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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48 : 조선의 역사 90 (성종실록 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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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48 : 조선의 역사 90 (성종실록 18)

두바퀴인생 2012. 4. 7. 02:09

 

 

 

한국의 역사 548 : 조선의 역사 90 (성종실록 18)

 

                                                               

   

         

 

                                                         

 

                            

                                                                                       

제9대 성종실록(1457~1494년, 재위 1469년 11월 ~ 1494년 12월, 25년 1개월)

 

 

9. 성종시대의 역사적인 평가 (계속)

 

성종은 왕위에 오른 초기인 5년에 평생의 배필로 맞이한 왕비 공혜왕후를 잃게 된다. 한명회의 둘째 딸로 몸이 허약할 뿐 모든 면에 있어 훌륭한 내조자로서 잠저 시절에 성종과 가례를 맺었었다. 이 후 군주지도(君主之道)를 배우느라 몸과 마음이 피곤한 성종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었지만 5년 4월 15일 결국 창덕궁의 구현전(求賢殿)에서 꽃다운 나이인 열아홉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와 더불어 한명회의 아픔도 또한 컸다. 그것은 예종비로 들어간 장순왕후와 성종비인 공혜왕후가 모두 소생이 없었고, 열 아홉이라는 젊은 나이로 그 뜻을 펼치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데서 오는 것이었다. 그녀의 능은 파주(坡州) 공릉(恭陵)의 남쪽산에 자리한 순릉(順陵)이다.

한편 성종이 장성하면서 성종의 친정에 대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세조비인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원상체제에 대한 바로 1476년(성종 7)에 그 동안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가 병이 생겼다는 이유로 수렴청정을 거둘 것을 밝히는데서 나온 것이다. 이미 1475년(성종 6)에 이러한 섭정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있었다. 성종의 친정에 대한 논의가 서서히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데 그 익명서에서는 바로 대왕대비가 섭정하는 폐단을 지적하여 승정원에다 이를 붙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는 이듬해인 1476년 이 때 성종이 보령 스물이 되었고, 그 동안의 경연과정에서 보여준 성종의 수업내용이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점 및 정사에 참여하면서 충분히 군주로서의 국정능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판단한 결과 수렴청정을 거두어도 큰 무리가 없으리라고 본 것이다. 또 자신의 건강이 안좋아진 것도 그 한 요인이었다.

성종의 친정은 이와 같은 과정을 밟으면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세종조의 찬란한 유교 정치 문화는 성종조에 다시금 화려하게 피어오르게 되었다. 그 바탕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당시 유교 문화의 축적과 성종의 개인적인 성향과 노력, 정치적 안정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성종의 치세에 오점으로 남아 있는 왕실의 검은 먹구름은 공혜왕후의 죽음 뒤 성종 7년 왕비로 책봉된 제헌왕후 함안윤씨로부터 시작한다. 그녀는 성종보다 12살 연상이었고 숙의(淑儀)로서 내명부(內命婦)에 있다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원자의 수태와 출산에 있었다. 성종은 숙의 윤씨를 왕비로 봉함에 있어 내치(內治)와 덕행(德行), 정숙함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이 후 윤씨의 행실은 이러한 내용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내인(內人)으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즉 투기(妬忌)와 관련된 것이었다. 윤씨의 경우 이것이 특히 심하였던 것인데, 일설에는 윤씨의 행실이 이러한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성종에게 그 원인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즉 성종의 여성 편력이 무척 심하였기 때문에 윤씨가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해 투기를 하게 된 것이라고 보는 측면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은 이 상황을 설명하는데 있어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군왕의 경우는 모든 면에 있어서 달랐고 윤씨 자신도 국모로서의 체통을 지키면서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훗날 윤씨를 폐하면서 가장 주된 요인으로 실행(失行)을 들고 있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윤씨는 이미 연산군을 낳아 원자의 친모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상태여서 이후의 정국 상황을 고려할 때 쉽게 그 거취를 결정할 수 없었다. 그 논의는 성종의 보령 23세가 되던 10년 6월 2일을 전후로 하여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폐출과 관련하여 성종의 의지에 찬동하는 측과 반대로 설령 윤씨가 실행했다 하더라도 원자를 생산한 상태에서 폐비를 할 경우 그 정치적 여파가 적지 않다고 하여 이에 반대하는 측으로 나누어졌다.

