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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49 : 조선의 역사 91 (성종실록 19)

두바퀴인생 2012. 4. 8. 04:24

 

 

 

한국의 역사 549 : 조선의 역사 91 (성종실록 19)

 

                                                               

   

         

 

                                                         

 

                            

                                                                                       

제9대 성종실록(1457~1494년, 재위 1469년 11월 ~ 1494년 12월, 25년 1개월)

 

 

9. 성종시대의 역사적인 평가 (계속)

 

중궁의 자리는 이듬해 숙의 윤씨로 정해지게 되어 폐비된 윤씨를 대신하였다. 즉, 1480년(성종 11) 11월 8일에 새로이 왕비를 책봉하여 곤위(坤位)를 채웠는데 이 때 그녀의 나이 열 아홉이었다. 그녀는 우의정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평정공(平靖公) 윤호(尹壕)의 딸로 1473년(성종 4)에 뽑혀 궁에 들어와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가 제헌왕후 윤씨가 폐비되면서 그 이듬해인 11년에 왕비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진성대군(晋城大君) 즉 중종과 신숙공주(愼淑公主)를 낳았는데 공주는 일찍 죽었으며, 연산군 때를 거치고 아들인 중종이 왕위에 오른 뒤 중종 25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윤씨는 별궁에 폐치된 뒤 다각도로 왕비의 지위 회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이고 또 원자인 연산군이 성장함에 따라 이를 배경으로 정치권과의 연결을 시도하였던 듯하다. 성종의 표현을 빌리면 “심지어는 일찍이 역대(歷代)의 모후(母后)들이 어린 임금을 끼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던 일을 보면 스스로 기뻐하고”라든가, “외부(外部)의 사람들이 원자(元子)가 점차 성장하는 것을 보고는 앞뒤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이 사건을 말하는 이가 많다”라고 하여 윤씨가 자신의 행실에 대해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원한을 품고 보복을 할 기회를 찾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특히 윤씨에 대해 반대의 입장에 서 있던 이들은 매체를 완전 장악하여 결국 성종으로 하여금 더욱 적극적이고 비극적인 결단을 내리게 하였다. 바로 사사(賜死)였던 것이다. 1482년(성종 13) 8월 16일에 있었던 다음의 사실들은 이러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종은 이날 영돈녕(領敦寧) 이상 의정부(議政府) · 육조(六曹) · 대간(臺諫)들을 명소(命召)하여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인견하고 윤씨의 처리에 대한 논의를 하도록 하였다. 먼저 성종은,


 “윤씨(尹氏)가 흉험(凶險)하고 악역(惡逆)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초에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하겠지만, 우선 참으면서 개과천선하기를 기다렸다. 기해년에 이르러 그의 죄악이 매우 커진 뒤에야 폐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지만 그래도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는 아니하였다. 이제 원자(元子)가 점차 장성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안정되지 아니하니, 오늘날에 있어서는 비록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각기 사직(社稷)을 위하는 계책을 진술하라.”

하였다. 정창손은 이에 대해 원자가 있기에 어렵다고 하였지만 사실 성종의 결심은 이미 굳어져 있었고, 대신들로 하여금 그 대책을 진술하도록 한 것은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뒤이은 성종의 표현에는 이것이 나타나 있다. 즉,


 “내가 만일 큰 계책을 정하지 아니하면, 원자(元子)가 어떻게 하겠는가? 후일 종묘와 사직이 혹 기울어지고 위태한 데에 이르면, 그 죄는 나에게 있다.”
하였다. 그리고는 곧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賜死)하게 하고, 우승지 성준(成俊)에게 명하여 이 뜻을 삼대비전(三大妃殿)에 아뢰게 하였다.

왕실 최대의 비극이 마침내 1482년(성종 13)8월 16일에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483년(성종 14) 2월에 윤씨 소생인 원자 융(쌽)이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8세였다. 그 어머니를 사사하고 그 아들을 세자로 삼았으니 어찌보면 모순된 일이었다.


그리고 정해진 세자 수업의 과정을 밟도록 하였다. 연산군의 경우 그리 뛰어난 자질은 아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종은 윤씨와 관련한 일은 원자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였지만 그것은 사실 천륜을 끊는 일인지라 인력으로는 어려웠다. 그리고 이러한 염려는 결국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현실화되어 사화(士禍) 및 정치적 보복이라는 참화를 불러일으켰다.

이 후 성종의 생애는 이를 둘러싼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이었고, 왕실 내에서 더 이상의 문제가 발생치 않아 윤씨 사건은 일단락지어지게 되었다. 또한 성종은 유명으로써 윤씨에 관한 일은 100년간 논하지 말라고 하여 훗날 벌어질지도 모를 참화를 막고자 하였지만 결코 이루지 못했다.

세자 책봉이 이루어진 해인 1483년(성종 14)3월에 그 동안 병환을 앓고 있다가 병 치료차 온양에 가 있던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30일에 죽음을 맞이하여 왕실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녀의 나이 예순 여섯, 그 파란만장한 세월을 꿋꿋하게 살아온 여장부의 죽음이었다. 세조의 잠저 시절부터 그를 보필하였으며, 왕실에 들어와서는 기강을 바로잡았고, 재상들과 더불어 성종의 초기 집권을 도왔던 그녀는 조선시대 어느 왕비보다도 현숙하고 능력있는 분으로 평가받았으며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세조의 능인 광릉의 동편 언덕에 단아하게 이승의 흔적을 남겼다. 대왕대비의 죽음은 한 시대를 마감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조조에 요구되었던 정치사회 새로운 시대의 주인인 성종의 시대에 맞게 전환됨을 뜻하는 것이었다.

