의 3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균이었으나 개명하여 공으로 바꾸었으며, 명종의 총애를 받아 어린 나이에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1567년 6월 16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 제14대 왕으로 등극했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이유로 즉위 초에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선조가 어린 나이에도 정사 처리에 능숙하고 친정할 능력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이듬해 17세가 되던 나이에 편전을 넘겨주었다.

 

그는 즉위 초년에는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고 매일 경전에 나가 정치와 경사를 토론하였으며,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하였다. 이에 따라 성리학적 왕도 정치의 신봉자가 되었으며, 정계에서 훈구, 척신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또한 당시 성리학의 거두로 일컬어지던 이황과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기고 극진히 대우하였으며, 심지어 이황이 죽었을 때에는 3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기도 했다.

 

 

 

 

 

선조는 친정을 하게 되자 가장 먼저 과거제를 개편하여 현량과를 다시 실시하였다. 그리고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증직하고 이후 억울하게 화를 당한 사림들을 신원하였다. 반면에 그들에게 화를 입힌 남곤 등의 관작은 추탈하였다. 또한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유관을 죽이고 녹훈의 영전을 받았던 이기, 윤원형 등을 삭훈하였다. 이로써 민심이 안정되고 정계는 사림이 득세하여 한때 문치의 깃발 아래 조정은 평화를 되찿았다.

 

그러나 이황. 이이 등 조선 시대 최고의 우수한 대학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교적 왕도정치를 펼치던 유능한 군주였던 선조의 이러한 다방면의 노력과 더불어 사림을 중용한 조정은 이제 사림들끼리 학맥, 인맥에 따라 파벌이 갈리어 정권 투쟁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정국의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한강변 풍경. 잠수교 옆

 

훈구.척신들이 조정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정권을 장악한 사림은 당시 문명이 높았던 선비 김효원과 명종 비 인순왕후 심씨의 동생 심의겸과의 대립으로 학맥.인맥에 따라 분당되는 사태에 직면했고, 이후 사림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리되어 당파 싸움을 지속하게 되었다. 이는 유교적 이론에 따라 군자의 당인 당파를 조성하여 정치적 견해에 대해 서로 견제하고 합의하며 조정의 중론을 이끌어 가려는 선조의 정치철학이 의도되어 있었다. 그래서 선조는 은근히 당파를 조성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대학자들이 이끌던 당파도 군자의 당이 아닌 소인배의 당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동인에는 주로 주리철학적 도학정치를 펼친 조식과 이황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가, 서인에는 주기철학을 주장했던 이이와 성혼을 추종하는 기호학파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학맥과 인맥에 따라 영남학파와 기호학파가 서로 파당을 이루었고 건전한 견제와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자신들과 파당에 이기적인 반대를 위한 반대가 성행하게 되었고 선조의 중재 능력을 벗어나 극단적인 파벌싸움 양상을 띠게 되면서 조정은 혼란만 가중되고 있었다. 

 

 

                                                                                안개낀 한강

 

 

이처럼 사림의 분당과 정치 투쟁 사태가 조정을 극도로 혼란시키자 당시 대사헌 이이는 이들의 중재를 맡았지만 그도 해결의 실마리를 찿지 못했다. 그 후 이이가 죽자 파당으로 인한 대립은 점차 극심해져 치열한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그러던 중 세자 책봉 문제로 정철 등 서인들이 선조의 분노를 사서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득세하게 된다.

 

처음에는 선조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파당을 조성하였지만 방계 승통이라는 열등의식에 빠져 서출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정철의 건의에 대해 불같이 분노하며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정치적 사안에 따라 어러차례 환국을 실시하여 애끗은 사림들의 목숨만 희생시키는 소인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아녀자들에 의해 이불밑 송사로 인해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신성군이 임진오란 중 피난길에 죽자 나중에는 50대 나이에 10대의 왕비를 맞아들여 적출을 낳아 세자로 만들려는 선조의 속깊은 욕심을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같이 조선의 왕 선조는 붕당정치를 통해 사림을 서로 견제시키며 정당정치를 추구하려 하였으나 사림들의 파당은 학연, 인맥으로 구성되어 자신들의 당리당략만 추구하려는 군자의 당이 아닌 소인배 당으로 전락하여 자신들 무리의 권력 쟁취와 파당의 이익만 추구하려 들었고 선조 자신은 후계자 선정에 골몰하며 불안한 내치와 국방을 소홀히 하면서 국제동향과 정보에는 무관심한채 허송세월을 보내는 바람에 임진왜란을 맞아 피비린내 나는 국난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래는 현재 우리 나라 대선을 앞두고 대선 주자들이 어떤 부류들인지를 살펴 볼 사설들이다. 선조 시대는 이황과 이이라는 대학자들이 즐비하였고 유교 사상의 기둥이엇던 사람들을 곁에 두고도 호나란을 당하였던 것처럼 우리 나라의 현실도 한 두 사람의의 현자가 시대의 국난을 감당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방면에 확고한 신념과  지혜를 갖춘 유능한 지도자가 나타나야 만 한다.

