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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62 : 조선의 역사 104 (제10대 연산군일기 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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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62 : 조선의 역사 104 (제10대 연산군일기 12)

두바퀴인생 2012. 4. 21. 09:54

 

 

 

한국의 역사 562 : 조선의 역사 104 (제10대 연산군일기 12)

 

                                                               

   

         

 

                                                         

 

  

제10대 연산군 일기(1476~1506년, 재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4. 양대 사화를 통한 연산군의 권력 독점(계속)

 

 

 

참고로 조의제문 원문을 싣는다.

 

조의제문(弔義帝文)


 

김종직이 생전에 세조의 왕위찬탈을 은유적으로 비유해 비난했던 글이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은 말그대로 "의제를 조문하는 글"로써, 초한쟁패기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회왕) 귀신이 꿈에서 나타났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회왕과 단종 모두 어린 왕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회왕이 왜 꿈에 나타났을까?"라는 마지막 문장의 뉘앙스도 그렇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바로 "칠장의"이다. 이것은 왕세자(王世子)가 입는 대례복大禮服으로서, 곧 구장(九章)에서 용(龍)과 산(山)을 뺀 화충(華蟲)•불(火)•종이(宗彛)•조(藻)•분미(紛米)•보(黼)•불(黻)의 7개 무늬를 새겨 넣은 옷이다. 즉,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을 의미한다는 것.

정리하면, 여기서 항우는 세조를 뜻하고, 의제는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당한 단종을 의미한다.

이 조의제문은 연산군대 에 있었던 무오사화의 중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김일손의 스캔들 기사를 사초에 기록한 사건으로 인하여 김일손이 압송되고, 사초에 적혀있던 김일손의 다른 기사 부분들을 검토하던 도중 조의제문이 걸려들게 된다.

조의제문은 당시 지식인들도 읽기 어려울 정도로 은유적 표현이 가득한 글이었는데, 유자광이 친절히 이 글을 해석해서 연산군에게 알려주었고, 조의제문이 세조의 쿠데타에 대해 비난하는 글임이 밝혀진다. 설령 김종직이 그런 의도로 쓰지 않은 글일지라도, 제자인 김일손이 그런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이 심문과정에서 밝혀졌다. 그리고 무오사화라는 헬게이트가 열리게 된다.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왜 쓴 이유가 무었인가 하는 하는 점이 의문이다.

 

저자였던 김종직은 내심 세조의 왕위 찬탈에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으로 생각만 할 일이다. 실제로 세조때 김종직은 아무말 없이 근무만 잘했다. 그러다가 이런 글을 쓴 걸 보면, 그냥 단종의 죽음에 대해 자신의 안타까운 마을믕 피력한 글이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단종을 내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하는 것은 세조의 후손인 조선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정면적인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아니 해석 되고도 남는다.

 

일반적으로 조의제문의 최초 발견자이자 보고자로 거론되어 수백년 동안 비판받았던 이극돈은 사실 그렇게까지 막장은 아니다. 오히려 능력있는 관료라고 보는 게 더 옳다. "불경을 외워서 벼슬한 인물"이란 것은 사림파에서 나온 비판으로, 같은 사료에는 오히려 "능력에 비해서 출세가 늦다"란 말도 나온다. 아들은 잡과를 보았을 만큼 솔선했던 인물. 이극돈네 집안인 광주 이씨는 당시 최고 명문가 중 하나였고, 이극돈의 5형제 중 정승 두명에 판서 하나가 나왔다. 명문가 집안 답게 당시 국정을 총괄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자부심도 있었던 집안이었다. 더군다나 이극돈은 그 집안에서 기대받는 인재로 차기 정승감으로 인정받았던 사람이었다. 이극돈이 사림파와 관계가 안좋았던 건 사실이지만, 함경도에 가서 국경 근무도 할 만큼 능력과 소신이 잇던 사람이었다.


오히려 이극돈은 조의제문을 최대한 덮어둘려고 노력했다. 조의제문을 처음 봤을 때 같이 이를 보았던 노사신과 '어쩌다 우리 후배들이 이렇게 되었냐'고 같이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김일손이 사초에 세조가 단종의 시체를 버려 짐승들이 먹게 했다거나, 성종의 아버지였던 덕종의 후궁들을 세조가 찝적댔다 라는 기록까지 수록해버렸기 때문에 국왕 귀로 들어가면 김일손은 물론이고 전체 관료 사회가 위험해 질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극돈은 이 문제의 보고를 올리는 데 주저했다. 하지만 이미 김일손의 사초가 문제가 있다는 소문은 이미 조정내에 퍼져있었고. 당시 인수대비의 동생으로 출세하였던 한치형이 그 소문을 듣고 이극돈을 달달 볶아댔다. 

