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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51 : 조선의 역사 93 (제10대 연산군일기 1) 본문
한국의 역사 551 : 조선의 역사 93 (제10대 연산군일기 1)
제 10대 연산군
연산군(燕山君, 1476년 음력 11월 7일 (양력 12월 2일) ~ 1506년 11월 6일, 재위 1494년 ~ 1506년)은 조선의 제10대 임금이다. 휘는 융. 성종의 장남으로 폐비 윤씨소생이며,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모후 폐비 윤씨의 폐출 이후 정현왕후의 손에 자랐으나,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임을 알고 있었다. 그 뒤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비로 추숭하려는 것을 반대한 사림파 문인들과 갈등하다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빌미로 사림파를 제거 한다. 이때 갑자사화 때에는 훈구파 역시 대량으로 숙청하여 사림, 훈구 양측을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된다. 중종 반정 후 강화군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곧 사망한다.
시호는 폐위되었기에 없으며 살아있을 때 받은 존호는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다. 진성대군(중종)의 이복 형이자 처고모부가 된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지목되고 있다.
출생
1476년 음력 11월 7일 (양력 12월 2일) 조선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종은 첫 아들인 연산군을 총애했고, 대군에 책봉되지 않고 태어나자마자 원자에 책봉되고 생후 1년만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후궁이 많았던 부왕 성종과 폐비 윤씨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고,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을 기회삼아 후궁들과 인수대비는 윤씨를 왕비에서 폐하고 궁궐에서 축출한다. 1483년(성종 14) 세자에 책봉되었고, 허침(許琛)·조지서(趙之瑞)·서거정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역사학자 이덕일에 의하면,연산군은 자신이 정현왕후의 친아들이 아니며 폐비윤씨가 폐출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세자 시절
그는 어려서 모친 폐비 윤씨가 사사되면서 정현왕후의 아들인 것처럼 성장하였다. 흔히 1504년(연산군 10년) 폐비 윤씨의 사사 내막을 임사홍 등이 폭로함에 따라 피바람이 몰아쳤다고 알고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연산군은 즉위이전부터 생모인 폐비윤씨의 비극적인 죽음과 자신을 돌본 정현왕후가 친 어머니는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연산군은 즉위한 뒤, 자신의 할머니와 삼촌인 신씨와 윤구를 전라도 장흥에서의 귀양살이에서 해방했으며, 쌀 30석과 노란콩 20석을 하사하여 생활이 어렵지 않도록 배려했다.
일설에는 이후 폐비 윤씨의 소생 연산군은 그를 생모로 알고 자라다가, 성종의 묘비명과 행장을 쓸때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을 알게 되면서 갑자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학살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설도 있다. 역사학자 이덕일에 의하면, 정현왕후는 친정아버지 윤호와 사촌 윤필상 등과 짜고 윤씨를 폐출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덕일은 성종이 오래 살았더라면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었다고 보았다.
즉위
연산군은 즉위 후 즉위초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지방으로 주민을 이주시키는 한편, 녹도(鹿島)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고 건주야인을 회유 또는 토벌하는 등 국방에 주력하였다.
즉위 초기에는 빈민을 돕고 《국조보감》(國朝寶鑑) 등 여러 서적을 완성시켰으며 국방도 튼튼히 하였다. 연산군은 사창·상평창·진제창(賑濟倉)의 설치하여 빈민의 어려움을 덜어주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부활하였으며, 또한 《경상우도지도》, 《국조보감》, 《동국명가집》 등을 간행하였고, 《역대제왕시문잡저》, 《속국조보감》, 《여지승람》을 완성하는 등, 즉위 초에는 다소의 업적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즉위 직후 그는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외할머니 장흥군부인 신씨와 외삼촌 윤구를 석방한다. 즉위 이듬해부터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권시키는 일을 추진한다. 그러나 사림에서는 '사후 백년간 폐비 윤씨 문제는 논외에 부친다'는 선왕의 유지(성종의 유언)를 이유로 들며 폐비 복권을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감정이 악화된 연산군은 사림파의 제거를 추진하였다.
무오사화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이 사초(사관이 기록한 역사 기록)에 수록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의 계유정난을 비난한 것이라는 이극돈, 유자광의 참소에 따라 김일손뿐 아니라 많은 사림을 처형하거나 유배하고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부관참시하였다(→무오사화). 이후 이극돈, 유자광, 윤필상 등 훈구파 고관들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운다. 국문장에서 김일손을 국문하자 김일손은 자신은 하늘에 한점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 하며 스승과 스승의 동료 문하생들을 모두 발설하였다.
무오사화의 결과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형을 집행했다. 또한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盤)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하였다는 죄를 씌워 죽이고, 강겸(姜謙)·표연말(表沿沫)·홍한(洪澣)·정여창(鄭汝昌)·강경서·이수공(李守恭)·정희량(鄭希良)·정승조(鄭承祖) 등은 난(亂)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귀양을 보냈으며, 이종준(李宗準)·최부(崔溥)·이원·이주(李胄)·김굉필(金宏弼)·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강백진(姜伯珍)·이계맹(李繼孟)·강혼(姜渾)·남곤(南袞)·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역시 귀양을 보냈다.
또한 김종직의 문인인 성희안, 유순정 역시 연좌하여 한직으로 좌천되는데 이들은 이때부터 연산군에게 원한을 품고 박원종의 쿠데타에 적극 동참하게 된다. 한편 어세겸(魚世謙)·이극돈(李克墩)·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김전(金銓)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면되었다.
갑자사화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년 음력 10월에 임사홍 등의 궁중파와 부중파 간의 권력투쟁이 발생하자 이를 이용하여 어머니의 한을 풀고자 했다. 사림파 일부는 성종의 유지를 주장해 폐비복위를 반대하였고, 이극돈, 유자광, 윤필상 등 훈구파 고관들은 갑자사화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사림파에게 대대적인 타격을 하였다. 연산군은 이들을 이용 사림파를 제거한 뒤, 훈구파 중 부중파 역시 제거한다.
성종의 두 후궁 및 사림·훈구 대신들을 살아 있으면 처형하고 이미 사망했으면 부관참시한 것인데 특히 그 가족과 제자들까지 처벌하였고 이를 갑자사화라고 부른다. 사화를 주도했던 이극돈, 윤필상 자신들 또한 갑자사화로 희생되었고,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은 부관참시되었다.
이때 조모인 인수대비와의 언쟁 중 조모를 머리로 들이받았는데, 그 후유증으로 인수대비는 사망하였다.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초상 때 역월지제(易月之制)라 하여 삼년상 대신 25일상을 치르는 등의 행위가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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