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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46 : 조선의 역사 88 (성종실록 16) 본문
한국의 역사 546 : 조선의 역사 88 (성종실록 16)
제9대 성종실록(1457~1494년, 재위 1469년 11월 ~ 1494년 12월, 25년 1개월)
9. 성종시대의 역사적인 평가 (계속)
최근 방영되고 있는 인수대비 드라마에서는 30회에서 세조가 죽고 33회에서 예종이 14개월의 짧은 치세로 갑자기 승하하고 34회에서는 다음 후계자를 두고 정희왕후와 조정 대신들이 모여 후계자를 결정하게 된다.
박영규씨의 실록에서는 한명회와 정희왕후 간의 정치적인 밀약이라고 하였지만 드라마에서는 꼭 그렇게 나오지는 않는다. 정희왕후는 예종의 적장자 제안대군, 수빈의 월산대군, 자을산군을 두고 토론한 결과 제안대군은 나이가 어리고, 월산대군은 병약하다는 이유로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이 제외시키고 자을산군을 후계자로 지목하게 된다. 그러면서 수빈 인수대비를 제외시키기 위해 왕비가 된 사람만이 수렴청정을 할 수 있다는 법적인 이유를 들어 수빈을 수렴청정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고 자신이 직접 수렴청정을 실시하는 것으로 만든다. 물론 원로대신들로 하여금 원상제도를 포함하여 성종의 통치를 보좌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전주 이씨 가문에서 작성한 성종의 즉위 과정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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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조의 장례를 치르면서 건강을 잃기 시작한 예종은 1469년 11월에 갑자기 승하하였다.
그것은 갑작스런 그야말로 천붕(天崩)과 같은 일이었다. 이에 따르는 왕위 승계의 혼란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제안대군이 미처 세자로 정해지기도 전인지라 그 혼란은 더욱 증폭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어린 세자 혹은 어린 군주의 등극에 대해서는 강력한 반대 입장을 품고 있던 왕실로서는 예종 후사로 1순위인 제안대군에 대해 일단 재고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4살의 어린 아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왕실에서는 예종의 후사로 누구를 정해야 할지에 대해 설왕설래하였다. 예종의 혈통이 일단 제외된 후 다음 왕실의 적통에 가장 근접한 후보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이었다. 당시 그는 열다섯이라는 비교적 장성한 나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와 배려 속에서 일단 왕실과 각 정치 세력들은 예종의 후사로 성종의 즉위에 따랐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단서가 될만한 조건들이 붙여졌다. 그것은 성종이 일단 나이 아직 어리고, 또 세자로 책봉되어 왕자 수업을 익힌 것도 아닌 상태였다. 물론 그에게 제왕의 자질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치자(治者)로서 가져야 할 여러 가지 조건들을 모두 갖췄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세조비 정희왕후가 어린 성종을 대신하여 성종이 친정할 수 있을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고 이와 함께 대신들이 그를 보좌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군주등극의 적정 연령이 대략 스무살로 상정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열살 되어 입학하고 길례를 행하며, 세자로서의 수업을 행한 뒤 스물이 되어야 비로소 정사를 돌보는 성인으로서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성종의 학문적 자질이야 익히 알고 있는 바이나 당시 왕실에서는 어떠한 준비로 그의 성장을 도와주었을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경연(經筵)을 통하는 방법이었다. 역대 제왕들은 치도(治道)를 확립하기 위해 유교 경전의 강습을 시행하는 한편 그 적용범위와 의미에 대해 충분한 숙고를 하였다. 더불어 과연 그 내용이 덕화(德化)에 적합하느냐, 그리고 현실성이 있느냐에 대한 고민을 강론을 통해 직접하게 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당대 최대의 석학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들을 경연관(經筵官)으로 정하여 학습을 돕게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경연관은 군주의 정치상을 확립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왕자군(王子君)에 있을 때는 어떻게 경전에 대한 공부를 하였을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 예종 원년 7월에 마련된 종친규찰조문의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즉, 내용을 보면 종부시 제조와 종학관은 매달 문(文)을 닦는 종친에게 사서 오경 · 사학(史學) · 무경(武經) · 병요(兵要) 등의 한 책에서 세 곳을 강하여 4계월(季月)에 통(通) · 불통(不通)을 기록하여 아뢰도록 할 것과, 종부시 제조와 도총관은 무를 닦는 종친에게 화살 3개씩 과녁에 쏘기를 두 차례 시험하여 4계월에 맞힌 수를 갖추어서 아뢸 것, 문무 종친이 전강할 때와 관사할 때에는 경서와 사어(射御)를 시험한 뒤 4계월에 획수를 통틀어 계산하여 혹은 가자(加資)하고 혹은 준직(準職)할 것 등이었다.
