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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58 : 조선의 역사 100 (제10대 연산군일기 8) 본문
한국의 역사 558 : 조선의 역사 100 (제10대 연산군일기 8)
제10대 연산군 일기(1476~1506년, 재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3. 사림파의 개념과 존립 의미
사림파라 함은 일반적으로 16세기에 훈구파 내지 훈신, 척신 계열과 대립한 재야사류를 배경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을 일컫는다.
이 '사림(士林)'이라는 용어는 고려 말, 조선 초에도 간혹 쓰여지기도 하였으나 '무오사화 이후 사화가 거듭되면서 사화를 당한 선비 집단을 통틀어 표현하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사림파'라는 용어는 근대 역사학의 성립 후에 비로소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 사학자의 저술에는 조선 전기의 문인, 학자의 유파를 '훈구파', '절의파', '사림파', '청담파' 등으로 구분하였는데 이 구분에서 사림파는 훈구파에 대비되는 존재로서 그 대상이 둘로 나누어지고 있다.
우선 성종 대에는 '문장', '경술'과 관련하여 영남 일대의 종주격인던 '김종직' 문하를 가리키고, 다음으로는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의 밑에서 수업한 중종 대의 '조광조 일파'를 지칭했다. 김종직 문하들이 주로 '문예'를 중시한 '영남학자'들이었다면, '조광조 일파'는 '도학'의 비중을 절대시한 '영남, 기호학자'들이라는 점이 둘 간의 차이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유학을 전공하는 선비들을 일컬어 '사류' 또는 '사족'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 이후 도학에 중점을 둔 집단적인 학파를 이룬 사람들을 '사림'이라고 하기도 했다. 따라서 사림은 현직보다는 '재야 지식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학자'들을 지칭한다. 이들의 학습은 관학인 사부학당이나 향교보다는 서원이나 서재를 통한 경우가 많았고, 사림파는 '신유학' 즉, '성리학' 중에서도 중국 송대의 '정호', '정이' 형제와 '주희'가 체계화한 '정주성리학'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성리학은 송학, 정주학, 이학, 도학이 한 계통이고 명학, 육왕학, 양명학, 심학이 다른 한 계통을 이룬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자인 정주계의 이학이 발달하였고 상대적으로 육구연, 왕수인 등이 체계화한 육왕계의 심학은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흔히 성리학이라고 하면 정주학계의 이학을 가리킨다.
우리 나라의 성리학사에서 볼 때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까지는 사림파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사화기 시대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화를 겪으면서 사림파 학자들은 15세기 중엽부터 약 1세기 동안 성리학 특유의 의리의 실천에 역점을 두고 성장했다.
이처럼 조선 성리학은 일종의 실천 성리학으로서의 도학적 특색을 지녔는데, 사림파 학자들이 성리학의 의리관을 실천에 옮기려는 경향을 흔히 사림파 정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는 사회운동 내지는 정치사상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당시 사림파 학자들이 체질화시킨 성리학의 규범은 도덕적 규범의 성격이 강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성격을 지닌 규범이기도 했다.
사림파의 정치적 활동으로 가장 중시되는 것은 향촌 질서의 재확립과 관련되는 사회운동으로, 일종의 지방자치 기구인 유향소 및 향약의 제도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운동은 관료제에서 나타나는 모순들을 혁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군주 정치에 대한 인식에서도 그 이전의 정주학자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조선왕조 초기의 정치 주체는 군주로 인식되고 있었지만, 16세기 이후의 사림파 정신에서는 군주 역시 신하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닦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군주가 도학적 인격을 갖추지 못하면 군주의 자격이 없다는 가치관이 성립되어 있었다. 주자의 <대학> 정신에서 비롯된 이 같은 인식의 전환은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군주의 절대권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도학적인 이념을 실천하는 군주를 요구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인재의 등용에서도 과거제보다는 천거제를 선호하였다. 그것은 과거제가 인간을 다스리는 능력을 측정하기에는 부족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때문에 사림이 공인하는 인재들을 천거의 형태로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실제 중종 대의 조광조 등은 현량과를 통해 이를 실천으로 옮기기도 했다.
16세기 사림은 정치적으로 훈척 세력과 대립하면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규합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정치가 종식되자 사림은 내부적으로 학연과 파벌에 따라 나누어지게 된다. 이를 흔히 붕당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파 간의 상호 견제를 통해 새로운 신권정치를 낳았다.
