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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56 : 조선의 역사 98 (제10대 연산군일기 6) 본문
한국의 역사 556 : 조선의 역사 98 (제10대 연산군일기 6)
제10대 연산군 일기(1476~1506년, 재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2. 연산군의 등극과 광적인 폭정
임사홍 (계속)
정계 복귀와 무오사화 전후
연산군 즉위 후 공신적장자에 대한 가자로 1계급 승진하여 가선대부가 되었다. 1497년(연산군 3년) 4월 가선(嘉善)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이때 대간이 그의 가자가 부당하다고 논박하였으나 연산군이 듣지 않았다. 그해 12월 다시 가선 대부 상호군(嘉善大夫上護軍)이 되었다.
연산군 때에 그 아들 임숭재(任崇載)가 부마(駙馬)로 임금의 총애를 얻자, 그 연줄로 갑자기 높은 품계에 올랐다. 그러나 아들 임희재(任熙載)가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무오사화 당시 곤장 100대를 맞고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그러나 희재는 뒤에 1504년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갑자사화 이후 그는 방방곡곡을 다니며 얼굴 반반한 여자를 찾아내 연산군에게 바치는 '채홍사'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수치심을 느낀 그는 이를 모욕적인 대우라고 여겨 연산군이 부여한 채홍사 일을 태만하게 하였다.
연산군은 그가 미녀를 데려오는 실적이 신통치 않음을 지적하며 "다 죽게 된 거나 마찬가지인 신세에서 구해줬거늘, 쓸모없는 늙은이가 은혜도 모르는구나" 하며 경연장에서 그에게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기도 했다.
채홍사 거부와 연산군과의 갈등
임사홍은 사화 이후 정식으로 등용되어 병조판서가 되었지만 결코 조정의 원로대신 취급을 받지 못했다. 주 임무는 여전히 글씨 쓰기와 묏자리 알아보기, 그리고 채홍사로서 지방을 다니며 미인들 모아오기였다.
그가 채홍사 노릇을 했다는 사실은 후대에 간신으로 손가락질받게 되는 근거의 하나인데, 사실 그가 적극적으로 임했던 것 같지는 않다. 미인이 많다고 소문난 평안도에서 미인을 뽑아오라고 보냈더니 뽑기는 뽑았지만 기준에 두루 맞는 미인이 하나도 없어 안되겠다는 보고를 올린 내용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처음에는 할수 없다고 피하다가 마지못해 채홍사로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연산군은 벌컥 성을 내며 신하들 앞에서 그를 매도하였다.
“ | 이미 뽑았다면 거느리고 와서 복명(復命)함이 옳거늘, 달랑 보고만 올리는 것이 무엇이냐? 전에 사홍이 여러 사류(士類)에게서 배척을 받기 거의 수십년에, 내가 특별히 임용하여 마치 물에서 건지고 불에서 구해준 것과 같으니, 나라를 위하여 신명을 다 바쳐야 하거늘! 사홍은 약간의 재주가 있다고 하나 덜 떨어진 자이다. | ” |
이후에도 그는 채홍사를 회피하거나 소극적으로 하였다. 그러자 연산군은 그가 이극균과 친했던 점을 언급하며 그를 위협하기도 했다.
생애 후반
폐비윤씨 사건 확대
즉위 직후 사초의 기록을 우연히 찾아 본 연산군은 정현왕후가 자신의 생모가 아니며 생모인 폐비 윤씨가 사사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를 왕후로 추숭하려는 사업을 시도했고, 이때 사림파 관료들은 선왕 성종의 유지를 이유로 폐비 윤씨의 추숭을 반대했다. 이때 임사홍은 신수근, 유자광 등과 함께 폐비 윤씨의 생모 장흥군부인 신씨를 연산군과 만나도록 주선한다. 임사홍은 신수근과 함께 궐내에 출입하던 유자광을 통해 연산군에게 선을 댔다.
생모의 사사 외에 외할머니가 그때까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연산군은 임사홍을 통해 외할머니 고령군부인 신씨를 만난다. 그뒤 외할머니 고령군부인 신씨가 전해 준 피묻은 적삼을 보고 이성을 상실한다.
그의 세 아들 중 총명했던 셋째 아들 임희재는 연산군의 살육을 비판하다가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임사홍은 아들 희재가 죽임을 당하던 날에도 슬픈 내색을 하지 않고, 평일과 다름없이 그의 집에서 연회를 베풀고 고기를 먹으며 풍악을 울리니,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 이를 엿보고는 더욱 신임과 은총을 더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무서운 사람이라며 경계하였다.
