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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70 : 조선의 역사 112 (중종실록 5) 본문
한국의 역사 570 : 조선의 역사 112 (중종실록 5)
중종의 정능
제11대 중종실록(1488~1544년, 재위: 1506년 9월~1544년 11월, 38년 2개월)
2.중종의 개혁정책 실패와 정국의 혼란(계속)
이와같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북쪽에서는 야인들이 극성을 떨자 조정은 왕권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정로위를 설치하는 한편,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외침에 대비한 임시 합좌회의 기관인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비변사는 이후 영구적인 합좌기관으로 발전하여 군사적인 기능뿐 아니라 정치기관의 성격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이 밖에도 무술을 가르치는 무학과를 설치하였으며 편조선이나 벽력포 등의 무기를 제작하여 국방력 강화에 노력하였으나, 정치적인 불안으로 군사 기강이 무너져 그다지 큰 호과를 거두지 못했다.
사회면에서는 조광조의 개혁정치의 여파로 유교주의적 도덕 윤리가 더욱 정착되어 갔으며, 미신을 타파한다는 이유로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를 폐지하고, 불교의 도승제도를 철폐하였으며, 도성 안의 무당들을 단속하는 한편 절을 새롭게 짓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일련의 유교적 조치에 힘입어 향약을 더욱 강화하여 향촌 질서를 조성하려고 노력했다. 한때 조광조 일파가 숙청되자 이런 양상은 주춤하는 듯 하였으나, 그 뒤 다시 강력하게 추진되어 <소학>, <이륜행실>, <속삼강행실도> 등의 책을 간행하여 민간에 보급하고 교화하였으며,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는 안향의 영전을 모신 '백운동서원'을 세워 유교정신의 고착에 더욱 주력하였다.
문화면에서는 인쇄술의 발달로 많은 편찬 사업이 전개되었다. 1516년에는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동활자를 주조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각종 서적이 편찬되었다. 최세진, 신용개, 이행 등을 중심으로 <사성통해>, <속동문선>,<신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 간행되었으며, 1536년에는 찬집청이 설치되어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서적들을 찬수 또는 번역하기도 하였다.
경제면에서는 저화와 동전 사용을 적극 권장하였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으며, 의복, 음식, 혼인 등과 관련된 사치를 금지하였으며, 신임 관리자들에 대한 환영 배례를 금하는 등 민생 안정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정치적 혼란과 국방의 불안 탓으로 별로 효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 밖에 1530년부터 시작된 서양의 세면포 무역이 지배층의 의복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것도 특이할 만한 사실이다. 또한 농업 관련 기술도 발달하였는데, 관천기록륜, 간의혼상을 새로 만들어 비치하고, 1534년에는 명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하여 이두석, 정청의 조작법과 훈금술을 습득해 오도록 했다. 1536년에는 창덕궁 내에 보루각을 설치하여 누각에 관한 일을 보고하게 했으며, 1538년에는 천문, 지리 등에 관한 서적을 명나라에서 구입하여 이 분야에 대한 연구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각 방면의 진흥 정책들은 정치적 혼란에 영향을 받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는 중종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중종의 인재 활용의 미숙함과 뚜렷한 정치철학의 부재에서 기인하였다고 판단된다.
중종은 조광조 같은 급진 개혁파를 등용하여 단시일내에 사회 개혁을 단행하고 정치 혁신을 도모하려 했으나, 이는 당시의 상황에서 무리한 조치였다. 개혁이 급진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왕 자신이 개혁의 방향에 대한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를 뒤따라 가기에 급급하였고, 마침내는 조광조의 지나친 도학적인 언행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훈구파에 의한 그의 제거에 동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는 조광조의 입장에서 보면 도끼에 발등을 찍힌 꼴이 된 것으로 개혁을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어쩌면 조광조는 시대를 잘못타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개혁이란 최고 지도자이거나 절대권력자의 강력한 의지가 가장 중요하며 우유부단하거나 무능한 지도자 밑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개혁주의자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또 개혁은 정치적인 안정과 국방력의 안정이 개혁에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많은 지도자들이 개혁을 시도하지만 대부분 실패하는 것이 이러한 지도자의 개혁에 대한 확고한 목표와 의지, 정치적 안정, 국방의 안정 등의 삼박자가 골고루 갖추어지지 않으면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비록 조광조가 급진적인 성향을 보였다 하더라도 중종은 일정 수준에서 개혁의 강도를 조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훈구 대신들의 입지를 마련해주는 정치적 능력을 발휘했어야 했다. 한편 그는 자신의 부왕인 성종의 정치 형태를 모범으로 삼아 균형 정치를 통한 조선의 영화를 희망하고 있었지만 성종만큼 뛰어난 정치력을 소유하지 못한 인물로 성종대의 태평성대를 이어가지 못하고 오랜 치세기간을 반정에 대한 불안감, 개혁에 대한 확고한 목표와 신, 의지가 부족한 상태에서 왕권강화에만 급급한 나머지 우둔한 시행착오를 범하면서 아까운 세월을 허비하고 말았던 것이다.
중종은 장장 38년 2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왕위에 머물렀으며 1544년 11월 14일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그 다음날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계비 장경왕후를 비롯 총 10명의 부인에게서 20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정치에는 무능하였으나 왕위를 잇기위한 자녀 낳기에는 부왕 성종을 닮아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능은 정릉으로 현재 서울 삼성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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