따라서 사림은 일차적으로 훈척의 대립 세력으로 발생하여 몇 번에 걸친 사화를 겪은 다음, 선조 이후 훈척 세력이 거의 사라지자 내부적으로 파벌에 따라 나누어져 붕당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은 붕당 현상은 한쪽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지 않은 한 조선 조정을 균형 있게 끌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는 곧 조선 후기의 정치에서 왕이 붕당의 조정자로 자리메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종직
김종직(金宗直, 1431년 6월 ~ 1492년 8월 19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시인이다. 자(字)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일명 일선)이다. 세조 때에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여 성종 초에 경연관·함양군수(咸陽郡守)·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승정원도승지·이조 참판·동지경연사·한성부 판윤·공조 참판·형조 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의 한사람이자 중시조격이다. 그러나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왕조 수립 이후 성리학을 전승한 것은 길재, 권우였고, 사림파 출신으로 처음 조선정계에 진출한 이는 정몽주, 권근이었으나, 세조 이후 조선 조정에 본격적으로 출사한 것이 김종직과 그의 동료, 제자들이었으므로 김종직을 사림파의 실질적인 중시조로 간주한다.
김종직은 자신을 전별(餞別)하는 문인들을 '우리당'(吾黨)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을 종주로 삼았던 정치세력이 사림(士林)이다. 이를 통상 붕당 정치의 시원으로 간주한다.
정여창, 김굉필, 이목, 권경유, 김안국, 김정국, 김일손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고,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그의 손제자였으며, 남효온과 남곤, 송석충, 김전, 이심원 역시 그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항우의 초 회왕 살해에 비유한 조의제문을 지어 기록에 남겼으나 그자신은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출생과 가계
점필재 김종직은 1431년(세종 14년) 6월 외가(外家)가 있는 경상남도 밀양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에서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지내고 사후 증 호조판서에 추증된 강호 김숙자와 밀양박씨(密陽朴氏)의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 김숙자에게서 수학하였다. 어머니는 밀양박씨는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朴弘信)의 딸이다. 증조부는 사재감령(司宰監令)을 지낸 은유(恩宥)이고 할아버지는 성균관 진사 관(琯)이다.
아버지 강호 김숙자는 경상도 고령과 개령, 성주 등지에서 수령과 교수직을 역임하였으며, 밀양에 거주하던 박홍신의 사위가 되면서 밀양에 정착했다.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김숙자의 대에 이르러 박홍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 관계에 진출을 시도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김숙자는 포은 정몽주의 문인인 야은 길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청소년기
아버지의 대에 외가로부터 물려받은 재력으로 유복하고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기억력이 좋고 글씨를 잘 썼는데, 일찍부터 시(詩)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날마다 수만 마디의 말을 기억하여 약관이 되기도 전에 신동이라 알려졌다.
기억력이 좋고 글을 잘 지었던 그는 아버지 김숙자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아버지 김숙자는 관료생활 와중에도 퇴청 후에는 서실을 열고 후학을 가르쳤는데, 그 외에도 정헌 이재인(李在仁) 등 9명의 이름있는 문하생이 배출되었다. 그를 포함한 김숙자의 이름있는 문하생 9인을 가리켜 9현인이라 부른다.
과거에 낙방과 학문 연구
1446년(세종 28년) 김종직은 과거에 응시, 소과에 〈백룡부 白龍賦〉를 지어 김수온(金守溫)의 주목을 받았으나 시류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낙방시켰다. 낙방한 뒤 귀향길 시에서 ‘시인 눈에 들지 않을 것을 일찍 알았던들, 차라리 연지(燕脂) 잡아 모란 그릴 것을’ 하며 넋두리한다. 그 뒤 김수온의 형인 승려 학조(學祖)의 부패 행위를 경멸, 집중공격하게 되면서 그와의 관계는 악화된다. 그러나 김수온은 곧 사망했고 그의 관직생활에 제한이 되지는 않았다.
그뒤 형 김종석(金宗碩) 등과 함께 황악산(黃嶽山) 능여사(能如寺)에 가서 독서와 학문 연구에 힘썼다. 1451년(문종 1) 울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 조씨와 결혼했는데, 그는 김종직의 문인인 조위(曺偉)의 누나이기도 했다.