1504년 이후로는 앞서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일일이 앙갚음하였고,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모두 부관참시(斬屍)하였다. 후대의 사림파들이 기록한 실록의 평가에 의하면 온 조정이 그를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비록 세 신씨(愼氏), 즉 신수근·신수겸.신수영 형제라 할지라도 또한 조심스럽게 섬겼다고 한다.
가정의 불행
그는 가장 사랑하던 셋째 아들 희재를 잃었다. 임희재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김종직의 제자가 되었다.
연산군 4년 아버지 임사홍과 관련된 추문을 극복하고 장원급제를 하기도 하였다. 야사에 따르면 임희재는 집 병풍에다가 연산군을 진시황에 비기며 그의 폭정을 비판하는 시를 썼다. 연산군이 어느 날 임사홍의 집에 찾아갔다가 이 병풍을 보고 격노했다. 그리고 임희재를 죽이겠다고 하자 임사홍이 "그렇지 않아도 이놈이 불초하여 제가 먼저 처치하시라고 아뢰려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들이 죽던 날,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잔치를 벌이고 흥청거리며 놀았다. 그날 저녁에야 연산군 일행이 떠나간 뒤 세인의 이목을 피해 대성통곡했다 한다.
다른 야사에서는 임희재가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자 연산군에게 그가 참소하여 죽이게 했다 한다. 최용범은 이 설의 신빙성을 의심한다. '사실이라면 참으로 비정한 아버지, 인간성이 결여된 사람으로 보인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실록에는 임희재가 무오사화에 희생된 이목의 도당으로서, 이목의 집을 수색했을 때 시국을 비판하는 임희재의 편지가 나왔기 때문에 희생된 것으로 적혀 있다.
임사홍 자신도 유자광과 함께 이극균의 친구였다 하여 처형당할 뻔하기도 했다.
임사홍보다 연산군에게 더 가까웠던 또 다른 아들 임숭재 역시 연산군에게 농락당했다. 임숭재는 개인적으로 미인을 알선해서 연산군에게 공급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누이동생인 문성정(文城正) 이상의 부인도 있었다.
위선과 야만성에 대한 체념
결국 폐비 윤씨의 복권으로 만족하려던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살육극으로 번져나갔다.
총명한 사람이던 임사홍은 이런 파행의 세월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구의 그 날이 오면 자신이 먼저 희생될 것도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의 폭주를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도 책임의 일부를 쓰고 타죽을 것을 알면서도 집에 불을 지르는 사람과 같았다. 그는 사회가 뒤집어쓰고 있던 위선의 껍질을 벗기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래서 풀려난 야만성에 희생되기를 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들 희재, 사촌 동생 남곤 등이 연루되었으나 아무도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건을 추국하는 형관이 되는 것은 한사코 거부하였다.
생애 후반
1504년,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과 모의하여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사건을 보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켰디. 특히 무오사화때, 이전에 당한 일에 대한 보복으로 사림파들을 일망 타진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아들인 임희재(任熙載)도, 외사촌 동생인 남곤(南袞)도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까닭으로 화를 입었으나 구제하지는 못했다.
1504년 6월 자헌 대부(資憲大夫) 풍성군(豊城君)을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7월초 겸 예문관 제학(兼藝文館提學), 이후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병조판서에 이르렀지만 사림파로부터 연산군의 악행과 폐륜적인 행동을 부추긴 인물로 지목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495년에는 아들 임광재를 1505년 아들 임숭재를 병으로 잃었다.
1504년 8월초 그의 집에서 병이 나았다는 이유로 특별히 가자되어 8월 16일 종1품 숭정대부의 품계를 받아 숭정대부 병조판서(崇政大夫兵曹判書)가 되었다.
1505년 조선에 입국한 명나라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로 임명된 이조 판서 김수동(金壽童)이 원접사직을 사양하는 바람에 그가 원접사가 되었다. 그해 9월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되었다. 10월 병조판서로 연산군에게 건의하여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는 이에게는 가족을 데리고 함께 부임할수 있게 배려해줄 것을 청하여 성사시켰다. 그뒤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는 이 역시 가족들을 함께 데리고 가도록 편의를 봐줄 것을 건의하였으나 사헌부, 사간원의 비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후
1506년 4월 이조 판서 김수동(金壽童)이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므로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4월말 중국 사신에게 결례를 범했다 하여 국문을 당하였다.
7월 20일 우참찬으로 승진 7월 29일에는 다시 좌참찬이 되었다. 8월 17일 지사로 전임하였다가 닷새만에 예문관의 제술을 맡아보게 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촉체(蜀體) 해서(楷書)에 능하였으며, 작품으로는 광주의 서거정의 묘비명, 금천의 노사신의 신도비문, 양주의 박중선 묘비문, 광주의 이계손 묘비명, 한확 묘비명, 연천의 영원윤호 묘비명, 월산대군의 비명 등이 전한다. 1506년 음력 9월 2일 중종 반정 때 아우 임사영과 함께 반정군에게 붙잡혀 격살되고, 시신은 부관참시 되었다. 향년 62세였다.