신숙주(1475) · 한명회(1487) · 최항 · 양성지 등의 죽음도 오랜 세월속에서 얻어진 결과였다. 다시 성종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친인의 죽음이 또 다가왔다. 바로 단 하나밖에 없는 형인 월산대군이 세상을 뜬 것이다. 1488년(성종 19) 12월 21일의 일로 그의 나이 35세였다. 군주의 친형답게 예를 차리고 겸손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면서도 검소하였다. 동생이 군주이면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그에 대해서 만큼은 모두 용서가 될 터인데도 그러한 일은 절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부인인 박씨로부터는 후사가 없었고 다만 측실로부터만 두 아들을 두었을 뿐이었다.

1488년(성종 19) 계비인 정현왕후로부터 아기씨의 탄생이 있었다. 정비로부터 얻은 두 번째의 자식인지라 성종은 매우 기뻤지만 또 그만큼의 부담도 있었다. 아무리 왕실의 예법 절차가 엄하다고는 하나 대군의 탄생은 그와 관련한 정치 세력의 형성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제 성종이 맡아야 할 부분이라기 보다는 연산군이 감당해야 할 짐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때 태어난 분이 연산군을 이어 보좌에 오르게 된 중종(中宗)이기 때문이다.

왕위에 오른 지 벌써 25년째가 되면서 성종은 점차 병약해짐을 느끼게 되었다. 한때는 왕실생활을 벗어나 성밖으로 나아가 풍류를 즐기는 일도 있었지만 그도 이제는 점차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리고 1494년(성종 25) 가을에 접어들면서 건강이 전과 같지 않음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왕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와 세종조부터 그 학문을 떨치면서 세조를 도와 창업의 공을 이룩한 신숙주, 그 학문과 경륜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국가의 문명을 이룩한 양성지, 최항, 서거정, 강희맹, 손순효… 등과 그리고 조부 세조와 왕을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던 조모 정희왕후, 언제나 왕에게 양보하면서도 밝음을 잃지 않은 형 월산대군, 일찍 돌아가셔서 그 기억은 희미하지만 왕을 돌보아주면서 아끼었을 덕종과 자애로움과 엄함으로 왕실의 살림을 돌본 어머니 소혜왕후 등 이들은 모두 생사를 떠나 다시금 가까이서 보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왕의 사랑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부인들과 많은 자식들은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제왕으로서의 지위는 모든 것을 억제하면서도 건강함을 보여야 했다. 특히 세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 친모에 대한 생각을 하자면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왕은 평상시의 일과를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행하였다. 오히려 옆에서 쉴 것을 종용하였지만 무시하였다. 그리고 그 해 겨울 12월 24일에 성종은 더욱 위독해졌다. 아무리 아늑한 곳에 자리잡은 구중궁궐이라 하더라도 계절의 매서움은 벗어나지 못했다. 성종은 관복(冠服)을 갖추고 대신을 불러 보았다. 이튿날인 12월 24일에 정침(正寢)인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였다. 향년(享年)이 38세이고, 재위(在位)한 지 26년이었다.

성종의 치세는 유교정치의 극성기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태종과 세종과 함께 세조와 성종의 치세는 바로 창업과 수성의 관계로 비유된다. 또한 공통적으로 세종 이후의 정치적 혼란이나 성종 이후의 정치적 혼란은 매우 유사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기도 하다. 성종의 치적은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그의 묘호가 `성종(成宗)'으로 정해지고 존시(尊諡)가 `인문 헌무 흠성 공효 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 된 것은 결코 허명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495년(연산군 원년) 4월 초 6일에 광주(廣州) 소재지 서쪽의 학당리(學堂里) 언덕에 모시고 이름을 선릉(宣陵)이라 하였는데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 선릉이 그 곳이며,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 함께 있다

 

군주 중심 체제의 올바른 확립을 위해 조선왕조 5백년사에 있어서 유교정치문화를 꽃피운 군주로서 많은 서적의 편찬과 활발한 학문 활동 및 정치적 안정 등을 일궈낸 임금을 꼽을 때 성종은 그 묘호 만큼이나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태종 · 세종 · 문종 · 세조 · 예종 · 성종조를 거치면서 조선 왕실은 국가 기반을 완전히 다졌다. 물론 이 기간이 평탄치만은 않았지만 비온 뒤에 땅은 더욱 굳어지는 법이다.

15세기 후반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성종은 비록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승하하였지만 25년간의 치세 기간은 매우 활발한 정치적 문화적 학문적 움직임을 보인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성종 때 등장하는 신진 사류로서의 김종직 등의 등장은 유학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정치사에 있어서도 한 획을 긋는 일이었다. 따라서 성종의 업적을 살펴보는데 있어 유교적인 군주상과 유신(儒臣)들의 활동 내용 및 사회 운영에 있어서의 유교문화의 정착 등을 중심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겠다. 그만큼 조선 전기에 있어서 나아가 조선 시기 전체에 있어서 성종이 차지하는 부분에 대한 평가는 조선 사회 전체상의 변화상을 이해하는 밑바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