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559 : 조선의 역사 101 (제10대 연산군일기 9)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559 : 조선의 역사 101 (제10대 연산군일기 9)

두바퀴인생 2012. 4. 18. 07:56

 

 

한국의 역사 559 : 조선의 역사 101 (제10대 연산군일기 9)

 

                                                               

   

         

 

                                                         

 

  

제10대 연산군 일기(1476~1506년, 재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3. 사림파의 개념과 존립 의미(계속)

 

 

김종직(계속)

 

생애 후반

사림파의 세력 진출 확보

도승지에 임명되자 스스로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성종이 윤허하지 않고 하교하기를 '경의 문장과 정사가 충분히 감당할 만 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훈구파의 반발이 심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5년(1484) 8월 6일조는 도승지로 임명받은 김종직과 그 문인(門人)들에 대해 “사람들이 이를 비평하여 '경상도 선배당(慶尙先輩黨)'이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고, 김종직도 자신을 전별(餞別)하는 문인들을 '우리 당'(吾黨)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을 종주로 삼았던 정치세력이 사림(士林)이다. 훈구파들은 그가 파벌정치를 조장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조참판 동지경연사로 옮겼는데 이때 성종은 그에게 특별히 금대(金帶) 하나를 특별 선물로 하사하였고, 이후로도 그의 글재주를 아껴 각별하게 대우하였다. 이후 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이 되었다가 다시 경기도관찰사개성부유수, 전라도관찰사전주부윤 등의 외직을 지내고 병조참판이 되어 되돌아왔다. 이 무렵부터 자신이 선산부사 등으로 재직할 때 길러낸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면서 사림파(士林派)를 형성하여 사림파의 영수가 되어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후 도덕적 명분론을 주창하여 훈구파의 찬탈과 부패를 비난하는 한편 향촌의 질서과 규범 확립이라는 이유로 제자들과 함께 유향소(留鄕所)의 복립운동(復立運動)을 전개하여 1488년 그 복립절목(復立節目)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향촌사회에서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 진출을 노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밖에 그는 송석충, 남효온 등과 교류하였다. 그는 우리 당 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상처와 재혼, 병환

이후 본처 조씨를 상처하고 1485년(성종 16년) 사복시첨정(司僕侍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딸인 남평문씨(南平文氏)와 재혼했다. 그의 아내 조씨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증조모와 외조모 아래서 컸다. 시집와서는 7남매를 연달아 잃고 결국 아이를 낳다 얻은 병으로 떠났다. 김종직은 박복(薄福)한 아내의 영전에서 통곡하며 긴 제문(祭文)을 바쳤다. '당신 아버지는 정정히 계시는데 아름다운 날이면 누가 술을 마련할 것이며, 어린 두 딸 시집갈 땐 누가 짐을 꾸려주겠는가...'라며 통탄하였다.

 

1487년(성종 18년)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 그는 정몽주―길재―김숙자로 이어지는 한국 유학의 정통을 계승하여 학문과 덕행이 만인의 사표가 되었다.

 

문하에서 김굉필(金宏弼)·김일손·정여창(鄭汝昌)·이목·권오복(權五福)·권경유·남곤·주계부정 이심원, 최부(崔溥) 등이 배출되었고 그 외에 박한주(朴漢柱)·유호인(兪好仁)·이원(李黿이주(李胄)·원개(元槩)·이승언(李承彦)·조위(曺偉)·남효온(南孝溫)·김맹성(金孟性)·송석충·이의무·강흔·이기·홍유손(洪裕孫) 등의 도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또한 이철균, 곽승화, 강흔,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강희맹, 노조동, 강겸, 이계맹, 정승조, 강백진, 강중진, 강혼, 김흔(金昕), 김용석(金用石), 이종준(李宗準), 김기손, 손효조, 신영희(辛永禧), 안우(安遇), 표연말, 허반, 홍한(洪瀚), 정세린, 주윤창, 양준(楊浚), 방유녕(方有寧) 등이 배출되었다. 박형달(朴亨達), 안구(安覯), 박수견(朴守堅), 민구령(閔九齡) 형제 등도 그의 문하에서 배운 문인들이었다.