1453년(단종 1년) 태학에 들어가 〈주역 周易〉을 읽으며 주자학의 원류를 탐구하여 동료들의 경복(敬服)을 받았다. 이해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455년 세조가 정변을 일으켜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과거 시험에 응시한다. 1456년(세조 2년) 1월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해 3월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던 강호 김숙자가 사망한다.
관료 생활
과거 급제와 관료생활 초반
1459년(세조 5년) 식년문과에에 급제하여 출사했다.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었다가 승문원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 이때 승문원의 선배였던 어세겸(魚世謙)이 어느날 그의 시를 보고 탄식하며 “ 나보고 말채찍을 잡고 하인이 되라 해도 달게 받아 들이겠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집현전 저작이 되었다가 승문원 박사·(校檢)교검, 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이때 그는 왕명에 따라 세자빈 한씨(예종비 장순왕후)를 애도하는 〈세자빈한씨애책문 世子嬪韓氏哀冊文〉을 지었다. 1462년(세조 8년) 승문원박사로 예문관봉교를 겸하였다.
1464년 세조가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 등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1465년 다시 복직되었으며, 그해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로 나갔다. 1467년 내직으로 돌아와 교리가 되었다가 수찬(修撰), 1468년 이조좌랑을 지냈다. 1469년(예종 1년) 전교서교리가 되었다. 세조 즉위 초 경연(經筵)을 열고 특별히 문학에 뛰어난 문인을 선발할 때 선발된 자가 십여 명인데 그는 우수한 편이었다.
그는 세조의 찬탈(세조 찬위)을 비판하였으나 세조의 조정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성종때까지 벼슬살이를 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로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성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제자들을 관직에 등용시킴으로써 훈구파와 심한 대립을 일으켰다.
조의제문과 풍자
그는 세조의 단종에 대한 양위를 가장한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풍자하는 작품을 남겼다.
조의제문은 단종과 세조를 초나라 의제와 항우에 비유했다. 그런데 문장이 워낙 난해해 당대의 식자층도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조의제문을 접한 연산군이 “어찌 이 글이 세조를 능멸하고 노산군을 위한 제문이란 것인가?”하고 되물을 정도였다.
항우는 스스로 보위에 오른 뒤 의제를 강에 던져 죽인다. 김종직은 단종의 시신이 강에 떠내려갔다는 풍설을 듣고 중국의 고사에 빗댄 것이다. 이 글은 그의 사후 이미 죽어 땅에 묻힌 김종직을 부관참시시키고 숱한 선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도 관직에 나간 것에 대해 이후 비판의 소재가 되었으며, 허균은 김종직론 이라는 비평을 남겨 그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잡학 반대와 세조와의 갈등
1463년(세조 9년) 여름 그는 불사(佛事)를 간언하다가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464년 7월 세조에게 음양오행 등 잡학을 장려한다고 질타했다가 호되게 당하였다.
세조가 '능력이 있는 문신을 천문, 지리, 음양, 의학, 사학, 시학, 율려(律呂) 등 한 분야에 배속시켜서 익히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는데 김종직은 그만 '사학과 시학은 본래 유자의 일이고 나머지는 잡학(雜學)인데 문신에게 힘써 배워 능통하게 하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며 반대한 것이다.
“ | 사학과 시학은 본래 유자의 일입니다만 나머지는 잡학(雜學)이고 미신인데 문신에게 힘써 배워 능통하게 하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
” |
세조가 듣지 않고 물리치자 그는 같은 내용의 상소를 계속해서 올렸다. 그러자 분노한 세조는 용서하지 않았다.
“ | 김종직은 내가 잡학을 장려한 까닭을 알 것인데, 참으로 경박하다. | ” |
사물의 진리를 밝히는 학문이 성리학이니만큼 천문 지리 의학 등의 실용학문의 중요성을 인식한다면 문신이 앞장서 익혀야 하는데 김종직이 섣불리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김종직은 곤장을 받고 투옥되고 파직되었다. 공신 세력은 사림파의 존재를 거슬리는 존재로 취급하여 사림의 당수인 그를 엄하게 처벌하려 하였지만 공신들의 발호를 견제하던 세조는 그를 고신 박탈과 곤장 선에서 끝냈다. 그리고 이듬해 복직하고 경상도 평사로 나갔던 것이다.
