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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53 : 조선의 역사 95 (제10대 연산군일기 3) 본문
한국의 역사 553 : 조선의 역사 95 (제10대 연산군일기 3)
제10대 연산군 일기(1476~1506년, 재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1. 왕위를 이은 폐비 윤씨의 아들 융
성종시대는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종의 정치력에 힘입어 조정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평화의 이면에는 서서히 퇴폐 풍조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사람이란 원래 배부르고 등 따스하면 점점 주색과 사치, 방탕에 빠져들기 쉬운 동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종은 도가를 숭상하고 스스로 군자임을 자처하는 인물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가 넘치는 경향의 성격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이러한 호기는 그의 가족관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12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30명에 가까운 자식들을 얻었다. 결국 가지많은 나무 바람 잘 날이 없듯이 이런 호기가 가져온 결과는 가족 간에 평지풍파를 예고하는 불씨를 낳고 말았다. 그 불씨가 바로 희대의 폭군으로 평가받고 있는 세자 융 연산이었다.
한때 어린 시절부터 사가에서 자랄 때 성종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왕비 윤씨는 세자 융을 낳고 왕비가 된 후에 성종이 다른 여자들과 밤을 보내는 일이 잦자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할 요량으로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빈으로 강등될 지경에 처하게 된다. 숙의의 신분에서 내전 최고의 위치이자 국모인 중전의 자리에 올라왔는데 다시 빈으로 강등된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윤씨는 성종의 배려로 강등되는 수모는 겪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질투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급기야 왕과 다투다가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일을 일으키고 말았다. 국모의 체통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는데, 한편 중전으로부터 얼굴에 상처를 입은 왕의 체통은 말이 아니었다. 당시 법도대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던 만큼 왕의 분노도 컸지만 그녀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격분은 더한 것이었다.
이 일로 조정에서는 폐비론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하들은 왕비를 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단순한 왕비가 아니라 바로 다음 왕이 될 왕자 융의 어머니였던 까닭이었다. 따라서 폐비론을 내세웠다가는 다음 왕에 의해 보복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감히 누가 목숨을 내놓고 세자의 어머니를 폐하자고 하겠는가?
하지만 왕과 인수대비의 입장은 달랐다. 어쩌면 성종 자신은 부부의 정 때문에 왕비를 폐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수대비는 페비 윤씨를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던터라 폐비론을 굽히지 않았고 여기에 한명회의 훈구 세력과 김종직 등의 사림 세력이 가세하였다.
그 때문에 성종은 일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수대비의 압력에 결국 윤씨를 폐비시키고 말았다. 사가로 폐출된 윤씨의 수난은 단순히 서인으로 전락한 것에 그치지 않고 폐출된 지 3년이 지난 1482년 왕자 연산군을 세자에 책봉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자, 조정 대신들간에는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윤씨의 명줄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서 폐비 윤씨의 아들 융이 비록 적장자이나 폐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한다는 자체가 문제였고, 만약 왕자 융을 세자로 책봉하겠다면 모든 것을 사면하여 폐비 윤씨를 복권시켜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인수대비의 반대가 문제였다. 폐비 윤씨가 왕위를 이을 세자의 어머니이기에 결코 사가에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윤씨 동정론에 위기를 느낀 인수대비는 몇몇 후궁들과 모의하여 그녀를 더욱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말하자면 윤씨가 사가에 나간 뒤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반성의 빛이 없다는 내용을 꾸며 왕에게 고해바치기에 이르렀고, 이에 분개한 왕은 급기야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성종이나 인수대비는 사약을 내려 죽게 만든 윤씨의 아들 융을 세자로 책봉했다는 것이 영원한 미스테리다. 비록 유일한 적장자이나 어린 융이 자신의 어머니가 어떻게 폐출되었고 그리고 사약을 받고 죽었는지 나중에는 당연히 알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었을 경우에는 조정에 엄청난 피바람이 몰아칠 것을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었는대도 불구하고 그런 조치를 취했다는 점이 의문이다.
