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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75 : 조선의 역사 117 (중종실록 10) 본문
한국의 역사 575 : 조선의 역사 117 (중종실록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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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정능
제11대 중종실록(1488~1544년, 재위: 1506년 9월~1544년 11월, 38년 2개월)
조광조는 누구인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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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과의 갈등
중종 반정 이후 비대해진 훈구파 권신들과 척신들의 전횡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중종은 보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할수 있는 왕권강화를 원했다. 후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오종록 교수는 "왕권 확립을 꾀하던 중종이 훈구파에 대적하기 위해 정암을 키웠으나 정암 등 사림파가 또 다른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했다"며 "정암과 중종은 동상이몽을 꿨다"고 봤다.
그러나 정암은 도학정치가 펴지길 꿈꿨고 중종은 힘센 군주가 되길 갈망한 것이다. 중종은 사림파 역시 하나의 비대해진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해석하여 강력한 왕권의 걸림돌로 인식한다.
그러나 생각이 너무 급진적이고 특히 경연 때마다 발언이 그치지 않아 중종도 그 응대에 지치기 시작했는데, 당시 조광조 등에 의해 벽지로 좌천된 남곤, 심정 등이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왕도가 일조일석에 이뤄지지 않는 것임을 알고 자리를 내놓으려 했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중종은 개혁에 피로를 느꼈고, 훈구파들은 후궁들과 친인척과 인맥을 통해 중종에게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런데 주초위왕 나뭇잎 모함 공작이 중종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에 의하면 왕의 심복이 한순간에 버림을 받은 것이다.
위훈삭제정책 강행
1519년(중종 14) 10월 대사헌 조광조는 대사간 이성동 등과 함께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105명이 문란하게 책록됐다며 부당한 자들을 훈록에서 삭제하려는 위훈삭제(僞勳削除)의 소를 올렸으며, 대신 육경들도 이를 지지하는 계청을 올렸다. 중종은 하는 수 없이 자격이 없다고 평가되는 심정, 홍경주 등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공신 훈적을 박탈하고 공신전과 노비를 몰수했다. 이 때문에 조광조는 훈록을 깎인 자들로부터 원망을 사게 됐다.
위훈 삭제 정책을 시행하려 하자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심정(沈貞) 등은 그가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며 계속 공격하였다. 여기에 같은 사림파의 선배격인 남곤 등도 동조하였고, 정광필, 김전, 안당 등도 그의 활동이 너무 지나치다며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홍경주는 그의 딸 희빈으로 하여금 백성의 마음이 조광조에게 기울어졌다고 왕에게 말하게 하고, 심정은 또 경빈 박씨의 궁인을 통해 조광조 등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며 백성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획책한다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게 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위훈 삭제 사건보다 앞서 홍경주가 찬성이 되었다가 조광조의 탄핵으로 파면되어 원한을 품고 있던 중, 남곤·심정 등과 기맥을 통해 홍경주는 그의 딸 희빈으로 하여금 백성의 마음이 온통 조광조에게 기울었다고 말하게 하고 심정도 경빈 박씨(敬嬪朴氏)의 궁비(宮碑)를 통해 조광조 등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며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게 했다. 또 궁 안의 나뭇잎에 꿀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의 글을 써 벌레가 파먹게 함으로써 글자를 새기게 하여 이 일이 궁인의 손을 거쳐 왕에게 전해지게 하는 등 왕의 뜻을 움직이려고 갖은 수단 방법을 쓰자 왕 또한 뜻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심정은 홍경주를 시켜 밀서를 가지고 실의(失意)한 여러 재상들에게 찾아가 조광조를 죽일 것을 모의케 하자 홍경주는 영중추부사 김전(金銓) 등과 함께 몰래 왕에게 글을 보내어 상변하려고 해도 왕을 모신 근시(近侍)가 모두 조광조의 심복이므로 어쩔 도리가 없으니 신무문(神武門)을 열어 밤중에 들어가 상변하겠다고 청했다. 남곤은 이 자리에 참석하였으나 사림파 신진 인사들을 구원하지 않고, 훈구파 대신들의 사림 제거 음모를 묵인하였다.
