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579 : 조선의 역사 121 (중종실록 14)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579 : 조선의 역사 121 (중종실록 14)

두바퀴인생 2012. 5. 8. 04:46

 

 

 

 

한국의 역사 579 : 조선의 역사 121 (중종실록 14)

 

                                                               

   

 

                   

                                                                                 중종의 정능

 

 

                                                     

  

제11대 중종실록(1488~1544년, 재위: 1506년 9월~1544년 11월, 38년 2개월)                             

 

5. 중종시대를 풍미한 사람들

 

 

 

숲속의 대학자 서경덕(1489~1546년)

서경덕은 지방의 하층 관리직인 수의부위로 있던 서호번의 아들이며, 자는 가구, 호는 화담이다. 그의 어머니가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19세 때 선교량 이계종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고, 평생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을 즐기다가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별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영특하였으나 가계가 빈곤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14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유학 경전인 <상서>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대단히 사색적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상서를 공부할 때 서당의 훈장은 "선생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홀로 깊이 생각하여 15일 만에 알아내고 말았으니 너는 상서를 사색으로 깨우친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또 어느 날 어머니가 밭에 나가 푸성귀를 좀 뜯어오라고 하자, 그는 광주리의 반도 차지 않을 정도의 푸성귀만 가지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푸성귀를 제대로 뜯지 못한 연유를 붇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새가 땅에서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하루 종일 그 이유만 생각하다가 그만 푸성귀 뜯는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화담집> 서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그의 엉뚱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향후 그가 전개해 나가는 독특한 학문 수행 방법의 모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의 학문 수행 방법은 연보에 전해지고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선생이 18세가 되었을 때 <대학>의 '격물치지' 장을 읽다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눈물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학문을 하는데 먼저 격물을 하지 않는다면 책은 읽어서 어디에 써먹겠는가.' 그 뒤부터 세상의 모든 사물들의 이름을 다 쓰더니 풀을 발라 벽에 붙여 놓고 날마다 그것을 하나하나 규명해내는 것을 일로 삼았다.

 

이 기록은 그가 얼마나 실험적이고 과학적인 인간인가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또한 평생을 두고 일구었던 유물론적 주기철학의 방법론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그는 이 같은 학습 방법과 지나친 독서와 사색 탓으로 과로에 지쳐 다시는 책을 손에 잡을 수 없을 만큼 몸이 상했고, 이 때문에 21세 때에는 어쩔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 1년여 동안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건강을 회복하는 데 주력해야 했다.

 

이후 그는 31세 때 조광조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에서 서재를 세우고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매달렸다. 1531년 어머니의 간청으로 43세 나이에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544년 인종 즉위년에 김안국 등이 후릉참봉에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렀다.

 

그가 이처럼 은거생활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은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살았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은 사화가 심한 혼란기에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사림과 훈척 세력의 대립이 극으로  치닫고 있었을 때였다.

 

관료와 지주계급은 토지 겸병과 사리 행각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농민들은 계속해서 토지를 상실해갔다. 또한 통치계급 내부에서도 토지와 정권을 위한 대대적인 유혈투쟁이 전개되어 사림들이 대거 숙청되는 4대 사화가 일어난 것도 바로 서경덕이 살았던 이 50년 동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불안은 결코 그를 불행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회에 나가지 않고 은둔을 고집한 덕분에 많은 학문적 업적을 쌓을 수 있었고, 학문 수행의 결과물인 <화담집> 같은 저작들은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와 황진이, 박연폭포를 일러 '송도삼절'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조선의 많은 성리학자들 중에 스승이 없는 특히한 인물로, 겨우 서당에서 한문을 깨우치는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그의 스승은 자연과 책뿐이었다. 그 때문에 서경덕은 이주 독특하고 진귀한 학문적 업적을 일궈낼 수 있었다.

 

그의 학문의 요체는 물질에 대한 끓입없는 사색에 있었다. 그는 물질의 힘이 영원하다고 믿었으며, 물질의 분리는 단순히 형제의 분리이지 힘의 분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곧 서구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비교되고 있다. 그는 심지어 죽음 조차도 생물에 일시적으로 머물러 있던 기(에너지)가 우주의 기에 환원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생사일여(生死一如)'를 주장함으로써 '우주와 인간, 우주와 만물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이론을 정립시켰던 것이다.

 

그의 이 같은 독특한 학문과 사상은 후일 이황과 이이같은 학자들에 의해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조선 기철학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는 1546년 명종 1년에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후, 1575년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85년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개성의 승양서원, 화곡서원 등지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담집>이 잇는데, 이 책에서 '원이기',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론' 등의 글을 통해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