폐비 윤씨
폐비 윤씨(廢妃 尹氏, ? ~ 1482년 음력 8월 16일) 또는 제헌왕후(齊獻王后)는 조선의 제9대 왕 성종의 후궁이자, 두 번째 왕비이며, 10대 왕 연산군의 생모이다. 폐출되었으므로 보통 폐비 윤씨라 부른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에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증 의정부영의정 함안부원군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와 신씨의 딸로, 훈민정음 창제와 세조 반정에 가담한 신숙주의 외조카이며 윤관의 11대손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성종의 후궁 문제로 성종과의 갈등으로 유명하며, 성종의 용안을 긁은 일로 인해 폐서인 후 사사되었다. 사사 당시 피를 토한 금삼을 친정어머니 고령신씨에게 넘겨주며 아들이 자라면 넘겨줄 것을 유언했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도화선이 된다. 연산군 즉위 후 제헌왕후로 왕후의 작호가 추숭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시 삭탈되었다.
출생과 가계
윤씨는 봉상시판사를 지낸 윤기견과 장흥부부인(연산군 사후 군부인으로 격하) 고령 신씨의 딸로 태어났다. 윤기견의 자녀로는 3명의 이복 오빠와 1명의 친오빠가 있었다. 할아버지 윤응(尹應)은 통훈대부(通訓大夫) 교하현감(交河縣監)이었고, 증조 할아버지 윤득룡(尹得龍)은 조선조정에 처음 벼슬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와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역임했다. 고조부 윤희(尹禧)는 고려조에서 정순대부(正順大夫)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낸바 있다. 그녀의 아버지 윤기견의 죽음으로 인해 집안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궁녀로 입궁했다고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희왕후가 그녀를 훗날의 정현왕후가 되는 윤호(尹濠)의 딸과 함께 입궁시켜 숙의의 첩지를 내린 사실이 명백히 표기되어 있고, 또한 당대의 권신이었던 신숙주의 당조카였던 덕분에 넉넉한 환경에서 자라날 수 있었으므로 그녀가 궁녀로 입궁했다는 것은 거짓으로 보인다.
폐비 윤씨의 선계는 본래 파평 윤씨로, 고려 예종 때의 장군, 시중 윤관의 11대손녀가 된다. 폐비의 6대조 윤돈(尹敦)과 5대조 윤희보(尹希輔)가 고려 조정에서 출세하여 흥위위 주부를 거쳐 함안백(咸安伯)으로 봉작되면서 함안윤씨로 분가했던 것이다. 따라서 폐비윤씨의 본관을 파평으로 전하는 문헌도 있었다.
입궐과 간택
윤씨는 성종 4년(1473년) 음력 3월 19일에 간택후궁으로 입궁하여 숙의에 봉해졌다. 아버지 윤기견은 사망하였으나, 그의 외당숙이 세조 반정의 공신인 신숙주였으므로 쉽게 그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성종 5년(1474년)에 한명회의 딸이며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성종은 별도의 왕비 간택령을 내리지 않았고, 그로부터 2년 뒤에 숙의였던 그녀가 임신중인 몸으로, 왕비로 승격되어 3개월 뒤 원자(연산군)를 낳아 중전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폐출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여자 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성종이 자신의 처소에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다른 후궁들을 질투하여 잡아다가 추궁, 취조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 성종의 눈밖에 났고, 말싸움 중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왕대비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는 설이 있으며, 다른 설로는 삼사의 탄핵으로 폐출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그녀에 대한 왕실의 사후 예우를 본다면 왕실의 눈 밖에 나 폐위된 것이 유력하다.
또한 경쟁관계에 있던 성종의 다른 후궁들이 인수대비를 찾아가 윤씨를 비판하며 그녀의 폐위를 부추기기도 했다.[3] 이러한 일련의 사건 등으로 윤씨는 마침내 1479년 음력 6월 2일에 왕비에서 폐위되었다.