그날 밤,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은밀히 입궐해 중종을 만나 주청한다. "조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사오니 이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중종은 조광조, 김식, 김구 등 사림파를 투옥시킨다. 드디어 음력 10월 15일 밤 홍경주·김전·남곤·이장곤(李長坤)·고형산(高荊山)·심정·홍숙(洪淑)·손주(孫澍)·방유령(方有寧)·윤희인(尹希仁)·김근사(金謹思)·성운(成雲) 등은 신무문으로 궐내에 들어가 중종을 만나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하여 구신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뒤집어 놓았으니 그 죄를 밝혀 달라고 주청하였다.
주초위왕 사건
중종 임금에게 한 궁녀가 궁궐의 나뭇잎 하나를 가져다 바친다. 벌레가 갉아먹은 자리를 따라 나뭇잎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주초위왕(走肖爲王)> , 조씨(走+肖=趙)가 왕이 된다는 글이다.
“ | 조광조의 역심(逆心)을 하늘이 알려준 것이옵니다. | ” |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자신 역시 쿠테타로 축출될수 있다는 생각을 하여, 이복 형제들, 성종의 다른 왕자군이나 기타 왕족들을 불신하고 경계했다.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조광조를 의심하나, 나뭇잎의 글씨는 궁녀가 과일즙을 발라놓은 자리를 개미들이 파먹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음모이다.
조광조일파가 유배되자 11월 19일 이조판서 남곤은 자신의 이판직을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훈구파 대신들은 조광조의 유배에 만족하지 않고, 유배지 능주(綾州)에서 조광조의 사사를 계속 주장했다. 그해 12월 19일 남곤은 왕이 조광조에게 사형을 시키려 하자 사형보다는 인덕으로서 다스리기를 청하다가, 중종이 강경 대응을 시사하자 유배선에서 마무리 지을 것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거절당한다.
개혁 실패의 원인
그는 전적을 거쳐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교리, 응교, 승지를 지내고 부제학이 되어 유학과 문치에 뜻을 둔 중종에게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신진 변혁주체들이 기성세력을 축출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수립하려 했으나 결국 보수의 벽을 무너뜨리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말았다. 그들 대부분이 젊고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 드라이브를 구사해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한 세대 뒤의 유학자 이황이나 그의 손제자인 율곡 이이 역시 이러한 점을 들어 그의 급진성을 비판하였다.
유배
조광조를 위시하여 참찬 이자 (李耔)·형조 판서 김정(金淨)·대사성 김식(金湜)·부제학 김구(金絿)·도승지 유인숙(柳仁淑)·승지 박세희(朴世熹)·응교 기준(奇遵)·수찬 심달원(沈達源)·공서린(功瑞麟)·윤자임(尹自任)·안정(安挺)·이구(李構)·홍언필(洪彦弼)·박훈(朴薰) 등이 체포되었다. 처음에 홍경주 등은 그날 밤으로 모두 죽일 계획이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우의정 안당(安塘)·신임 대사헌 유운(柳雲)·신임 대사간 윤희인(尹希仁)·전한(典翰) 정응(鄭應)·봉교(奉敎) 채세영(蔡世英) 등의 역간(力諫)으로 일단 취조를 받게 되었다. 11월 16일 옥에 갇혔다. 의심 많은 왕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다.
옥에 갇힌 조광조는 유배형이 내려지자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신(臣)은 뭇사람 뜻과 어긋나더라도 임금이 계신 것만 믿고 정책을 펴 왔습니다. 친히 심문하신다면 만번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그가 옥 중에서 마지막 소명 기회를 애원하고 있을 때 왕은 "붕당을 만들어 국론과 조정을 어지럽혔다"며 단죄할 것을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그가 유배되어 생활하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174에는 후일 1667년(현종 8년) 그의 적려유허비가 세워졌다. 적려유허비는 후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저된다.
