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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73 : 조선의 역사 115 (중종실록 8) 본문
한국의 역사 573 : 조선의 역사 115 (중종실록 8)
중종의 정능
제11대 중종실록(1488~1544년, 재위: 1506년 9월~1544년 11월, 38년 2개월)
4.신진 사림의 재등장과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치(계속)
하지만 조광조의 이 같은 일련의 개혁정치는 너무나 과격하고 성급하게 실시된 나머지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리학의 왕도정치 실현의 전초 기지이자 사림 세력의 정치적 기반이 될 것으로 예상했던 향약은 실시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있었다. 당시 실시되었던 향약은 전통과 자치적인 것이 아니라 이상에 치우친 당국자들에 의해 선도되는 관 주도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조광조 자신도 지적하였듯이 향약의 실시를 관에서 철저히 규제하고 강제하였던 것은 향약의 근본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이런 강제성은 오히려 민간의 반발을 사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다음 문제는 비록 향약이 유포되긴 했으나 이를 지도하고 이끌 만한 인재가 양성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방의 자치가 가속화되고 향약이 절대적인 규범으로 자리할 경우 역으로 관리들의 통치력이 약화되어 민간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중앙 및 지방의 통치력과 지방 향약 제도의 조화로운 융합 발전 방안이 제시되지 못한체 급하게 향약만 우선적으로 실시되었던 것이다.
향약 실시에 따른 이같은 문제들은 조광조 자신의 지적처럼 너무 급작스럽게 민간에 유포하려 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조광조는 관이 주도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민간 주도의 향약을 위해 보완책을 마련하려 했으나 기묘사화 발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향약 이외에 현량과에서도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량과 실시를 통해 등용된 인물들이 한결같이 조광조를 추종하는 신진 사림파였기에 등용 기준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훈구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림 세력의 힘이 강화됨에 따라 조광조의 개혁 방향이 더욱 극으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런 극단적인 개혁 성향은 마침내 중종의 정치 행위에까지 간섭하게 되어 왕을 철저하게 성리학적 규범에 맞춰 생활하도록 강권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중종은 왕인 자신까지 성리학적 규범 속으로 옭아매려는 조광조의 무소불위의 언행에 불쾌감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점차 조광조의 경직된 도학사상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광조의 압박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 압박은 마침내 중종 초기에 형성된 정국공신이 너무 많다는 비판으로 치달았다. 이는 사림파가 훈구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벌인 정면 대결이었다. 그 때문에 조정에서 일대 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사림 세력이 이길 경우 조정은 완전히 사림파에 의해 장악될 판국이었다. 이는 중종 자신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중종은 사림, 훈구 어느 쪽도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림은 중종을 압박하며 자신들의 의지대로 밀어붙였고 결국 중종이 밀리고 말았다. 훈구 대신들의 막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 공신의 4분지 3에 해당하는 76명의 훈작을 삭탈하였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훈구 세력은 더 이상 사림파의 급진적인 성향을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중종에게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조직해 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있다고 탄핵했다. 마침 무서운 기세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던 사림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훈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대대적인 사림파 숙청 작업을 기습적으로 감행했다. 이것이 곧 '기묘사화'이다.
이로써 4년 동안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막을 내리고 말았지만 그의 도학적 왕도정치는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개혁 작업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명재상 이율곡의 <석담일기>에 잘 드러나고 있다. 율곡은 이 책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파의 정치적 실패 원인을 이랗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했다."
이처럼 후대의 학자들은 그의 사상보다도 미숙한 정치력과 극단적인 개혁성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후세 사람들이 그의 사상은 따르되 그의 극단적인 개혁성은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의 개혁 방향만은 옳게 평가되어 명종 대를 거쳐 선조 대에는 사림들이 정치 세력의 중심이 되는 대 지대한 역활을 하게 된다.
조광조는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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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趙光祖, 1482년 음력 8월 10일 ~ 1519년 음력 12월 20일)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굉필, 유숭조의 문인.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조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 철폐 등을 단행하였다. 성리학적 도학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 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다. 1519년 사림파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역모로 몰려 전라남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된다.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희생된 개혁가라는 시각과 급진적이고 극단적이라는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관직은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현겸 동지경연성균관사에 이르렀고, 사후 인종 때 복관되고 명종 때에 몇번의 논란이 일다가 선조 초에 기대승 등의 상소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다.
한때 그와 가까웠으나 뒤에 그의 정적이 된 남곤과, 그의 정적 중 한사람이기도 했던 김전 역시 김종직 학파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그의 문하생 백인걸을 통해 율곡 이이에게 전해졌으며, 명종 말엽에 사림파는 훈구파를 몰락시키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성인화, 성역화된다. 경기도 출신
생애
출생과 유년기조광조는 1482년 경기도 용인군에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조 이성계의 생질인 양절공 조온의 4대손으로, 고조부 조온은 조선의 개국신이기도 했다. 그의 가계는 조선의 개국공신의 가문인 훈구 가문이었으나 김굉필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진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조원강으로부터 엄격한 훈육을 받고 자라났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의 뜻이 컸으며, 고서적과 옛 학문을 좋아하고 세상일을 개탄하면서 학문의 뜻은 출세에 있는 것은 아니라며 과거보기 위한 글은 하지 않았는데, 부형(父兄)과 친척들로부터 세속과 어긋나게 행동하여 남의 비방을 산다고 꾸짖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욕은 꺾을수 없었다.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한 아버지 조원강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당시 유배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어린 소년이었으나 영특한 재능을 알아본 김굉필은 그에게 말을 걸었고, 이 인연으로 그는 김굉필과 사제지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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