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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78 : 조선의 역사 120 (중종실록 1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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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78 : 조선의 역사 120 (중종실록 13)

두바퀴인생 2012. 5. 7. 03:47

 

 

 

한국의 역사 578 : 조선의 역사 120 (중종실록 13)

 

                                                               

   

 

                   

                                                                                 중종의 정능

 

 

                                                     

  

제11대 중종실록(1488~1544년, 재위: 1506년 9월~1544년 11월, 38년 2개월)                             

 

5. 기묘사화와 사림 세력의 후퇴(계속)

 

중종의 이러한 내면을 잘 읽고 있던 훈구 세력은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해 계략을 짜고 실행했다. 조광조를 몰아내는 데 앞장선 사람은 사림파로부터 소인배로 비난받던 남곤과 공신 자격을 박탈당한 심정, 그리고 한때 조광조의 탄핵을 받아 실권할 지경에 처했던 희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 등이었다.

 

이들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이용해 중종에게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하면서 조광조가 왕권을 넘보고 있음을 피력했다. 그리고 궁중의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쓰고 벌레가 그것을 갉아먹게 한 다음 궁녀를 시켜 왕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주초는 조(趙)의 분리 글자이므로 "조씨(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뜻이었다. 이는 비록 미신에 불과한 것이지만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에게는 몹시 불쾌한 일이었다.

 

실제 나뭇잎에 주초위왕이라는 글씨로 과일즙을 발라 놓으면 벌레가 갉아먹는지는 몰라도 일반인들이 상상하기도 힘든 기묘한 아이디어이며 그것을 중종에게 보이도록 간계를 꾸민 훈척들의 머리가 대단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조선의 신하들은 상대를 죽이고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한편 홍경주와 남곤, 김전, 고형산, 심정 등은 밤에 몰래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조성하여 조정의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기에 이를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이 상소가 있자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일단의 사림 세력을 모두 잡아들여 치죄하도록 명령했다. 개혁에 대한 목표나 의지가 약했던 중종은 자신이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던 사람으로 항상 반정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리석고 못난 군주를 만난 조광조의 개혁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 결과 조광조, 김정, 김구, 김식, 윤자임, 박세희, 박훈 등이 투옥되었고, 이들이 투옥되자 남곤, 홍경주 등의 훈구 세력들은 그들을 당장 처벌해야 한다고 했으나 이장곤, 안당, 정광필 등의 반대하였고, 성균관 유생 1천여 명은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호소했다.

 

치죄 결과 조광조는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훈구파인 김전, 남곤, 이유청 등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 임명되자 조광조는 곧 사사되었다. 김정, 기준, 한충, 김식 등도 귀양갔다가 사형되거나 자결하였으며, 그 밖에 김구, 박세희, 박훈, 홍언필, 이자, 유인숙 등 수십 명의 사림들이 귀양길에 올랐다. 아울러 이들을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 김정국 형제 등은 파직되었다.

 

이 사화가 일어난 해가 기묘년이므로 이를 '기묘사화'라 하고, 이때 희생된 조신들을 '기묘명현'이라고 한다. 이 사화는 1515년 폐비 신씨 복위 문제와 관련해 일어난 조신들간의 알력이 발생한 이후, 조광조 일파가 도의론을 앞세워 사장파를 소인배로 취급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자 감정 대립이 심해졌고, 여기에다 삭훈 사건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사건이다. 그러나 기묘사화는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훈구 세력들이 지나친 도학적 요구에 염증을 느낀 중종과 모의하고 벌인 일종의 친위쿠테타적 성격이 짙다.

 

대개 조광조의 왕도정치 실패의 원인을 정치이념의 진보성과 실현 방법의 과격성에 찿으려고 한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원인은 당시의 정치체제가 왕도정치를 실현할 만큼 성숙되지 못한 것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것은 중종이 분명한 왕도정치 이념에 입각한 성숙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기묘사화와 같은 친위 쿠테타를 일으켰다는 것과,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돌아간 뒤에 오히려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더 발전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