최후
훈구파는 계속해서 그를 비토, 사형시켜야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중종은 당초 유배나 파직으로 해결하려 하였으나 훈구파와 척신들의 계속된 공세와 압력으로 결국 조광조·김정·김구·김식·윤자임·박세희·기준·박훈 등 8명 중 조광조는 능주(綾州 :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에 귀양갔다가 음력 12월 20일 결국 사약을 받게 된다. 이때 그의 동지인 김식, 김정 등과 이순신(李舜臣)의 친조부인 이백록도 사사 또는 처형되었다.
그가 유배지인 화순 능주에 머문 동안 수시로 찾아와 위로가 되어준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곳에 고향을 둔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이었다. 양팽손은 일찍이 18세의 어린 나이에 경기도 용인에서 그를 만나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고 21세때에는 생원시에 장원급제한 후 같은 해에 급제한 정암과 더불어 성균관에서 생활한 적도 있었다.
그가 유배되자, 유배지에도 글을 배우려고 뜻있는 선비들이 찾아왔다. 양팽손 등의 지우들의 방문과 유배지에서의 학문 강의를 하던 중 음력 12월 20일 금부도사가 도착한다.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같이 하였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라
- 조광조의 절명시(絶命詩)-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이밀자 한성부를 향해 큰절 3배를 올린 뒤 절명시 한 수를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38세였다.
사망 직후
사사당한 그의 시신은 학포 양팽손이 수습하여 가매장되었다가 후에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서원말부락의 선영하에 매장되었다. 그가 유배된지 1개월후에 사사를 당하자 학포는 은밀히 시신을 거두어 쌍봉사 골짜기 일명 조대감골에 장사지내고 서운태 (서원터) 마을에 모옥을 짓고 춘추로 문인 제자들과 함께 제향하였다. 이 추모옥은 후일 죽수서원으로 발전한다. 선조1년(1568)에 정암 선생은 영의정에 추증 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다.이와 때를 같이하여, 조정에서는 정암을 향사할 서원의 건립을 논의하였고, 이에 따라 선조 3년(1570) 다시 능성현령 조시중의 협조로 천일대 옆(현위치)에 서원을 짓고 죽수란 사액을 받았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를 존경하던 유생과 선비는 물론 백성까지 목놓아 울며 나라를 걱정했다. 더욱이 조광조가 죽은 이듬해 봄부터는 비가 내리지 않아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기 때문에 가뭄이 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광조가 죽은 뒤 이렇듯 인심이 흉흉해지자 조정에서는 조광조에 대한 말을 일절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이듬해 봄에 선영이 있는 용인의 심곡리로 관을 옮겨 반장(返葬)을 했더니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다고 전한다.
신사무옥
조광조, 김식 등이 사사된 후 김종직 학파에서는 남곤, 김전 등을 배신자로 인식하고 비판, 경멸하게 되었다. 김종직 학파 출신으로 중종 반정에 참여했으며 남곤, 김전 등과 교류하던 성희안과 유순정 역시 이미 사망하여 그의 편을 들어주는 인물은 없었다. 도리어 남곤은 조광조 등의 사사가 결정될 때 반대하였지만,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 등을 구명하지 않은 일로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성균관 학유였던 안처겸(安處謙)과 부수찬이었던 안처근(安處謹) 형제가 후에 훈구파의 영수인 심정, 홍경주 등을 제거할 때 배신자, 변절자로 지목된 남곤, 김전 역시 제거하려 모의하였다. 그러나 안처겸 형제의 남곤, 심정 제거 모의는 송사련(宋祀連)의 밀고로 탄로났다. 신사무옥은 1521년(중종 16년) 송사련으로부터 안처겸 형제의 모의를 접한 남곤 등은 안처겸 등의 역모를 주장하여 안당 등의 일파를 숙청하였다.
조광조 등의 개혁파가 중종 기묘년에 사화를 당한 10년 후에 성균관 생원 신백령(辛百齡) 등이 상소하여 조광조의 신원회복을 요청했다. 1540년부터 조광조 복권 논의가 나타났고 중종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곧 사망한다. 1545년 인종이 즉위하자 일단 복권되었으나 명종 즉위 후 다시 추탈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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