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572 : 조선의 역사 114 (중종실록 7) 본문
한국의 역사 572 : 조선의 역사 114 (중종실록 7)
중종의 정능
제11대 중종실록(1488~1544년, 재위: 1506년 9월~1544년 11월, 38년 2개월)
4.신진 사림의 재등장과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하고 훈구파의 과대한 세력 팽창을 막기 위해 신진 사림 세력을 다시 등용한다. 이는 성종의 균형정치를 모방하기 위한 것으로서 사림파를 근위 세력으로 양성하여 왕의 입지를 높이고 조정의 힘을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중종이 끌어들인 사림파의 거두는 조광조였다. 당시 조광조는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한 정통적인 도학자로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림학자들 사이에서 추앙받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조광조가 김굉필을 만난 것은 17세 때였다. 지방관리로 나갔던 아버지를 따라 희천에 갔다가 무오사화로 인해 그곳에 유배중이던 김굉필을 처음 대하게 되었다. 김굉필은 순천으로 이배되기 전까지 2년 동안 그에게 철저한 도학주의적 실천 사상을 가르쳤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도학적 탁견에 매료되어 미친 사람처럼 학문에 빠져들었고, 그 결과 젊은 나이에 사림파의 영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는 무오사화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리학을 꺼리고 있을 때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성리학에 심취한 조광조를 보고 '미친 눔'이라거나, 화를 잉태하고 있는 눔이라 해서 '화태(禍胎)'라고 손가락질 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성리학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그는 자신을 욕하는 모든 친구들과의 교류도 끓은 채 철두철미한 도학적인 실천 운동에 주력했다. 의관을 단정히 함은 물론, 행동에서도 절제와 절도를 분명히 했고, 언어생활에도 규범을 두어 어기는 일이 없었다.
그는 이러한 실천 운동이 익숙해지자 드디어 세상으로 나왔다. 그래서 29세가 되던 1510년 사미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해에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리고 1515년 성균관 유생 2백 명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조지서사지라는 관직에 임명되고, 그해 가을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전적, 감찰, 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조광조는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4년 동안 중종은 조광조를 앞세워 급진적인 개혁정치를 펼쳐나갔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성리학을 정치와 민간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철저한 도학사상에 입각한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조광조의 의견을 수렴한 중종은 그를 정언에 앉혀 언론을 통해 훈구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조광조에 대한 중종의 신임은 단순히 신하와 임금 사이를 넘어 동지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중종은 조광조의 분명한 사리 판단과 절도 있는 행동, 그리고 눈치를 살피지 않는 직언을 좋아하여 그 자신도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조광조는 우선 훈구 세력들에 대한 포문을 열었다. 그 역시 김종직과 마찬가지로 훈구 세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와 타협한 모리배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훈구 세력의 척결이 곧 정치 개혁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정은 어느새 반정공신파와 신진 사림의 대립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1517년 조광조는 드디어 그동안 형성한 세력을 기반으로 중종과 함께 본격적인 개혁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첯 번째 개혁 작업은 향약의 실시였다. 향약은 성리학적 이상 사회, 즉 중국의 하, 은, 주 삼대에 걸친 이상 사회를 민간 속에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향약은 지방 자치를 설정한 민간 규약으로 유학적 도덕관의 실천과 도학적 생활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백성을 성리학적 규범으로 교화시켜 왕도정치의 기반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개혁 작업은 현량과의 도입이었다. 조광조는 종래의 과거제도가 본질적인 모순으로 인해 학업을 모두 시험 준비에만 한정하도록 하는 폐단을 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인품과 덕행을 판단할 수 없게 한다면서 이를 폐지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천거제도가 바로 '현량과'였다.
조광조가 신광한, 이희민, 신용개, 안당 등의 찬성을 얻어 추진한 현량과는 훈구파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지만 중종의 지원에 힘입어 1519년 전격 실시되었다. 현량과는 중앙에서는 성균관을 비롯한 삼사와 육조에서 천거권을 주고, 지방에서는 유향소에서 천거하여 수령과 관찰사를 거쳐 예조에 전보되도록 했다. 천거 근거로는 성품, 기국(器局), 재능, 학식, 행실과 행적, 지조, 생활 태도와 현실 대응 의식 등 일곱가지 항목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천거된 사람은 모두 전정에 모여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시험을 치른 뒤에 선발되었다. 그래서 후보자 120명 가운데 현량과를 통해 급제한 사람은 28명인데, 그들의 천거 사항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대체로 학식과 행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들 28명의 연고지를 살펴보면 경상도 5명, 강원도 1명, 그 외 1명 등 7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21명은 모두 기호지방 출신이었다. 그들은 조광조의 추종자들로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의식을 지닌 신진 사림파였다.
행약과 현량과 실시 이외에도 조광조는 전통적인 인습과 구태의연한 제도를 혁파하고 궁중 여악을 폐지하였으며 내수사의 고리대금업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또한 성리학적 윤리질서와 통치이념을 세우기 위한 <주자가례>와 <삼강행실>을 보급하고 이교적 이념이 담긴 기신재, 소격서 등을 없애고 <소학> 교육을 통해 유교사회의 질서를 세우려고 하였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574 : 조선의 역사 116 (중종실록 9) (0) | 2012.05.03 |
---|---|
한국의 역사 573 : 조선의 역사 115 (중종실록 8) (0) | 2012.05.02 |
한국의 역사 571 : 조선의 역사 113 (중종실록 6) (0) | 2012.04.30 |
한국의 역사 570 : 조선의 역사 112 (중종실록 5) (0) | 2012.04.29 |
한국의 역사 569 : 조선의 역사 111 (중종실록 4) (0) | 2012.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