 

왕족인 무풍부정 이총, 신숙주의 손자인 신용개, 중종반정의 3대장의 한사람인 유순정성희안,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 일파 숙청을 묵인한 김전, 임사홍의 아들인 임희재 등도 그의 문인이었다. 이후 조광조(趙光祖), 김안국, 김정국, 이연경 등에게까지 그 학통이 계승되었다.

 

최후

1488년 5월에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반려되고 병조참판 겸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가 그해 10월 16일에 한성부좌윤 겸 동지성균관사로 임명되었다. 그뒤 한성부 판윤을 거쳐 1489년(성종 20년) 1월에 에는 공조참판겸 동지경연 홍문관 제학 성균관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여름 형조판서겸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가 중풍(中風)의 마비 증세로 인하여 휴가를 주었으나 낫지 아니하므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병환에 차도가 없자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1492년형조판서에 재임명되고 지경연춘추관사와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다. 그러나 곧 병으로 사직하고 밀양으로 낙향하였다. 7월 집안에 있던 서적을 살펴 다른 사람에게서 빌린 서책들을 되돌려주게 하였다.

 

그해 8월 밀양의 명발와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부음이 듣고 성종은 특별히 조회를 이틀간 파하고 애도하였으며 태상시에 명하여 바로 문간의 시호를 내렸다. 5남 3녀를 두었으나 아들 넷을 일찍 여의고, 계비 문씨에게서 얻은 아들 숭년(崇年)의 나이가 7세밖에 되지 않아 계비인 문씨(文氏)가 상주가 되고, 제자이자 외조카인 강백진, 강중진, 제자이자 처남(그의 본처 조씨의 남동생)인 호조참판 조위가 호상을 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61세였다.

 

밀양군 부남(府南)의 무량원(無量院) 서산(西山) 건좌손향(乾坐巽向)에 묻혔다.

 

김종직이 죽자 어떤 호랑이가 한마리 나타나 그의 무덤 옆에서 날마다 슬피 울다가 숨을 거뒀다 한다. 그의 묘 옆에는 김종직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호랑이의 설화가 깃든 인망호폐(人亡虎斃) 비석이 있다.

 

사화와 부관참시

 사후 6년 뒤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 〈조의제문 弔義帝文〉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이극돈 등의 비난을 받아 공론화되었다가 세조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압수당한 뒤 불살라졌다. 이극돈은 자신이 상중에 술을 마시고 기생을 출입시킨 것을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것을 못마땅히 여기다가 조의제문의 내용을 문제삼은 것이다.

 

조의제문이 문제가 된 것은 그가 세조의 찬탈에 비판적이며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직설적으로 비판한 것인가 여부는 불확실하며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장악하여 훈구파를 비판해왔던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날조, 해석했다고 평가된다. 이후 다른 훈구세력 역시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김종직과 그 일파의 처벌에 찬성한다.

 

 

 

 

송시열

 

 

이 사건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김굉필·남곤·이종준(李宗準) 등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중종이 즉위한 뒤 조광조, 김식 등 김굉필정여창의 문하생들이 조정에 다시 출사하면서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다.

 

사후

 

 

1709년 2월에 추서된 시호 증시 교지

 

 

이후 중종사림파가 조정을 장악하게 되면서 선비의 사표로 추대되었다. 조광조는 그를 성균관 문묘에 배향하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뒤 기묘사화로 그의 문하들은 다시 큰 타격을 입었으나, 1565년 윤원형 등이 축출되면서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사후 신도비가 세워졌고, 지중추부사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홍귀달(洪貴達)이 글을 지었으나 임진왜란정묘호란 등으로 유실되었다. 1634년(인조 12년) 여헌 장현광이 다시 신도비를 세우고, 창원대도호부사 김해진관병마첨절제사(昌原大都護府使 金海鎭管兵馬僉節制使) 오여발(吳汝撥)이 글을 써서 다시 건립한다. 묘갈명도 다시 개보수되어 우암 송시열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1689년(숙종 15년)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 등의 건의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되고, 1709년(숙종 35년) 2월 문간(文簡)에서 문충(文忠)으로 시호가 고쳐졌다. 시호(諡號)는 정2품 이상 대신에게만 내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畢齋集), 유두유록(遊頭流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 《동문수(東文粹)》 등이 있다. 총재관으로서 《동국여지승람》 55권을 증수하였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 및 작품