즉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와 종학관(宗學官) 및 도총관(都摠管)을 중심으로 경사(經史)는 물론 무예의 학습훈련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종도 왕자 시절에는 당연히 이러한 과정을 거쳤고 특히 그의 능력 정도는 발군의 실력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실질적인 통치 능력을 기르는 일이었다. 선대의 과정을 보면 세자시절 왕을 대신하는 대리청정(代理聽政)을 거치거나 섭정(攝政)을 통하여 군주로서의 위엄을 먼저 배우고 있다. 이는 세자가 장성한 나이가 되거나 당시의 군주가 후계에 대한 선견지명을 가져 미래를 도모할 수 있어야 가능한 과정이다. 그런데 태종-세종, 세종-문종, 세조-예종의 경우는 이를 실시하여 그 성과를 분명히 거두었다. 또 그렇게 해야 왕위에 오르는 세자가 군권(君權)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종은 이러한 과정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세조비(世祖妃)이자 성종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대왕대비(大王大妃)의 수렴청정 및 한명회(韓明澮) · 신숙주(申叔舟) · 구치관(具致寬) · 최항(崔恒) · 홍윤성(洪允成) · 조석문(趙錫文) · 김질(金?) · 윤자운(尹子雲) · 김국광(金國光) 등 원상(院相)의 보좌가 이루어지게 된다. 청정(聽政)과 관련한 <예종실록>의 기사는 이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신숙주 등이 대비의 청정(聽政)을 계청(啓請)하였다. 태비가 전교하기를,
“나는 이미 박복하여 일이 이와 같으니, 심신을 화평하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수양하려고 한다. 또 나는 문자(文字)를 알지 못하지만 수빈(粹嬪 : 성종의 생모이자 덕종의 비인 소혜왕후 한씨를 말함)은 문자도 알고 사리에도 통달하니, 가히 국사를 다스릴 것이다.”
라고 하여 일단은 사양하였다. 신숙주 등은 다시 아뢰기를,
“옛날부터 고사(故事)가 있고, 또 온 나라 신민의 여망(輿望)이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태비가 두 번, 세 번 사양하자, 원상과 승지 등이 굳이 청하고 인하여 글을 올려서 이르기를,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국가가 성상의 슬픔을 만나 재앙과 근심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세종대왕께서 향년이 길지 못하였는데, 또 이제 대행대왕도 갑자기 만기(萬機)를 버리시었고, 계사(繼嗣)가 유충하여 온 나라의 신민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니, 자성왕대비(慈聖王大妃) 전하(殿下)께서는 슬픔을 조금 누르시고, 종묘와 사직의 중함을 생각하시어, 위로는 옛 전례를 생각하고, 아래로는 여정(輿情)에 따라 무릇 군국의 기무를 함께 듣고 재단(裁斷)하다가 사군(嗣君)이 능히 스스로 총람(摠攬)할 때를 기다려서 정사를 돌려주시면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와 같은 실록의 내용은 성종의 즉위 및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에 대한 배경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고, 이는 또한 원상과의 합의를 통한 정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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