승지(承旨)의 일부와 홍문관 직제학 최경지, 6조의 판서와 참판들, 은천군 이찬과 옥산군 이제 등은 중궁의 폐출을 반대하였는데 그들이 주장한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6월 2일에 은천군 이찬 · 옥산군 이제가 와서 아뢰기를,


 “이제 폐비(廢妃)한다는 말을 듣고 그 죄를 알지 못하여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왕비(王妃)는 이미 원자(元子)를 탄생하였고, 또 대군(大君)을 낳았으니, 전하(殿下)께서는 모름지기 국본(國本)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신(臣) 등은 평범한 신하와 견줄 바가 아니고 이에 나라와 더불어 휴척(休戚)을 같이 할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청합니다.”
라고 하여 그 죄됨을 다시 생각하여야 한다고 청하고 있다. 또 <연려실기술>에서 윤씨의 폐사(弊死)와 관련한 기록 중 손순효(孫舜孝)의 소도 이와 비슷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즉,

 “예를 상고하건대, 부인에게 칠거지악이 있으니 첫째는 자식이 없으면 내쫓기고, 둘째는 질투하면 내쫓긴다 했습니다. 두 가지를 비록 다 가졌더라도 만약 세가지 내쫓기지 않을 일〔三不去〕이 있으면 옛 사람은 오히려 용서했는데 한가지 내쫓길 것만 있고 여섯 가지 허물이 없는데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물며 원자의 모후를 단 하루 동안이라도 궁벽한 여염집에 있도록 하겠습니까. …… 군신과 붕우 사이에 있어서는 마땅히 의리가 은혜보다 앞서야 되겠지만 부자와 부부 사이에 있어서는 은혜가 의리보다 앞서야 될 것입니다. 훗날에 원자가 측은한 마음을 가진다면 전하께서 어찌 후회가 없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실과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종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것은 1479년(성종 10) 6월 2일 당일에 폐비와 관련한 교서를 내리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왕실에서 정비가 투기로 인하여 폐비되는 일은 조선 왕실에 있어서 초유의 사건이었다. 앞서 왕비 책봉과 관련하여 내려진 교문과 비교할 때 정반대의 평가가 내려진 것이었다.

먼저 성종 개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12살이라는 나이차와 윤씨의 적극적인 애정욕 및 다른 비빈에 대한 투기, 성종의 과도한 여성 편력 등에 대한 그녀의 불만 등이 있었다. 왕실에 있어서도 그녀의 행실이 모후인 소혜왕후(인수대비)에게 알려지고 내궁 전체의 문제로 전개되면서 더 이상의 문제의 소지를 없애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기묘록(己卯錄)>에 실린 내용 중 성종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났으므로 이를 본 인수대비가 크게 노하여 임금을 격동시켜 외정(外廷)에 보였다는 기록이 이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국가운영에 있어서는 성종조의 유교 정치 문화의 근원은 바로 덕치와 인륜 강상의 수행이었고, 왕과 왕비는 그 정점에 서 있었다. 그런데 왕비의 투기는 바로 칠거지악 중 가장 큰 죄목에 속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밖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역시 가장 큰 배경은 성종의 개인적인 생각과 모후인 소혜왕후의 결단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1482년(성종 13) 8월에 이루어진 윤씨의 사사는 그 절정에 다다른 것이다. 폐비될 당시의 상황은 사실 정치적 성격이 짙었다기 보다는 생활의 부분에서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이 후 윤씨의 활동 내용은 정치적인 복위 노력의 성격이 매우 짙었으며 인수대비와 후궁들의  계략에 의해 윤씨가 사가에서도 전혀 반성하고 있지 않다는 보고를 성종이 듣고나서 대노한 성종에 의해 윤씨의 사사라는 비극을 낳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