저서

  • 《점필재집》
  • 《청구풍아 (靑丘風雅)》
  • 《동문수 (東文粹)》
  • 《당후일기》
  • 《유두유록》(遊頭流錄)
  • 《기행록(紀行錄)》

공저

  • 《동국여지승람》

작품

  • 〈조의제문〉
  • 〈세자빈한씨애책문 世子嬪韓氏哀冊文〉
  • 〈인수왕후봉숭왕책문 仁壽王后封崇王冊文〉
  • 계천군손소묘갈명(雞川君孫昭墓碣銘)
  • 좌찬성 이파(李坡) 묘지명
  • 호안공 황치신 신도비명(朝鮮故胡安公黃致身神道碑銘)
  • 김처사효문명(金處士孝門銘)- 김극일(金克一)의 묘갈명
  • 유음묘지명(兪廕墓誌銘)
  • 선산지도지(善山地圖誌)
  • 경상도 지도지(慶尙道地圖誌)
  • 송도록(松都錄)의 발문
  • 신문충공문집(申文忠公文集)의 서문 : 문충공 신숙주의 문집 서문

 약력

  • 1431년(세종 13년) 경상남도 밀양 출생
  •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성리학을 수학
  • 1446년(세종 28년) 16세때 소과에 응시, 낙방
  • 1453년(단종 1년) 진사시 합격
  • 1456년(세조 2년) 정월 문과에 낙방, 3월 부친 김숙자 사망
  • 1457년(세조 3) 조의제문을 지음
  • 1458년(세조 4) 서실 겸 별장인 명발와(名發窩)를 짓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다
  •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 권지를 거쳐 승문원 부정자 역임
  • 1462년(세조 8) 수빈 한씨를 받들어 높이는 옥책문(玉冊文)을 지어올렸다.
  • 1463년(세조 9) 문소전(文昭殿)에 제사지내는 대축문을 지었다.
  • 1464년(세조 10년) 불교 비판과 잡학 반대로 투옥, 장형을 받음
  • 1465년(세조 11년) 복직, 경상도 병마평사로 부임, '경상도지도지' 편찬
  • 1466년(세조 12년) 이시애의 난 진압을 위한 병력 모집의 공문을 들고 영해부로 갔다.
  • 1467년(세조 13년) 이시애의 난 진압 관련 임무를 마치고 귀환, 홍문관 수찬이 됨
  • 1470년(성종 1년) 함양군수, 재직 중 감사 유자광을 의도적으로 피함
  • 1471년(성종 2년) 함양군수 재직 중 유자광의 현판 소각 사건
  • 1476년(성종 7년) 지승문원사
  • 1476년(성종 7년) 선산부사
  • 1479년(성종 10년) 10월 어머니 박씨 사망
  • 1482년(성종 13년) 부인 사망, 홍문관 응교에 제수됨
  • 1484년(성종 15년) 승정원좌부승지, 승정원도승지
  • 1485년(성종 16년) 이조참판, 문씨와 재혼
  • 1486년(성종 17년) 예문관 제학
  • 예문관 제학 재직 중 동국여지승람 수정 보완에 참여
  • 1487년(성종 18년) 5월 전라도 관찰사로 나감
  • 1488년(성종 19년) 2월 형조판서로 복귀
  • 1488년 8월 병으로 사직하려 하자 왕이 만류함. 곧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밀양 귀향
  • 1489년 이후 병으로 요양
  • 1492년 4월 사망

 

가족 관계

  • 증조부 : 김은유(金恩宥)
  • 할아버지 : 김관(金琯)
  • 아버지 : 김숙자(金叔滋)
  • 어머니 : 밀양박씨(密陽朴氏, 1400년 - 1479년 12월 20일)
    • 형(兄): 김종석
  • 부인: 조씨, 울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 - 4남 2녀
    • 아들 : 곤(緄)
    • 며느리 : 해평김씨(海平金氏), 홍문관수찬(修撰) 김맹성(金孟性)의 딸
    • 딸 : 김씨
    • 사위 : 유세미(柳世湄, 생원)
    • 딸 : 김씨
    • 사위 : 이핵(李翮)
  • 계비: 남평 문씨(南平文氏), 첨정 문극정(文克貞)의 딸 - 1남 1녀
    • 아들 : 김숭년(金嵩年, 1485년 - ?)
    • 딸 : 김씨, 무후
    • 사위 : 신용계(申用啓)

 

평가와 비판

긍정적 평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은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 문하로 후진을 양성하며 조선 유학의 맥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내용면에서는 길재(吉再) 및 아버지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문 경향은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주안으로 하는 실제적 방면에 치중한 것이었다는 평이다.