이시애의 난 전후
1466년(세조 11년) 경상도병영 막부에 있으면서 병마평사로서 절도사 진례군을 수행하여 다인현에 다녀왔고, 7월에 이시애가 거병하여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병마절도사의 공문을 가지고 병력을 모집, 선발하기 위해 영해부에 다녀왔다. 1467년 이시애의 난 진압 병력 모병일을 마치고 내직으로 돌아와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1468년(세조 14년) 이조좌랑 겸 춘추관기주관, 교서관교리 지제교가 되었다. 그해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1469년(예종 2) 조산대부 전교서교리 겸 예문관응교 지제교가 되었다. 그해 10월 6일 제범(帝範)의 훈사를 인쇄하여 바치라는 예종의 명을 받아 제범의 훈사를 영인하였다.
성종 즉위 초
1469년(예종 2년) 예종이 승하하자 '시책문'(諡冊文)을 지어 올리고 만사 3수를 지어올렸다.
성종 즉위 직후 집현전의 예(例)에 의하여 예문관(藝文館)의 정원을 늘려서 문학(文學)하는 선비를 선발하여 충당시켜 모두 경연관(經筵官)을 겸하게 하여, 특별히 예문관수찬(修撰)이 되었다. 곧 경연관을 겸임하였다. 1470년 예문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에 임명되었다. 또한 성리학의 장려, 보급 및 사림파의 정계진출을 위해 성균관의 유생 수와 강의를 늘림으로서 세력 확장을 꾀한다.
성종 즉위 초, 수빈 한씨를 인수대비로 책봉하면서 왕명으로 〈인수왕후봉숭왕책문 仁壽王后封崇王冊文〉 등을 지었다.
불교 척결 운동
조카인 단종과 사육신 관련자 8백여 명을 처형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진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들을 출입시켰는데, 이는 예종과 성종대에도 계속되었다. 세조비이자 성종의 조모인 정희왕후가 남편과 함께 불교를 후원했었고, 인수대비역시 불교 신자였다. 김종직은 소격서 철폐와 불교 혁파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와 할머니를 거역할수 없었던 성종은 그에게 간곡하게 만류하여 되돌려보내곤 했다.
중 학조(學祖)가 대비의 위세를 등에 업고 해인사의 주지를 자신의 수하 인물로 갈아치운 사실을 기록했던 것이다. 학조가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과 영응대군의 땅과 백성들을 사취한 사실을 기록한 것도 문제가 되었다.
영응대군 부인 송씨는 군장사란 절에 올라가 설법을 듣다가 계집종이 깊이 잠들면 학조와 사통을 했다. 불교를 미신으로 간주한 그는 학조를 혐오했으며 이를 불교비판의 소재로 활용한다. 학조의 부패와 월권행위에 이어 간통 사건까지 벌어지자, 이를 수시로 언급하며 불교비판과 공박의 소재로 한다. 소격서는 철폐되지는 않았지만, 이 문제는 후일 그의 제자들이 다시 사초에 기록하려다가 무오사화의 빌미를 제공하는 한가지 원인이 된다.
경연관과 지방관 생활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지제교(藝文館修撰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늙은 어머니를 봉양해야 된다는 이유로 외직으로 나가 함양군수(咸陽郡守)가 되었다. 함양군수로 재직 중 벼슬 품계가 거듭 승진했는데, 1471년 봉열대부(奉列大夫)·봉정대부(奉正大夫), 1473년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으며, 1475년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를 거쳐 함양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했다.
함양군수로 나갔는데 그 다스림에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며,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민중을 화합하는 것을 임무로 삼으니 정사의 성적이 제일이었다. 또한 행음주례를 정하고 주자가례와 여씨춘추를 참고로 향약을 정하여 보급시켰으며, 도적은 용서하지 않고 엄히 다스렸다. 그가 재직중인 동안 함양과 근처 고을에는 도적이 창궐하지 못했다.
