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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60 : 조선의 역사 102 (제10대 연산군일기 10) 본문
한국의 역사 560 : 조선의 역사 102 (제10대 연산군일기 10)
제10대 연산군 일기(1476~1506년, 재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4. 양대 사화를 통한 연산군의 권력 독점(계속)
사림과 훈척의 불가피한 대립
사화는 '사림의 화'의 준말로 말 그대로 사림 세력이 화를 입은 것을 말한다. 사화는 당초 일으킨 쪽인 훈척 계열에서는 난으로 규정하였던 것이나 당한 쪽인 사림파쪽은 올바른 인물들이 죄 없이 당한 화라고 주장하여 '사림의 화'라는 표현을 쓰다가 사림계가 정치적으로 우세해진 선조 대부터 '사화'라는 표현이 직접 사용되었다.
조선조에 사화는 무오(연산), 갑자(연산), 기묘(중종), 을사(명종)사화 등 네 번에 걸쳐 일어났다. 이 사화는 주로 세조시대에 형성된 공신과 외척, 인척 세력이 도학적 사상에 기반을 둔 사림 세력의 정계 장악을 저지시킨 정치적 사건들이었다.
사림 세력의 정계 진출은 성종시대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이는 성종의 훈척 세력에 대한 견제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성종이 등용한 대표적인 사림 세력은 김종직 문하의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의 영남사림파였다.
이들 사림 세력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주로 언론을 담당하던 삼사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부서들의 역활을 살펴보면 사림들의 활동 범위를 알 수 있다. 사헌부는 백관에 대한 감찰, 탄핵 및 정치에 대한 언론을, 사간원은 국왕에 대한 간쟁과 정치 일반에 대한 언론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전에는 이 두 기관의 관원을 대간, 또는 언론양사라고 불렀다. 한편 홍문관은 궁중의 서적과 문헌을 관장하였으며, 정치 대화를 벌이는 경연관으로서 왕의 학문적, 정치적 고문에 응하는 학술적인 직무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세조 대에 집현전이 없어진 뒤에는 그 기능까지 함께 맡았다.
사림 세력은 주자학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부하는 동시에 요순정치를 이상적 정치로 설정하고 도학적(정주성리학) 실천을 표방했다. 그래서 훈신, 척신 세력을 불의와 타협하여 권세를 잡은 모리배로 몰아붙이며 자신들이 속한 삼사의 기능을 십분 활용하여 그들을 탄핵하곤 하였다.
사림 세력이 언론과 경연을 점유하여 자신들을 비난하자 훈척 계열은 사림들을 '홀로 잘난 무리들'이라고 비방하며 반격을 가하였다. 그래서 이들 두 세력은 정치적, 사상적으로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아 마침내 철저한 적대 관계로 나아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들 두 세력의 대립이 단순한 사상적, 정치적 대립이나 감정적인 반목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사실은 당시 사회 상황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세종 대 이후 사전의 증가에 따르는 토지 사유화는 과전법의 모순으로 지배층의 토지 겸병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 현상의 극대화는 서민의 경제생활을 압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인 훈구, 척신 세력은 인척과 벌족을 형성하고 정권을 독점하여 신진 사림의 정계 진출을 안팎으로 막았다. 그러므로 사림파는 이런 사회구조를 혁신하지 읺고는 자신들의 입지를 세울 수 없어 구질서를 혁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현하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훈척 세력과의 대립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성종이 김종직 일파를 등용하여 유교적왕도 정치를 펴려 한 것도 표면적으로는 확문적인 견지에서 이루어진 듯하지만 실상은 사회적 모순과 불합리성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렇듯 성종의 의도적인 지원을 받은 사림파의 공략에 훈척 세력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어야 했다. 사림이 언론을 점유하고 또한 왕의 고문역을 수행하고 있는 이상 훈척 세력으로서는 힘만으로 그들을 밀어붙일 수는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성리학
성리학(性理學)은 12세기에 남송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유교의 주류 학파이다. 성리학의 어원은 주희가 주창한 성즉리(性卽理)를 축약한 명칭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주희)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하고, 송나라 시대의 유학이라는 뜻에서 송학(宋學)이라고도 하며, 송나라 시대 이전의 유학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새로운 기풍의 유학이라는 뜻에서 신유학(新儒學)이라고도 한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頥)에서 주희(朱熹)로 이어지는 학통이라는 뜻에서 정주학(程朱學), 정주 성리학(程朱性理學), 또는 정주 이학(程朱理學)으로도 불린다. 이학(理學) 또는 도학(道學)이라고도 한다.