 

하지만 잘알려지지 않은 김종직에 대한 평가도 있다. 이것을 알려면 김종직이 사림(士林)의 영수이므로 사림에 대해서 알아야한다. 사림에 대해서 논하길 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연암집(燕巖集)』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도(道)를 논하는 사람들을 사림(士林)이라 한다”라고 정의한 것처럼 학문하는 선비를 뜻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태조~세종실록 등에 ‘사림에서 애석하게 여겼다(士林惜之)’ ‘사림이 비루하게 여겼다(士林鄙之)’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처럼 ‘학문하는 재야의 양반 사대부’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세조 때 등장한 부패한 훈구(勳舊) 공신 세력과 자신들을 구별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성종 무렵 사림은 훈구 공신에 반대하는 신진 정치세력을 뜻하는 정치적 용어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 정치적 사림의 선구 격이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었다.

 

부정적 평가

김종직은 세조 2년(1456) 회시(會試)에서 낙방했다가 세조 5년(1459) 식년문과에 급제해 세조 때 벼슬을 했다. 그 점 때문에 훗날‘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수양대군이 단종을 죽인 것을 비판했을 때 비판할 자격이 있었냐는 비평을 받기도 한다. 이는 후일 유자광이극돈 등을 비롯하여 그를 비판하는 측에서 그를 비판하는 소재거리로 수시로 제기해온 것이기도 하다.

 

또한 스스로 자초한 일로 함양군수 시절 경내 누각에 걸린 유자광의 친필 액자를 불살라 버렸다고 전해지는데 이런 사소한 감정싸움이 참혹한 악연으로 이어져 제자가 죽거나 귀양가고 부관참시라는 혹독한 참화를 겪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책임을 누가 지을 수 있었겠는가'하는 물음이 지금에 와서도 대두되고 있다.

 

김종직은 성종 8년(1477) 과거에 응시하러 서울로 올라가는 자신의 문인(門人)들에게 ‘우리 당에는 뛰어난 선비가 많다(自多吾黨多奇士)’고 말한 것처럼 자주 ‘우리 당(吾黨)’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처럼 조선 초기시대에 살았던 김종직은 인정받는 요즘으로 말하면 '사림(士林)의 초대 당수'였다. 그러나 편가르기와 파벌을 노골적으로 조장했다는 비판도 있다.

 

허균은 김종직론 이라는 글을 남겨 그를 위선자라며 질타하였다.

김종직론(金宗直論) - 교산 허균

천하에 이록(利祿)이나 취하고 자신의 명망을 훔치는 자가 있는데, 세상에서 군자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그걸 믿을 것인가? 나는 믿지 못한다고 말하겠다.

 

왜 그게 믿어지지 않을까? 자기 것으로 해버리거나 훔친다면, 비록 도덕(道德)과 인의(仁義)에서 나왔더라도 거짓 짓임을 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록과 명망이겠는가. 이미 이록을 취하였고 명망을 훔쳐서 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의 영화와 녹봉을 누린다면, 정말로 자기의 지혜를 다하고 온 마음을 기울여 자기의 직분으로 당연히 할 일에 맞도록 하여야 그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보완할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영화와 녹봉은 나의 뜻이 아니다.” 하면서, 능청스럽게 한갓 그 수레를 붉게 꾸미고 그 인끈을 붉게 하면서 일생을 마친다면, 그의 죄악은 죽음을 당해도 용서받지 못하리라.