중종반정과 부관 참시
중종 반정이 나던 날 살해되었다. 그의 시신은 서둘러 여주군 능현리 선영에 장사되었다.
그러나 임사홍이 죽은 뒤 20여일 후에 새 임금 중종에게 의금부가 아뢰기를 “임사홍은 선왕조에서 붕당과 결탁하여 조정을 문란케 하였으되 오히려 관전(寬典)을 입어 처단을 모면하더니 폐왕조에 이르러서는 그 아들 임숭재를 연줄로 하여 나인 장녹수(張綠水)에게 빌붙어 온갖 꾀를 다 부리며 악한 일을 하도록 부추겼고, 충직한 사람들을 해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며 임금을 불의에 빠뜨려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적몰가산(籍沒家産)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결국 그는 부관참시되었고, 후에 누군가 시신을 다시 수습하여 매장하였다.
사후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24-8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근처에 아버지 임원준, 할아버지 임견의 묘소가 있다.
셋째 아들 임희재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화를 당하였으나 연좌되지 않았고, 그의 외사촌 동생 남곤 역시 김종직의 제자인 사림파 정치인으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유배생활을 하였으므로 연좌되지 않았다. 남곤은 유배 중 연산군을 축출하자는 박원종, 성희안 등의 거사에 동조, 지지를 보내기도 한다. 1489년(성종 20년)에 그를 비판하여 논란이 된 처조카 주계부정 이심원 역시 사림파 인사로 김종직의 문인이었다.
선조 이후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그는 간신의 대명사로 비판 일색이었다. 허균(許筠)의 홍길동전에서 조차 그는 간신으로 매도된다.
대한민국의 작가 정비석의 작품인 '소설 연산군'에서는 그가 연산군을 충동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1995년 이후 연산군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면서 일방적으로 간신으로 몰린 임사홍이 간신이거나 무오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제공자는 아니라는 이견도 대두되고 있다. 사림파를 해치기 위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설이 통설로 제기되어 왔으나 갑자사화 때는 그를 변호하던 훈구파 인사들이 대거 희생되었고, 직접적인 원한관계에 있는 인물은 처조카 이심원만이 유일했으므로 1970년대 이후 궁중파대 부중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등장하였다.
작품
- 서거정묘비명 (徐居正墓碑銘)
- 노문광공사신신도비명 (盧文匡公思愼神道碑銘)
- 월산대군이정비명 (月山大君李婷碑銘)
- 이계손묘비명(李繼孫墓碑銘)
- 한확 묘비명(韓確墓碑銘)
- 박중선묘비명(朴仲善墓碑銘)
- 영원윤호묘비명(鈴原尹壕墓碑銘)
- 대사헌정경조묘비명 글씨
사상과 신념
공정성
성종이 정희왕후, 인수왕비 등의 뜻에 따라 내불당을 설치했을 때 앞장서서 반대했으며, "재상이라고 해도 법을 어기며 단호하게 처벌해야 합니다"라고 진언하기도 했다.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월권행위나 뇌물 수수, 범법행위를 하면 가차없이 탄핵하였고, 그 중에는 공신들과 공신자제들도 있었다.
충신 등용
그는 임금에게 충신과 어진 신하를 가려서 쓰고, 간신을 분별할 줄 알아야 된다는 뜻을 여러번 건의하였다.
"충신과 간신을 잘 구분하여 충신을 높이고 간신을 물리치는 것이 정치의 요체입니다. 전하께서는 부디 유념하소서."라고 간하기도 했다.
가족 관계
- 증조부 : 임거경(任巨卿)
- 할아버지 : 임견(任肩)
- 아버지 : 임원준(任元濬)
- 어머니 : 정경부인 의령 남씨, 남규의 딸, 남곤의 고모
- 동생 : 임사영
- 처 : 전주 이씨, 보성군(寶城君)의 딸(효령대군의 손녀)
- 아들 :
- 아들 : 풍천위(豊川尉) 임광재(? - 1495년) - 예종의 딸 현숙공주(顯肅公主)와 혼인
- 아들 : 임희재(任熙載, 1472년 - 1504년)
- 아들 : 풍원위(豊原尉) 임숭재(? - 1505년) - 성종의 딸 휘숙옹주(徽淑翁主)와 혼인
- 딸 : 풍천 임씨
- 딸 : 풍천 임씨
- 사위 : 노종(盧種, 노사신의 손자)
- 외조부 : 남규(南珪)
- 외삼촌 : 남치신(南致信, 1420년경(?) - ?)
