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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64 : 조선의 역사 106 (제10대 연산군일기 14) 본문
한국의 역사 564 : 조선의 역사 106 (제10대 연산군일기 14)
제10대 연산군 일기(1476~1506년, 재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5. <연산군 일기> 편찬 경위
<연산군 일기>는 총 63권 43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494년 12월부터 1506년 9월까지 연산군 재위 11년 9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연산군 사망 직후인 1506년 11월에 시작되었는데, 폐위된 왕의 시실을 편찬하는 것으므로 일기 수찬이라는 명목하에 일기청을 설치하였다. 이 작업에는 대제학 김감이 감춘추관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1월이 대신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자 편찬 작업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대제학 신용개가 다시 감춘추관사가 되면서 재개되었는데, 3개월 후에 편찬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 연산군 때 신임을 받았던 인물들을 교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편찬관이 교체되었다.
교체된 편찬 책임자는 총재관 성희안, 이하 도청당상 2인, 각방당상 4인, 색승지 1인이 임명되어 본격적인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때 참석한 편찬 실무자들의 이름은 부기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 기사관으로 참여했던 권벌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일기세초지도>에 의해 그 전모가 파악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편찬 과정에서 또다시 책임자 변동이 있었는데, 감수 책임자 성희안은 그대로이나 지춘추관사가 성세명, 신용개 등 6인, 동지춘추관사가 조계상, 이유청 등 8인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찬관으로 강경서, 이세인 등 7인, 편수관으로 유희저, 김근사 등 24인, 기주관으로 이현보, 이사균 등 7인, 기사관으로 이말, 성세창 등 16인이 참여하여 <연산군일기> 편찬 작업에는 총 66인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이 66인의 편찬 작업은 어려움이 많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대 사료가 부족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작성된 사료의 신빙성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연산군 대의 시정기는 자주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쉽게 직필을 하지 못했고, 사관이 경연이나 청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또한 사관으로 임명된 인물들이 연산군의 측근들이 많아 사료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게다가 연산군 폐출 이후 사관들의 활약이 지나치게 위축되어 <연산군일기> 편찬 작업의 기초가 되는 사초를 제출하지 않았다. 이는 무오사화에 대한 여파로 사초 제출 이후 닥칠 후환을 염려했던 까닭이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연산군일기> 편찬 작업은 시행 3년 만인 1509년 9월에 완성되어 제반 의식을 간단히 치른 다음 실록이 아니라는 이유로 의사고에 봉안되었다.
<연산군일기>는 봉안, 관리에서는 실록과 큰 차이는 없으나 내용과 체제는 실록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책은 대개 한 권에 1,2개월분의 사실을 수록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6.7개월분을 수록한 것도 있다. 특히 내용면에서는 무오사화의 후유증으로 사초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부실하기 짝이 없다.
여기에 사용한 사초는 정희량과 이종준이 작성한 것이 대부분이다. 나머지 사초는 아예 제출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각 사건에 대해 정확한 서술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건 자체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채 실린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사초의 내용도 편자들에 의해 많이 윤색된 흔적으로 보이고 있는데, 이는 연산군이 폭정으로 행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 실록에는 의당 사건에 대한 관점, 평, 의미 등을 적은 사론이 따라붙게 마련인데 <연산군일기>에는 사론이 25개 정도밖에 수록되지 않아 실록으로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그나마 이 사론들도 연산군의 패륜적인 비행에 대한 것뿐이어서 객관성을 의심하게 하고 있다.
내용을 부분적으로 살펴보면 무오사화 이전까지 왕도정치, 사원전, 내수사 정리 등에 대한 대간들의 상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데 비해, 그 이후부터 갑자사화가 일어나던 1504년까지는 대간의 상소와 왕의 전교가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고, 그 이후 폐위시까지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관된 인물들의 치죄와 연회에 대한 왕의 전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와관계를 살펴보면 대명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으나, 북방 야인에 대한 회유 문제와 왜인의 토산물 진봉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서 서술하며 비교적 많은 사론을 첨가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을 종합해볼 때 <연산군일기>는 정확한 사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다소 과장된 서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으로 할 수 있겠다. 또한 연산군의 폭정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다 보니 정작 다른 실록 편찬 과정과는 달리 조정이 <연산군일기>에 대해 너무 소극적이었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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