사사 사건
조선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서인이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 두고자 하였으나,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엄숙의, 정숙용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면서 1482년 음력 8월 16일, 결국 사약을 받아 사사되고 말았다. 윤씨는 죽기 전 자신의 피가 묻은 금삼을 친정어머니 장흥부부인에게 "아들이 자라거든 이를 전달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면서 1504년에 갑자사화 등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로 인해 한명회 , 한치형 등의 사람들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 이외의 사람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되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의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숭되고, 회묘는 회릉(懷陵)으로 격상되었다.
사후
사후 경기도 장단에 매장되었으나 장지가 좋지 않다는 지관의 지적으로 신하들의 건의가 있자, 성종은 1488년(성종 19년)경 한성부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로 이장을 하였다. 뒤에 윤씨의 묘가 회묘, 회릉, 회묘로 변경되면서 이는 지명이 되어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의 지명 유래가 되었다.
성종은 폐비 윤씨의 묘를 '윤씨지묘(尹氏之墓)'라 비석을 세우고, 제관 2명을 보내 기일에 제사를 올리도록하되, 묘의 이름을 영구히 고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후에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묘는 회묘에서 효사묘(孝思墓)로 바꿨다가 다시 회릉으로 격상시킨다.
연산군 사후
그뒤 무덤은 현 위치인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신동(현 고양시 덕양구)로 이장하였으며, 서삼릉 내에 위치한 회묘(懷墓)이다. 왕비의 예에 따라 능으로 개장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어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윤씨에게 올린 관작과 존호는 모두 삭탈되었고,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회묘 근처에는 후궁 묘역이 있으며, 그 중 윤씨의 묘소는 봉분이 크고 석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가족
아버지 윤기무는 두 번 결혼했는데, 그 중 양성 이씨가 낳은 배다른 오빠 3명이 있었고, 생모인 장흥군부인 고령 신씨에게서 낳은 친오빠 1명이 있었다.
- 할아버지 : 윤응(尹應, 통훈대부(通訓大夫) 교하현감(交河縣監))
- 할머니 : 숙인 안동 권씨(安東 權氏,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낸 권소(權紹)의 딸) - 4남 2녀
- 고모 : 윤씨
- 고모부 : 최첨로(崔添老, 내시령(內侍令)을 역임)
- 고종사촌 오빠 : 최문손(崔文孫, 태종 때 문과에 급제)
- 고종사촌 오빠 : 최효손(崔孝孫, 태종 때 문과에 급제)
- 친정아버지 : 윤기견
- 친정어머니 : 양성 이씨
- 친정 오빠 : 윤우(尹遇)
- 친정 오빠 : 윤해(尹邂)
- 친정 오빠 : 윤후(尹逅)
- 친정어머니 : 장흥부부인 고령 신씨
- 외할아버지 : 신평(申枰)=신숙주의 숙부
- 친정 오빠 : 윤구(尹遘)-병조참판
- 시할아버지 : 세조(世祖)
- 시할머니 :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
- 시아버지 : 덕종(德宗) : 의경세자(懿敬世子)
- 시어머니 : 소혜왕후(昭惠王后) : 인수대비(仁粹大妃)
- (법적) 시아버지 : 예종(睿宗)
- (법적) 시어머니 : 안순왕후(安順王后)
- 남편 : 성종(成宗)
- 아들 : 연산군
- 며느리 : 거창군부인 신씨, 신승선의 딸
- 외할아버지 : 신평(申枰)-사간원 정언
- 외할머니 : 장흥 마씨
- 외증조부 : 신포시(申包翅)
- 외종조부 : 신장
- 외당숙 : 신숙주(申叔舟, 1417 ~ 1475), 친정어머니 고령 신씨의 사촌 오빠
- 외종조부 : 신장
- 증외고조부 : 마천목(馬天牧, 1358 ~ 1431, 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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