학문의 목적은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수양, 수기)를 위한 학문)이다.
주자 이전
대략 진종조(眞宗朝)로부터 인종조(仁宗朝, 998-1063)에 걸친 시기에 송나라의 학문 문화가 새로운 경향을 가지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범중엄(范仲淹)이나 정학(正學)의 4선생으로 호칭된 호원(胡瑗), 손복(孫復), 석개(石介), 진양(陳襄) 등은 각기 특색있는 학풍이나 주장을 가지고 서로 잇따라 나와 성리학의 선하(先河)를 이루었다.
범중엄은 그 명절(名節)과 고매한 식견으로 시대의 선구자로서 계몽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서하(西夏) 경영에 정치적 수완을 보여 중앙정부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학문적으로는 6경(六經)에 통하였으며 더욱이 역(易)에 정통하였고 장횡거(張橫渠)에게 《중용》을 주어 유학의 문에 들어가게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호원(胡瑗, 933-1059)은 안정 선생(安定 先生)이라고 호칭되며 교육가로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는데, 정이천(程伊川)도 그 문하에서 배운 준재(俊才)이다. 그의 <주역구의(周易口義)>는 역(易)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한대 유가(儒家)와 같이 상수론(象數論)을 혼합하지 않았다. 이천(伊川)의 역전(易傳)에 그 영향이 보인다.
손복(孫復, 992-1057)은 태산선생(泰山先生)으로 호칭되었다. 진사 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태산(泰山)에 은퇴하여 강학(講學)에 힘을 쏟았으며 <춘추존왕발미(春秋尊王發微)>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저술에서 종래의 주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러운 자기의 해석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중에도 다시 <춘추(春秋)>의 본지(本旨)를 정명정분(正名定分)에 있다고 하고 또 <춘추>에 실린 사실을 전부 도의에 위배된 것뿐이라고 하였다. 손복 및 그 제자인 석개(石介, 1005-1045)는 춘추론을 통하여 중국(宋王朝)의 정통성과 고전사상의 정통적 부활 및 양(楊)·묵(墨)·불(佛)·노(老) 사상의 배격을 주장하여 송조 국가체제의 정신적 지주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진양(陳襄)은 <대학(大學)> <중용(中庸)>에 의거 실천도덕론을 전개하여 <성명기(誠明記)>와 함께 송대 도덕의 궁리진성(窮理盡性)·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의 방향을 잡아 놓았다. 그의 지방정치에 있어서의 권농정책(勸農政策)이나 향촌민(鄕村民)의 교도에 이용한 <고령선생권유문(古靈先生勸誘文)>은 남송(南宋)의 주자(朱子)에 이르러서 크게 채택되어 그 모범이 되었다.
주자의 집대성
주자(朱子)의 학문은 북송(北宋)에서 일어난 신경향의 학술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이것을 절충하고 또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또 4서(<大學>·<中庸>·<論語>·<孟子>)를 특별히 중요시 하여 주석을 하였고, 《대학》의 <성의(誠意)>장의 주해는 죽기 3일 전까지 계속해서 수정했다.