김종직은 근세에 이른바 대유(大儒)다. 젊은 시절에는 벼슬하려고도 않더니, 세조(世祖)가 과거에 응시하도록 다그치니 부득이해서 과거에 올랐으며, 또한 시종(侍從)의 직책에 드나들더니 벼슬이 높아졌다. 그러면서는 모친이 늙었으므로 억지로 벼슬한다고 일컬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천수(天壽)를 다하고 세상을 마쳤으나, 오히려 벼슬을 그만두지 않았었다. 그의 문인(門人) 김굉필(金宏弼)이 더러 그가 시정책을 건의하지 않음을 간(諫)하면, 이어서, "벼슬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건의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다. 김종직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록을 취하고 명망을 훔치며 능청스럽게 한갓 수레를 붉게 하고 인끈을 붉게 한다고 말해지는 바의 사람이었다.

 

계유정란(癸酉靖亂)을 당하여, 김종직은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 무리들처럼 녹을 먹던 사람이 아니었고, 김시습(金時習)처럼 평소에 은택(恩澤)을 입었던 것도 없었다. 다만 시골의 변변찮은 한 선비여서 옛 임금 단종(端宗)을 위하여 죽어야 할 의리도 없었으니, 그가 벼슬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 본래 위선이었다. 비록 위선이었지만 이미 뜻을 세웠다면, 임금이 아무리 다그치더라도 죽기를 맹세하고 가지 않았어야 옳았다. 그런데 화(禍)를 두려워하여 억지로 나온 것처럼 하였다. 이미 과거에 합격해서는 붓을 귀에 얹고 임금의 말을 기록했으며, 사책(史策)을 끼고 고운 털자리에 엎드리기도 하였다. 또 고을을 맡아서 그의 어머니를 봉양했으니, 그가 이록을 취했던 것은 정도를 넘었었다. 또 명호(名號)를 훔치고 싶어 남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어버이가 있다. 그러나 끝내는 서산(西山)의 뜻을 지키리라.” 하였다.

 

그러나 이미 어머니의 복제(服制)를 벗고도 응교(應敎) 벼슬을 받았었고, 10년 동안에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뛰어올랐다. 그만 쉴 만도 하나 오히려 더 탐내며 떠나가지 않았다. 책임을 완수치 못하면서 직책상 당연히 해야 할 것도 하지 않다가, 문인(門人)이 그 점을 지적해 주면 모면하려고 꾸며대는 말로써 대답하였다. 이게 과연 군자라고 여길 만한가? 이런 속임수는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지금까지 계속하여 그 사람을 칭찬하고 있으니, 무엇 때문일까? 내가 가만히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았더니, 가학(家學)을 주워모으고 문장 공부를 해서 스스로 발신(發身)했던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하고 마음은 교활하여 그의 명망을 높이려고 한 세상 사람을 용동(聳動)시켰고, 임금의 들음을 미혹되게 하여 이록을 훔치는 바탕으로 삼았다. 이미 그러한 꾀를 부렸지만 자기의 재능을 헤아리니 백성을 편하게 하고 구제하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하고는 자신의 졸렬을 감추는 수단으로 하였으니 그것 또한 공교로웠다.

 

그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짓고 주시(酒詩)를 기술했던 것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벼슬을 했다면 이 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기나 하였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 죽은 뒤에 화란을 당했던 것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의 간사하고 교활했던 것에 화내서 사람의 손을 빌어다가 명백하게 살륙한 것이 아닐는지? 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의 형적(形迹)은 살펴보지 않고, 괜스레 그의 명성만 숭상하여 지금까지 치켜 올려 대유(大儒)로 여기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때문에 특별히 나타내어 기록한다.

교산 허균은 김종직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남겼지만 이때문에 김종직의 학통을 계승한 사림파로부터 심한 공격을 당하고, 허균의 저서들은 정조 이전까지 불온서적으로 언급조차 금기시되기까지 했다.

 

사상과 영향

학맥상으로는 백이정안향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진다. 김종직의 대에 이르러 많은 제자를 양성하게 된다.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도전
             →이숭인
             →정몽주권근
                  →권우세종대왕
                     →정인지
                  →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
                             →김굉필조광조
                                 →김안국
                                 →김정국
                                 →주계부정 이심원
                             →김일손
                             →김전
                             →남곤

김전기묘사화에 가담하여 조광조를 숙청했고 남곤기묘사화를 묵인했는데, 남곤김전 역시 김종직이 길러낸 인물이었다. 조광조김식김굉필의 문하생이었다.

