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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54 : 조선의 역사 96 (제10대 연산군일기 4) 본문
한국의 역사 554 : 조선의 역사 96 (제10대 연산군일기 4)
제10대 연산군 일기(1476~1506년, 재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1. 왕위를 이은 폐비 윤씨의 아들 융(계속)
세자 융은 자신의 어머니가 폐출당해 사사된 사실을 모르고 자라났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었다고도 한다. 융은 윤씨가 폐출될 당시에 불과 네 살배기 어린 아이에 불과했고, 또한 성종이 폐비 윤씨에 대한 사건을 일체 거론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자 융은 어머니 윤씨가 폐출된 후 왕비로 책봉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인 줄 알고 자랐다.
그러나 천륜을 속일 수는 없었던지 융은 정현왕후 윤씨를 별로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정현왕후 역시 폐비의 자식에게 친자식처럼 사랑을 쏟아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 인수대비는 융에게 지나칠 만큼 혹독하게 대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쫓아낸 며느리의 아들이 고울 리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에게는 대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융의 가슴에 깊은 소외감과 한이라는 응어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성장의 배경 탓인지는 몰라도 융은 결코 양순한 아이로 자라지는 않았다. 자신의 내면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음험한 구석이 있었으며 괴팍하고 변덕스러운 성격이 형성되어 갔다. 그것은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마음이 들면서 더욱 심해졌다. 게다기 융은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들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성종은 이런 성격을 가진 융을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1483년 그를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이때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에 화를 부를 것이라며 반대를 했다. 하지만 이때는 진성대군도 태어나지 않은 때라 왕비 소생의 왕자는 융 한 명 뿐이었다. 그래서 성종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성종과 주위 사람들이 세자의 포악한 성품을 우려했던 일화들이 야사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다음 두 가지이다.
성종이 어느 날 세자 융을 불러놓고 임금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려 할 때였다. 부왕의 부름을 맏고 온 융이 성종에게 다가가려 할 때 난데없이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옷과 손등을 핧아댔다. 그 사슴은 성종이 몹시 아끼던 애완동물이었다. 하지만 융은 사슴이 자신의 옷을 드럽힌 것에 격분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종은 몹시 화가 나서 융을 꾸짖었다. 그래서 후일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융은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쏴 죽여버렸다.
다른 이야기는 그와 그의 스승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스승은 허침과 조지서 두 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학문과 명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두 스승들의 성격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조지서는 엄하고 깐깐한 데 비해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웅은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자주 수업시간을 비우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깐깐한 조지서는 툭하면 그 사실을 상감에게 고해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하였다. 하지만 허침은 언제나 웃으면서 부드럽게 타이르곤 하였다.
어린 세자는 당연히 조지서를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했다. 그래서 하루는 벽에다 "조지서는 대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라고 낙서를 해놓았다. 융의 이 낙서는 단순한 낙서로만 그치지 않았는데, 그가 왕위에 오른 후 조지서를 죽여버렸던 것이다.
세자 융에 대한 이 두가지 일화를 통해 그가 집요하고 끈질기며 자신의 잘잘못에 관계없이 자신을 질타하고 위협했던 존재는 용서하지 않았던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성격은 그가 왕이 된 뒤에 두 번의 사화를 거치는 동안 더욱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만다.
우리는 여기서 성종의 세자 융에 대한 세자 책봉에 대해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첯째, 폐출된 윤씨의 적장자라는 이유로 세자를 책봉하였는데, 그의 삐뚤어진 성격과 포악한 성향이 군주로서 적당한 인물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강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적장자가 하나 뿐이라는 이유로 그런 성향의 인물을 세자로 책봉하였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다.
둘째, 진성대군이 태어난 뒤에도 그런 성격의 세자 융을 그대로 세자에 둔 것도 문제였다. 인수대비가 세자 융의 책봉을 반대하였는데, 왜 인수대비는 진성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는지도 의문이다. 결국 성종 사후 인수대비는 손자인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셋째, 폐비 윤씨 사건은 세자 융이 왕으로 등극하면 조정에 피바람이 불 것은 뻔한 일이었는대도 불구하고 윤씨는 사사되었지만 사전에 복권을 시켜주지 않았던 점과 그 일을 사전에 세자 융에게 이해가 되도록 교육을 시키지 않고 감추려고만 한 점 등이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는 점과 어리석은 조치였다는 점이 의문이다.
넷째, 성종은 자신이 적장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인수대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장자지만 포악한 성향의 융을 세자 책봉을 고집하였는지도 의문이다.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일까? 아니면 인수대비에 대한 반항심일까? 어찌되었던지 성종의 선택은 현명한 군주로써 선택할 방안은 아니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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