- 외사촌 동생 : 남포(? - 1570년)
- 외사촌 동생 : 남곤(1471년 - 1528년)
- 외삼촌 : 남치신(南致信, 1420년경(?) - ?)
- 사돈 : 노공유(盧公裕, 노종의 아버지)
- 사돈 : 노사신(盧思愼)
평가와 비판
그의 글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의 으뜸이었다. 중국어에도 능통해 중국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사역원과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최용범에 의하면 그는 '유자광과는 비교도 안되는 명문 주류이자, 한명회나 유자광처럼 거친 데라고는 없는 우아한 선비였다.'고 평하였다.
홍문관 교리 등 청요직에 있을 때의 그는 소신이 뚜렷하며 바른 말을 잘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용범은 "연산군도 임사홍도 시대의 모순이 낳은 사생아들이었다. 그들은 파격과 폭력으로 채워지지 않는 허무를 채웠다. 물론 그 허무를 극복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킬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인(聖人)에게나 가능했다. 그리고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지 보통의 인간에게 성인이 될 것을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라 하여 그 역시 한사람의 희생자로 보기도 했다.
사림파 집권 이후 그는 성종의 유지를 깨고 연산군에게 생모 폐비 윤씨의 일을 꺼내 무도하게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는 비판이 가해졌다. 그러나 그가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의 전말을 전하기 이전에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외조모와 외숙부를 석방하기도 했다.
연산군이 사화를 일으킨 것은 모친 폐비 윤씨를 추숭하는데 반대한 사림파의 행동을 왕권에 도전한 것으로 간주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1990년대에 가서야 그가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인가 하는 여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논란과 의혹
갑자사화 배후설
갑자사화는 임사홍이 사림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연산군을 부추겨 일으킨 것이라는게 중종 이후의 해석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희생자들 중에서 임사홍이 원한품었을 법한 사람은 자신의 처조카이면서 자신을 나락으로 밀어넣었던 이심원과 그 아들 이유녕 뿐이었다. 이극균이나 어세겸, 홍귀달 등은 오히려 임사홍을 두둔해 온 편이었던 것이다. 연산군은 자신의 복수를 했을 수 있으나 임사홍의 복수를 해주지는 않았던 셈이다.
발언 파문
갑자기 대사간에 임명된 임사홍은 사간원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내 예조참의로 옮겼고, 다시 이조참의를 맡았다가 도승지로서 임금을 보좌하게 했다. 그런데 성종 9년 4월 21일 임사홍은 별 생각 없이 한마디 했다가 마침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당시 흙비가 내리는 천변이 있었다 하여, 대간의 요청으로 술을 일절 금하기로 했었다. 임사홍은 이에 대하여 연이어 제사가 있는데 술을 전부 금할수 있겠느냐며 "약간의 흙비가 내렸다고 그것을 천변이라 하여 무턱대고 삼가는 것은 지나칩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대간들이 강력하게 주청하니 어쩔수 없지 않은가"라는 성종의 대답에 "대간의 말이라고 무조건 들어주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이는 사간원, 사헌부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다.
금주령에 대한 임사홍의 말은 하늘의 꾸지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임금의 자세를 부정하고 임금이 '사치 향락'에 빠져들도록 부추긴 것이며, 대간에 대한 말은 바로 언론을 탄압하고 폭군을 양성하려는 음모라는 것이었다. 언론 3사가 일제히 임사홍을 간신으로 지목하고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대간의 언론권을 늘 존중해 왔던 성종은 임사홍의 말을 다소 마땅치 않게는 여겼지만, 죄줄 일이라고 보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언론은 임사홍의 아버지 임원준까지 끌어들이면서 처벌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임사홍은 소인이며 임원준은 탐욕스럽고 부패하였다"는 이유였다. 성종은 마침내 대간들을 소집하여 임사홍 부자를 그토록 탄핵하는 이유를 물었는데, 별로 뾰족한 근거가 나오지 않았다. 성종은 대간들을 파직시켜 버리고, 어쨌든 임사홍도 체임시킨다. 임사홍이 말실수를 했다 하여 그의 직첩도 거두었다.
기타
-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 폐비 윤씨를 추숭하는 과정에서 선왕의 유지를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한 사림파와의 갈등 속에서 발생하였다. 그가 갑자사화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라 보기는 어려우나 그가 반정군에게 죽은 이후 연산군의 폭정의 원인을 그가 부추긴 것처럼 전래되었다.
- 조선시대에는 왕릉 이외에는 무인석을 세우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1504년 아버지 임원준이 죽자, 무덤을 조성하면서 무인석을 배치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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