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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67 : 조선의 역사 109 (중종실록 2)

두바퀴인생 2012. 4. 26. 03:36

 

 

 

한국의 역사 567 : 조선의 역사 109 (중종실록 2)

 

                                                               

   

 

                   

                                                                                 중종의 능

 

                                                     

  

제11대 중종실록(1488~1544년, 재위: 1506년 9월~1544년 11월, 38년 2개월)                             

 

 

1.연산군의 폐출과 진성대군의 등극

  

갑자사화 후 연산군의 폭정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걸던 세력들이 모두 없어진 만큼 그가 못할 일은 없었다. 우선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신하는 모두 죽이거나 유배보냈으며, 언론의 주축이 되던 사간원을 없애버렸고, 정치 논쟁을 금하기 위해 경연을 폐지시켰다.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배격하던 그는 조선 학문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을 폐지하여 자신의 유흥장으로 만들었으며, 조선 불교의 산실인 원각사를 없애고 그곳에 장익원으로 개칭하여 만든 연방원을 두고 기생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했다.

 

게다가 전국에 채총채홍사를 보내어 전국의 미녀들을 선발(이를 운평이라고 칭함)하고 그 중에서 뽑힌 기녀를 흥청이라 하여 궁중에 불러들여 연회를 거들게 하였다. 또한 사냥을 즐기기 위해 도성을 기준으로 30리 내에 있는 민가를 철거하도록 했다.

 

왕의 학정이 여기에 이르자 전국 각지에서 한글 투서가 날아들기 시작했는데, 연산군은 백성들이 언문을 이용하여 왕을 욕되게 한다면서 훈민정음 사용을 금지하고, 언문구결 등 한글 관계 서적을 불태웠다.

 

연산군의 행동이 이렇듯 광적인 양상을 띠면서 민생과 국정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자, 전국 각지에서 그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거사 계획을 가장 먼저 준비하던 사람은 성희안이었다. 성희안은 성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로 학식이 깊고 치밀하며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종사관, 형조참판 등을 거쳐 1504년에는 이조참판직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망원정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그의 방탕한 국정 운영을 비판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가 종9품 부사용이라는 미관말직으로 좌천된 상태였다.

 

성희안이 가장 먼저 접근한 사람이 박원종이었다. 박원종은 한때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동부승지, 조부승지를 거치면서 주로 국가의 재정 문제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연산군의 사치 행각을 비판하는 간언을 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하지만 곧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윤을 역임하고 1506년에는 경기도 관찰사로 있다가 다시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박원종이 연산군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그의 누이 박씨부인 사건 때문이었다. 박원종의 누이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부인이었는데 인물이 절색이라 연산군이 그녀에 대해 흑심을 품고 있던 중 마침내 큰 어머니인 그녀를 자주 궁으로 불러들였는데, 세간에선 연산군과 박씨부인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박씨부인은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며 많은 혜택을 누렸고, 박원종은 누이의 그런 처사를 매우 못마땅해했으며, 그래서 연산군도 몹시 미워했다. 이후로 박원종의 연산군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삭직되었던 것이다.

 

성희안은 박원종의 원한과 불만을 이용하여 군사력을 얻고자 했다. 그는 거사를 도모할 지략은 있었지만 군사력을 동원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박원종은 원래 무신 출신이었으므로 병력을 동원할 연줄을 갖고 있었다.

 

그 후 그들은 거사에 참여할 인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당시 인망이 높았던 이조판서 유순정을 끌여들였으며, 연산군의 신임을 얻고 있던 신윤무와 무장 출신 장정, 박영문 등의 호응을 얻어냈다. 거사일은 1506년 9월 연산군이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을 계획한 날로 잡았다. 하지만 연산군의 석벽 나들이는 갑작스럽게 취소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거사 계획은 일시 유보하기도 했는데, 그때 호남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 이과 등이 거사를 알리는 격문을 보내오자 박원종, 성희안은 혹 선수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군사를 모아 예정일에 거사를 결행했다.

 

거사에 돌입한 반란군들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 사실을 통보하고, 신수근, 신수영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반란군들은 사전에 대궐로 진입하여 내응하기로 약조되어 있던 신윤무 등의 도움을 얻어 쉽게 궐내로 진입하여 궁궐을 장악하였다.

 

거사에 성공하자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이자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를 찿아가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려줄 것을 간언했다. 정현왕후는 처음에는 이들의 청을 거절하다가 결국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튼날 진성대군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거사는 완결되었다.

 

야사엔 거사가 있기 전에 박원종이 신수근을 찿아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진성대군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신수근을 거사에 가담시켜 안전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박원종이 신수근을 만난 것은 그를 끌여들일 의향보다는 그의 마음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만약 신수근이 거사에 호응한다면 무혈 입궐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신수근이 협조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담판을 짓기 위해서 그를 찿아갔던 것이다.

 

박원종은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중요하냐고 말을 돌려서 물었다. 머리 회전이 빨랐던 신수근이 그 물음의 진의가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신수근은 이 말을 듣고 버럭 화를 내면서 "비록 임금이 포악하긴 해도 세자가 총명하니 염려할 바가 못된다."고 못을 박았다. 이에 박원종은 신수근의 이 말을 듣고 거사 이전에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1506년 9월 1일,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을 비롯하여 전 수원부사(水原府使) 장정(張珽),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舟) 등은 훈련원에서 무사를 규합한 뒤, 왕비 신씨의 오라버니 신수근(愼守勸)과 그 아우 신수영(愼守英) 및 임사홍(任士英) 등 연산군의 측근을 제거한 뒤,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경복궁에 들어가 자순왕대비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위하여 강화도 교동(喬桐)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진성대군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성희안, 박원종 등이 중심이 된 이 반정거사는 예상보다 너무나 쉽게 성공리에 끝났고, 이로써 약 12년 동안 연산군과 궁중 세력의 독재정치는 종식되었다. 연산군의 광란의 학정이 끝나고 정치의 주도권은 다시 훈구, 척신 세력에게 돌아갔다.  이는 곧 조선의 정치 형태가 성종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을 의미하며 이후 조선 왕조는 왕권보다 신권이 우위를 점하면서 훈구. 척신-사림- 외척으로 이어지는 신권 정치 시대가 전개된다.

 

중종반정은 신하들이 주체가 되어 그들의 뜻대로 왕위를 교체한 사건으로, 조선왕조 개창 이래 장자(長子) 상속의 왕위세습제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반정 자체가 철저하게 신하 주도로 이루어짐에 따라 중종이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중종은 공신이 중심이 된 정치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고, 집권 초기 권력은 이들에게 집중되었다. 중종반정을 통해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연산군대에 공직에 있던 인물이 왕을 교체한 후 다시 기득권을 유지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정국공신(靖國功臣)은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작위이다.

등급 비고
1등공신 박원종, 성희안,유순정,홍경주,신윤무,유자광,박영문, 장정 8명
2등공신 심순경, 윤형로, 최한홍, 이계남 등 13명
3등공신 심정, 심형, 고수경, 유계종 등 83명
4등공신 변사경, 윤여필 등 65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