 

  

                                                                                한강 풍경

 

 

 

이와 관련되 사설을 소개한다.

세계를 말하지 않는 한국 정치 대선 주자들

 

세월 앞에 無常한 국가 흥망성쇠 겸허하게 살펴봐야

세계 잘못 읽으면 한국 경제·안보·통일 위태로워진다

'세계(世界)'라는 단어를 들어본 지 오래다. 기억의 필름을 아무리 되감아 봐도 이 나라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 입에서 '세계'라는 말이 흘러나오던 장면은 떠오르지 않는다. 본인들은 "녹음테이프를 다시 틀어보라. 수십 번 '세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며 낯을 붉히며 항의할지 모른다. 그들 말대로 대통령 지망생(志望生)들이 '세계'라는 소리는 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세계'라는 단어에 그만한 무게를 싣고 뜻을 담아 국민을 향해 이야기한 적은 없다. '세계 상황이 이렇고, 앞으로 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니 이런 대비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 '세계'라는 말이 역량(力量)에 너무 부친다면 '아시아' 또는 '동북아(東北亞)'라는 단어라도 꺼낸 적이 있는 사람이라도 손을 들어보라. 몇달 후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대한민국의 정치 풍경이 이렇다. 참으로 겁(怯) 없는 나라의 소견(所見)머리 없는 정치다.

대한민국 경제의 무역 의존도가 96.7%다. 경제의 수출 의존도는 49.7%다. 석유·가스 등의 에너지는 물론이고 철광석 등 주요 원료도 100% 수입해 쓴다. 수입 길이 끊기면 그날로 한국 경제는 손을 든다. 이 외국산 원료를 가공해서 만든 제품도 거개가 해외 시장에 내다 판다. 수출이 벽에 부딪혀도 한국 경제는 그냥 주저앉고 만다. 월급을 제대로 받는 정규직 근로자의 절대다수는 수출과 관련한 업종과 업체 소속이다. 세계 경제 동향(動向)이 근로자의 일자리와 그 가족들의 밥줄을 쥐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나라의 대통령 지망생들은―보수든 진보든, 늙든 젊든―너나없이 무엇을 심판하고 아무개와 차별화하겠다는 데만 열심이다. 그들이 입에 바르고 다니는 복지국가라는 꿈의 실현 여부가 세계 경제의 흐름에 달려 있는데도 말이다.

지진과 화산활동은 두 개의 지각판(地殼板)이 부딪치는 경계선에서 집중 발생한다. '환태평양지진대'니 '알프스지진대'니 하는 지진 다발(多發)지역이 바로 그런 곳이다. 세계의 분쟁과 전쟁 또한 두 개 이상의 '정치적 지각'이 충돌하는 경계선을 따라 불꽃을 튕긴다. 한반도는 새롭게 고개를 드는 '중국판(板)'이 100년 가까이 세계를 지탱해온 '미국판(板)'의 아래를 직접 파고드는 세계의 몇 안 되는 지역의 하나다.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가 미중 두 신구(新舊) 세력 간의 협력과 갈등관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칭(自稱) 이 나라 대통령감들이 정치적 지진대(地震帶)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의 안보 설계로 머리를 싸매고 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사유재산(私有財産)처럼 물려주고 물려받는 북한이 언제 무슨 소리를 내며 이 나라 대통령의 어깨를 덮칠지 아무도 정확히 내다볼수 없다. 북한의 영생(永生)을 믿는 세력은 대한민국 진보당의 곰팡이 슨 주사파(主思派) 말고는 없다. 북한의 질서있는 해체를 추진하려 해도, 돌연한 붕괴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려 해도 동북아 국가 간의 2중·3중의 협력체제 구축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대통령 지망생들 얼굴에서 그런 고민의 흔적을 읽은 기억이 없다.