 

조의제문

그는 일찍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는데, 그가 죽은 지 6년 후인 1498년(연산군 4년)에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이것을 성종실록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1498년 연산군 4년 7월 13일 김일손의 공초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문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산(魯山)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斂襲)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

조의제문 내용은 항우에게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회왕 즉, 의제(義帝)를 조상한다는 제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꼬는 내용으로,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단종에 대한 묘사와 유사한 면이 있어 세조와 후인들의 정통성을 부정당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김종직은 유유의 찬탈을 따른 신하를 "유씨(劉氏)가 우리 임금이네 하면 저 푸른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하였겠지" 힐난하고, 이렇게 이어갔다.

요순의 훈풍을 높이도 끌어댔지만(高把堯舜薰)/선위를 받는 게 끝내는 역적이었네(受禪卒反賊)/역사는 글을 교묘하게 꾸며서(史氏巧其文)/거북 기린 용 봉황이 부응하였다고 유인하였네(諉以四靈應)

유유가 요순의 선위를 내세웠지만 실은 반역이며, 그에 따른 찬양도 모두 거짓이라고 한 것이다. 유자광은 이 부분을 세조와 훈구공신을 비방한 증거로 들이댔다. 섬뜩한 머리놀림이며 무서운 올가미치기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종직은 부관참시(관을 부수어 시체의 목을 벰)를 당하고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이 모두 참화를 당하였다. 김종직은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수괴가 되고, 사초에서 「조의제문」을 언급한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등은 참형을 당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김종직에게 배운 적이 있고 과거를 보거나 벼슬을 할 때 지도와 자문을 받은 후학들은 대부분 '난언(亂言)'과 '붕당(朋黨)' 죄에 걸려 죽거나 유배를 갔다. 이로서 김종직은 '사림의 영수'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영남학파의 분류와 영향

영남 지방에는 조선조 이후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여러 학맥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선 초기의 김종직(金宗直, 1431년 ~ 1492년)을 영수로 하는 영학파(嶺學派)와 중기의 조식(曺植, 1501년 ~ 1572년)을 중심으로 하는 남명학파(南冥學派), 이황(李滉, 1501년 ~ 1570년)을 종주로 하는 퇴계학파(退溪學派), 그리고 장현광(張顯光, 1554년 ~ 1637년)을 주축으로 하는 여헌학파(旅軒學派) 등이 있었다.

 

영남학파의 학맥은 정몽주(鄭夢周)에서 비롯해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 김종직의 부)를 거쳐 김종직에로 계승된다. 김종직은 도학과 문학으로 유명해 당대 유학의 조종이 되었다. 김종직은 문하에 많은 제자를 두었다.

 

저명한 학자로는 현풍의 김굉필(金宏弼)·곽승화(郭承華), 함양의 정여창(鄭汝昌)·유호인(兪好仁)·표연말(表沿沫), 경주의 손중돈(孫仲暾), 선산의 강백진(康伯珍), 성주의 김맹성(金孟性), 안동의 이종준(李宗準), 청도의 김일손(金馹孫), 밀양의 박한주(朴漢柱) 등으로 꼽는다.

 

당쟁은 붕당(朋黨)이 서로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건창(李建昌)의 <당의통략>(黨議通略)에 나오는 '붕당지쟁'(朋黨之爭)의 준 말이기도 하다. 또한 붕당은 같은 스승의 제자들로 구성된 편당(偏黨)을 말하므로 붕당은 학연(學緣)과 혈연(血緣) 지연(地緣)으로 뭉친 학단(學團)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퇴계(退溪) 남명(南冥) 율곡(栗谷) 우계(牛溪) 학단 등이 있다.

 

처음에는 기호의 선배당(서인)과 영남의 후배당(동인)으로 갈렸고 이같은 붕당 초기의 동서분당기에는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년~1584년)같은 영향력 있는 학자가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년~1598년),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년~1593년) 등의 서인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면서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동인이 우세해지자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인 북인이 갈렸다. 퇴계 제자인 유성룡(柳成龍)이 임란 후 주화(主和)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데 비해 남명 제자인 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정인홍은 당파가 동서로 양분되자 다른 남명학파와 함께 동인편에 섰고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를 계기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립될 때 북인에 가담하여 영수(領首)가 되었다.