1475년(성종 6년) 임기가 만료되어 내직으로 돌아왔는데 성종은 "종직은 군(郡)을 잘 다스려서 명성이 있으니 좋은 자리로 옮기도록 하라."고 하고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로 전임되었다. 그해에 마침 중시(重試)가 있었는데 모두들 권하면서 "중시는 문관이 빨리 승진할 수 있는 계기이다."라고 하였으나 끝내 응시하지 않았는데, 여론이 고상하게 생각하였다.
유자광과의 원한관계
유자광은 종 출신 서자로 세조의 총애를 받은 이후 예종, 성종, 연산군 때까지 요직을 지냈다. 유자광은 남이가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하여 죽인 일이 있는데(남이의 옥사) 김종직은 유자광을 혐오하고 경멸하였다.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유자광이 대관림을 돌아보고 소고대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내려와 학사루를 보고 절경에 감탄하여 아전에게 필묵을 시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학사루에 걸어놓았다. 함양 군수로 있던 김종직은 유자광이 지은 시가 학사루 현판으로 걸린 것을 보고 떼도록 지시한다.
- 김종직 : 아니, 유자광 따위가 감히 학사루에 현판을 걸 자격이 있느냐? 고매하신 선비들의 현판 가운데 어찌 쌍놈의 작품이 걸릴 수 있느냐? 당장 저 현판을 당장 내려라.
- 하인 : 사또, 그래도 이 현판은 관찰사 나으리의 현판이옵니다.
- 김종직 : 관찰사가 아니라 정승이면 무엇하리? 쌍놈은 쌍놈이니라.
김종직은 대노하여 아전에게 호통을 치고 그 현판을 철거하여 아궁이에 태워 버렸다. 그러나 이 일은 입소문으로 전달되었고 관찰사 유자광이 이를 듣고 불쾌하게 여겼다 한다. 또한 천첩 출신 서자로 출신성분에 열등감을 가진 유자광은 이 일로 김종직을 증오하게 된다.
김종직이 관직을 그만두고 밀양으로 낙향할때 문하생들이 서울에서 정자에 술상을 차려놓고 송별시회를 했다. 이때 초청하지도 않은 유자광이 이곳에 들러 인사를 하면서 선생에게 술잔을 권하여 마지못해 잔을 받게되자 선생의 제일 나이 어린 제자 홍유손이 '무령군 대감! 송별시 한수 지어 보시우! 후세 사람들 중 누가 또 대감의 시를 현판해서 걸지 모르지 않습니까 ?'라며 조롱하였다.
함양 학사루 사건을 빗대 조롱한 것으로, 무안당한 유자광은 이후 김종직과 그 문하생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당시에 세도도 막강하였고 벼슬도 높았던 유자광은 선비들로부터 이렇게 모욕을 당하자, 이극돈, 임사홍 등과 손잡고 선비들을 몰살 시켰던것이다.
외직 근무와 후학 양성
1476년(성종 7년) 1월 지승문원사가 되었다. 그러나 잠시 지승문원사를 맡았으나 다시 외직을 자청하여 선산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함양과 선산 두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미신을 타파하고, 무당과 성황당 등을 철폐하였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서당을 세워 아이들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 사자소학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서원을 장려하였다. 또한 봄·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양노례(養老禮)를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관료이면서도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승언(李承彦)·홍유손(洪裕孫)·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제자들을 길러냈다.
1479년(성종 10년) 어머니 박씨의 상(喪)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에 내려가 3년상(三年喪)을 치렀는데 상례를 주자의 주자가례대로 행하였으며, 시묘살이 중 병을 얻어 건강을 해친 것이 예에 지나치니 사람들이 그의 지극정성에 감동하였다.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친 뒤에는 충청남도 금산(金山) 촌야(村野)에 있었다.
금산 촌야에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며, 촌야의 서당 근처에는 친히 연못을 파서 연(蓮)을 심었으며 집의 이름은 경렴(景濂)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평소 송나라의 학자 무극옹(無極翁) 주돈이을 사모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학동들을 가르치고 시를 읊으며 세상일에는 뜻이 없었다. 그러나 1482년 10월 홍문관 응교(應敎)로 부름을 받자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출사하게 되었다. 경연에 입시해서는 말이 간략하면서도 이해가 쉽고 뜻이 잘 통하여 강독(講讀)을 가장 잘 하여 성종의 총애와 관심이 지극하였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弘文館應敎知製敎) 겸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며, 직제학을 거쳐 1483년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 등 승정원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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