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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80 : 조선의 역사 122 (중종실록 15)

두바퀴인생 2012. 5. 9. 09:16

 

 

 

한국의 역사 580 : 조선의 역사 122 (중종실록 15)

 

                                                               

   

 

                   

                                                                                 중종의 정능

 

 

                                                     

  

제11대 중종실록(1488~1544년, 재위: 1506년 9월~1544년 11월, 38년 2개월)                             

 

 

 

5. 중종시대를 풍미한 사람들

 

시대를 앞선 여성 시인 황진이

 

황진이에 대한 확실한 생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서경덕, 벽계수 등과 교류한 것으로 봐서 중종 때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본명은 진, 기명은 명월이며 개성 출신이다.

 

그녀의 전기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없기에 간접 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야사에 전해지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는 분량은 많지만 각양각색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라 내용의 신빙성이 없는 것이 흠이다.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고 전해 내려오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보태진 경우도 있어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기록들에 따르면 그녀는 황진사라는 양반과 진씨 성을 가진 현금이라는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고,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 이 두 내용 중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수적으로 더 우세하지만 그녀가 기녀로 살았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더 유력시되고 있다.

 

그녀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양반집 딸 못지않게 학문을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운 것으로 봐서는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여덟 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살 때 벌써 한문 고전을 읽어내고 한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으며, 서화에도 능하고 가야금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이렇듯 아름답고 뛰어난 규수로 자란 그녀가 기생이 된 이유를 야사에서는 동네 총각 하나가 그녀를 연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시건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물이 출중하기로 소문난 황진이를 연모하던 순진한 한 젊은이가 그녀에게 속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혼자서 속앓이를 하다가 그만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다 못한 젊은이의 어머니가 황진이 어머니 진씨를 찿아와 자신의 아들을 사위로 맞아달라고 간청을 하지만 진씨는 이 애원을 냉정하게 거절하고 딸에게는 일체 말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황진이는 스스로 기생이 될 것을 결심하고 기생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기생 사회에 투신한 지 오래지 않아 명성을 얻게 되어 한양에까지 그녀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게 되었다.

 

당시 성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 면벽수도에서 파계시키는 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꺽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서경덕을 유혹하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 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녀는 많은 선비들과 이 같은 관계를 즐기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하였고, 그 가운데 수많은 시들을 남기기도 하였다. <해동가요>와 <청구영언>에 '청산리 벽계수야,' '동짓달 기나긴 밤을' 등 주옥같은 시편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마흔 살 전후에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죽기 전에 자기가 죽거든 관을 짜지 말고, 개미, 까마귀, 솔개의 먹이가 되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말은 세상의 여자들에게 교훈이 되게끔 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하지만 황진이의 자유스런 삶을 생각하면 그것이 오히려 그녀 자신의 시적 근성을 잘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죽은 후에 개성 근처의 장단에 묻어주었다. 지금도 장단 판교리에는 황진이의 무덤이 있으며, 그녀가 살던 입우물 고개에는 약수가 나오고 있다.

 

 

 

6. 중종실록 편찬 경위

 

<중종실록>은 총 105권 10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506년 9월부터 1544년 11월까지 중종 재위 38년 2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원래 명칭은 '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실록'이다.

 

이 책의 편찬 작업은 1545년 2월 대간의 건의에 따라 실록청을 설치하고 당상과 낭관을 결정하여 착수하려 했지만 순조로운 진행을 보지 못하고, 같은 해 7월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죽음에 따라 중단되었다.

 

명종이 즉위한 후 1546년 가을에야 비로소 춘추관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인종실록>과 함께 편찬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때에도 기묘사화와 관련하여 총재관이 자신의 해임을 신청하는 바람에 어려움에 봉착했다.

 

실록 편찬 총재관으로 임명된 우의정 정순붕이 이듬해 2월 사직할 뜻을 밝혔는데, 그 이유는 기묘사화 이후의 사실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고 시비가 그치지 않아 편찬관들 사이에 의견 대립이 심하게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심연원이 총재관으로 임명되었지만 그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이기로 바뀌어야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렵사리 편찬 작업을 진척시킨 끝에 1550년 10월에 완성을 보았고, 이듬해 3월 <인종실록>과 함께 최종 마무리 작업을 끝낸 뒤 사초의 세초와 실록 봉안이 이루어졌다.

 

편찬 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김춘추관사 총재관을 맡았던 정순봉, 심연원, 이기 등이었고, 지춘추관사는 윤개 등 12인, 동지춘추관가는 박수량 등 25인, 편수관은 심통원 등 45인, 기주관은 유관 등 17인, 기사관은 정순우 등 37인이었으며, 총 134인이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중종실록>은 완성 이후에도 사실의 공정성을 의심받았기 때문에 <연려실기술>에서는 기묘사화에 대한 기록이 당시의 실상과 많은 차이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묘사화 때 사관들이 비밀 정사에 전혀 입시하지 못하여 훈구 세력들에 의해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중종 이후의 일반적인 견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