 

그후 북인은 광해군 조에 기호의 화담(花潭) 학단과 연립정권을 세워 결속력이 약해 사분오열되어 싸우다가 인조반정으로 무너졌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차지한 서인은 북인들이 정권을 독차지했다가 망한 것을 교훈 삼아 소북 등 온건세력을 모아 관제야당인 남인을 만들었다.

 

숙종 조에 이르면 서인과 남인의 밀고 밀리는 서·남 당쟁이 심하게 일어나 국가가 망하게 생겼다. 숙종 초기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서인과 대치하고 있었다.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놓고 서인 내부적으로 강경론을 주장하는 측과 온건한 해결을 주장하는 측으로 나뉘었는데 강경이 노론이고 온건이 소론이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과 윤증(尹拯)을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나뉘어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극에 달한 것은 경종 때였다. 숙종 말 경종의 왕위계승을 지지했던 소론과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延礽君:영조)을 지지한 노론 사이에 나타난 정쟁이다. 결국 영조가 즉위하자 입장이 바뀌어 노론들은 소론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영조 때 노론의 4대신이 신원되는 등 소론이 정권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없애고 국가를 살리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고 4색당파를 고루 쓰자는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이 대두하게 되었다. 정조조에 가서는 4색당파보다는 사도세자를 동정하느냐 여부를 가지고 정국이 세자를 동정하는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시파(時派)와 세자의 실덕(失德)을 지적하고 영조의 처사를 옳다고 보는 김구주(金龜柱) 중심의 벽파(僻派)로 갈렸다. 그러나 영조정조의 전체 시기로 볼 때는 노론 위주로 정국이 운영되어 갔다.

 

결국 학자들의 학맥에 따라 나눠지는 붕당정치로 조선 초기부터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정작 조선이 망한 것은 이런 붕당과 당쟁뿐 아니라 몇몇 노론가문의 외척세도정치에 의해서 였다.  '붕당정치(朋黨政治)' 대신 '사림정치(士林政治)'라는 개념으로 조선 중·후기의 정치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듯이 아직도 학자간의 평가는 달라지겠지만 영남학파에 대한 학맥간의 논쟁은 좀더 신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관직 생활과 후학 양성

김종직은 현직 관직에 있으면서 동시에 서당을 차리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강의와 서예를 가르쳤다. 후대의 학자인 이황, 이언적, 박승임 등이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던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이후 김굉필, 남곤, 이이, 성혼, 송시열 등이 현직에 있으면서 동시에 후학을 양성하게 된다.

 

기타

한훤당은 21세때 함양 군수로 있던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점필재는 한훤당을 가르치면서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두었다면 마땅히 소학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며 손수 소학을 건네준다. 이후 김굉필은 소학을 배우고 실천하며, 늘 소학을 행동의 최고 지침서로 삼았다. 한훤당은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하며 소학 공부에 몰두했다. 사람들이 나라 일에 대해 물으면 "소학을 읽는 아이가 어찌 대의를 알겠습니까"하고 대답하며, 한결같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고 다스리는데 전념했다. 한훤당은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다른 글을 읽었다.

 

이은대

경상남도 함양군의 이은대는 김종직이 유자광을 피해 숨은 정자였다. 유자광의 고모는 함양군 지곡면 수여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천대와 설움 속에서 살아온 서자였고, 경상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고 경상도로 내려왔을 때는 입신양명하여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고모에게 인사차 함양에 들렸다. 당시 함양부사는 김종직이었다.

 

군수는 관찰사보다 아래로 관찰사에게 깎듯이 인사를 하고 융숭한 대접을 해야 되었다. 유자광을 평소 경멸하던 김종직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고, 유자광에게 굽신거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자 출신의 쌍놈 주제에 뭣하러 이곳에 온담. 내 어찌 그에게 고개를 숙이리.' 하고 중얼거리며 아전에게 지방 순행차 출장갔다고 하도록 명하였다.

 

유자광이 어명을 받들고 공무로 오는 것도 아니고, 사사로운 일로 오는 것이므로 그를 만나야 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벼슬이 높은 사람 앞에서 거만하게 행동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굽실거리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김종직은 함양의 이은대로 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