이기론(理氣論)
이기론에서는 정이천(程伊川)의 2원론(二元論)을 계승하여 다시 더욱 상세·엄밀하게 체계화하였다. 형이상적(形而上的), 형이하적(形而下的) 논리 구별을 분명하게 하였다. 또 주돈이의 태극론(太極論)도 받아서 태극(太極)은 오직 1개의 이(理)의 자(字)라고 규정하여, 이(理)=태극(太極)=도(道:形而上的)와 기(氣)=음양5행(陰陽五行:形而下的)인 것은 형이하(形而下)의 음양2기(陰陽二氣)의 교감에 의해 생성되는 개체(個體)와 상즉불리(相卽不離)인 것이라고 말하였다.
도덕론(道德論)
도덕론에서 이천이 명(命)·성(性)·이(理)·심(心)을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에 <성즉리(性卽理)>, <심즉리(心卽理)>라고 한 데 대하여, 주자는 <성즉리(性卽理)>만을 취하고 심(心)은 형이하적(形而下的)인 것, 즉 음양2기(陰陽二氣)의 작용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사람의 성(性)은 이(理)이고 지선(至善)한 것이며 사람의 본연의 것이라고 하였다. 심(心)은 이(理)가 있는 곳, 이가 작용하는 장소이다. 또한 심(心)의 발동은 이(理)에 의하여 있게 되는데, 그 이야말로 사람에게 본래의 성(性)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본연의 성(性)이 지선(至善)하지만 현실에는 악도 존재하고 악인도 있다. 그것은 기품(사람도 氣의 집합에 의하여 이루어져 있다. 그 氣가 모이는 방법, 氣를 받는 방식은 개별적인 것이라고 朱子는 생각하였다)에 과불급(過不及)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理)=태극(太極)이라고 하는 형이상적인 것은 항상 사사물물(事事物物) 속에 있다. 사사물물이 없으면 다라서 이(理)는 없다. 즉 1물(一物)에 1리(一理)=1태극(一太極)이 있는 것이다. 논리적 과정을 말하면 이(理)가 있어야 물(物)이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물(物)이 없는 이(理)는 없다. 이런 까닭으로 이기(理氣)에 선후는 없다고 한다. 또 주자에 의하면 1물(一物)에 1태극(一太極)이 있는데, 이 이(理)는 즉 만물의 이(理)이다. 달이 호수나 냇물에 비쳐도 달은 원래 하나의 것이다. 일반자(一般者)·형이상자(形而上者)는 항상 개체(個體)에 내재하여 개체(個體)를 통하여 일반자(一般者)는 실현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도덕론에 적용되면 사람은 자기의 본연(本然)의 성(性)(理)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덕을 완성하는 것이며, 개별적 인간은 실천에 의하여서만 일반자(一般者)로서의 도(道)∼이(理)-성(性)을 구현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수양론(修養論)
수양론은 우선 격물치지(格物致知)이며 궁리진성(窮理盡性)인 것이다. 주자에 의하면 사사물물의 이를 궁구한다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나를 궁구하는 것이며 나를 다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물(物)의 이(理)와 심(心)의 이(理)와 심(心)의 이(理)와의 통일적인 파악에는 아직 불충분한 점이 있었다. 육상산(陸象山)이나 명(明)의 왕양명(王陽明)이 그 정곡을 찔러 비판했다.
후대에 미친 영향
주자사상(朱子思想)이 송대 이후 끼친 영향은 지극히 크다. 주자학은 주자의 생전에 있어 지방관적, 재야적(在野的) 입장에서의 사상을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원(元)·명(明)을 거쳐 청조에 이르기까지 관학적(官學的)인 아카데미즘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자학은 조선이나 일본(日本)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주자의 사상이 봉건사회에 있어서 지배계급의 상하적 신분의 확립을 지향하는 논리라고도 하지만, 그 학식·논리 구성·학문적 태도는 의연히 중국사상 내지 동양사상의 해명에 있어 중요한 지위를 점거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기도 하다. 다만 진로의 방향을 과거제도 한가지에만 집착하게 해 엔터테인먼트나 레크레이션 등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인위적으로 글공부만 강제하는, 지나치게 일방적인 방향으로 기울게 했으며, (정치 등에서) 특정 대상에 대한 음해 공작, 사물을 극단적으로 보는 인습 등은 그 근원이 성리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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