국제 신용 평가사 피치가 지난 22일 일본의 국가 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두 단계 낮췄다. 사상 최초로 일본 신용등급이 한국·중국·대만과 같아졌다. 세월 앞에선 한 나라의 발흥(勃興)과 쇠망(衰亡)조차 무상(無常)하기 짝이 없다. 에즈라 보겔의 '세계 제1의 일본(Japan as No.1)'이 서점가의 베스트셀러였던 게 1979년, MIT 교수들이 위원회를 구성해 일본에 밀려나는 미국 산업계의 반성문 'Made in America'를 내놓은 게 1989년이었다.

그러나 1990년 새해가 밝자마자 일본의 주식시장과 자산시장은 수직(垂直)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반대 책들이 세계 책방의 점두(店頭)를 장식했다. 2000년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 마이클 포터의 '일본이 과연 해낼 수 있을까(Can Japan Compete)'가, 2006년엔 일본의 대표적 저널리스트 다치바나(立花隆)의 '멸망해가는 국가 일본'이라는 한탄 소리가 화제로 떠올랐다. 그 종합판이 일본의 경제·사회적 쇠락(衰落)을 가져온 주범(主犯)이 바로 일본 정치라고 지적한 일본 전문가 제럴드 커티스의 '일본 정치의 논리(The Logic of Japanese Politics)'다.

눈을 감고 있으면 달리는 기차 안에 앉아서도 기차의 속도를 가늠할 수 없다. 창밖으로 쏜살같이 멀어져 가는 바깥 풍경이 속도계(速度計)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바깥을 내다봐야만 세계 변화가 보이고 대한민국의 적정(適正) 주행 속도를 계산해낼 수 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세계로부터 눈을 돌려선 안 된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국민을 향해 '세계'를 말해야 한다.

[강천석 주필]

 

 


안철수 대선 출마?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춘추관장을 지낸 유민영 씨를 언론 담당 창구역으로 임명했다. 유 씨는 지난해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 캠프에서 메시지 담당으로 일했다. 유 씨의 이력을 보면 안 원장의 ‘정무적 대변인’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안 원장이 안철수재단 일만 한다면 유 씨 같은 대변인은 필요 없을 것이다.

안 원장은 아직 대통령선거 출마의 뜻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유 씨의 대변인 임명으로 본격적인 정치 행보를 예고했다. 지난 총선 이후 첫 외부 강연인 30일 부산대 강연에서 정치 참여와 관련해 진전된 메시지가 나올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안철수 현상’은 이제 단순한 바람이 아니다. 민주통합당 내부에서 손학규 전 대표와 문재인 고문, 김두관 경남지사 등이 1라운드를 벌여 이긴 승자가 안 원장과 최종 후보를 겨루는 2단계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이자 군 최고통수권자로서 5000만 국민의 안위(安危)를 책임져야 한다. 안 원장이 최고의 공인(公人)인 대통령 직을 준비하고 있다면 민감한 국정 현안에 대해 분명한 소신을 밝힐 필요가 있다. 안 원장의 부친을 통한 전언(傳言)이긴 하지만 안 원장은 최근 “요즘 빨갱이가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순진한 인식이다. 통합진보당 주사파의 종북(從北) 행태가 국민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지 않은가. 안 원장은 그동안 천안함 연평도 사태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주요 국정 현안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탈북자 문제에 대해서는 “인권과 사회적 약자 보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라고 말했지만 북한의 3대 세습이나 통진당의 종북과 관련해서는 분명한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안 원장은 영화 ‘더 컨텐더’를 본 소감에서 “사생활은 지도자의 검증 대상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말을 인용했다. 하지만 국가 최고지도자가 되려면 사생활 검증은 피할 수 없다. 미국 대선에선 후보의 학창 시절 마리화나 흡연 여부까지 논란이 된다.

안 원장은 야권이 결국 자신을 ‘꽃가마’에 태울 것으로 기대하고 있을지 모른다. 현재 지지율로 보면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과 맞설 만한 야권 주자가 자신밖에 없다고 판단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음 달 19일이면 대선이 불과 6개월 앞이다. 안 원장의 정공법을 멀리하고 현실에 대한 즉답을 회피하는 태도를 국민은 더는 기다려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