하지만 정작 조의제문을 연산군한테 처음 올린 사람은 이극돈도, 한치형도 아닌 유자광이었다고 보여진다. 기록에 보면 조의제문을 본 이극돈이 이를 봉하고 일체 발설하지 않도록 했는데 정작 다음날이 되면 한치형, 이극돈, 노사신, 윤필상 등이 떼로 연산군을 찾아가서 조의제문 문제를 거론했다. 이는 연산군이 조의제문을 누군가한테서 엿들은 다음에 이극돈 등한테 '빨리 갖고와' 라고 버럭질 한 결과라고 밖에 추측이 안된다. 그리고 조의제문 문제를 거론한 중신들 중에 실록청 당상이 아니었던 사람. 즉 조의제문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를 못한 사람은 유자광 하나다. 누가 봐도 이건 유자광이 먼저 고자질하였고 분노한 연산군이 이극돈에게 닥달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벌어진 무오사화로 말미암아 이극돈은 보고를 늦게 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직을 당했고, 당연히 올라갈꺼라 예상되었던 정승 직위도 놓쳤다. 물론 그 대신 동생 이극균이 좌의정에 임명되었지만. 연산군은 이 때부터 광주 이씨 집안을 경계하게 되고 이후 갑자사화때 트집을 잡아 집안 자체를 멸문한 거나 다름없게 만든다. 덤으로 중종반정 이후에는 또 이러한 전력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지적당하고 멸시받아 이 가문 사람들은 대대로 고생을 숱하게 하게 된다. 후손인 이이첨 또한 이 부분으로 인하여 주변 사림 세력으로부터 숱하게 인신공격당하게 된다.


弔義帝文 원문


丁丑十月日                 정축 10월 어떤 날
余自密城道京山          나는 밀성으로부터 경산으로 향하여
宿踏溪驛                   답계역에서 숙박하는데
夢有神披七章之服      꿈에 신(神)이 칠장의 의복을 입고
頎然而來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自言                         스스로 말하기를
楚懷王孫心爲           "나는 초나라 회왕의 손자인 심(心)인데
西楚霸王所弑            서초패왕에게 살해 되어
沈之郴江                  빈강(郴江)에 잠겼다."
因忽不見                  그래서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余覺之                     나는 꿈을 깨어
愕然曰                     놀라며 이르기를
懷王南楚之人也      “ 회왕은 남초 사람이요,
余則東夷之人也        나는 동이 사람으로
地之相距                 지역의 서로 떨어진 거리가
不啻萬有餘里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而世之先後              세대의 선후도
亦千有餘載              또한 천 년이 넘는데
來感于夢寐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玆何祥也                 이것이 무슨 상서로움일까
且考之史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無沈江之語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豈羽使人密擊           어찌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而投其屍于水歟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是未可知也              이것을 알 수 없으니
遂爲文以弔之           마침내 문을 지어 조문한다.
惟天賦物則以予人兮 하늘이 사물의 법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孰不知尊四大與五常 어느 누가 사대와 오상을 높일 줄 모르리오.
匪華豐而夷嗇          중화라서 풍부하고 오랑캐라서 인색한 바 아니니
曷古有而今亡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겠는가
故吾夷人                그러기에 나는 오랑캐이요
又後千載兮             또 천 년을 뒤졌건만
恭弔楚之懷王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한다
昔祖龍之弄牙角兮    옛날 조룡이 아각을 가지고 노니
四海之波                사해(四海)의 물결이
殷爲衁                   붉어 피가 되었어라
雖鱣鮪鰍鯢             비록 전유와 추애일지라도
曷自保兮                어찌 보전하겠는가
思網漏而營營          그물 벗을 생각에 급급했으니
時六國之遺祚兮       당시 육국의 후손들은
沈淪播越                숨고 도망가서
僅媲夫編氓             겨우 편맹과 짝이 되었다오.
梁也南國之將種兮    항양(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군의 자손으로
踵魚狐而起事          어호(魚狐)를 쪼치 일을 일으켰네.
求得王而從民望兮 :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랐어라
存熊繹於不祀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도다.
握乾符而面陽兮      건부(乾符)를 쥐고 임금이 됨이여
天下固無大於芉氏   천하에는 진실로 미씨보다 큰 것이 없었다.
遣長者而入關兮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에 들어가게 함이여
亦有足覩其仁義      역시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았다.
羊狠狼貪               양흔낭탐이
擅夷冠軍兮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평정하였구나
胡不收而膏齊斧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嗚呼                     아아,
勢有大不然者兮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이여
吾於王而益懼         나는 왕에게 더욱 두렵게 여겼어라
爲醢腊於反噬兮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이 됨이여
果天運之蹠盭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나
郴之山磝以觸天兮   빈의 산이 우뚝하여 하늘에 닿음에야
景晻愛以向晏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을 향하고
郴之水流以日夜兮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구나
波淫泆而不返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른다.
天長地久               천지가 장구한들
恨其可旣兮            한이 어찌 다할까
魂至今猶飄蕩         넋은 지금도 표탕하다.
余之心貫于金石兮   내 마음이 금석을 꿰뚫음이여
王忽臨乎夢想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구나
循紫陽之老筆兮      자양의 노필을 따라감이여
思螴蜳以欽欽         생각이 초조하여 흠흠하다
擧雲罍以酹地兮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英靈之來歆         바라기는 영령은 와서 흠향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